"대개 납세라는 것은 국민의 동등한 의무로서, 세금을 많이 내는 자가 의정에 뽑힐 권리를 가지며, 세금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국민 자격을 잃는 것이 각국의 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세금을 내는 자는 천하고 자격이 없으며, 세금을 내지 않는 자가 귀하고 권리가 있었다."

 -박은식, 『한국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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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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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in(접두사): 한계, 문턱

 

 <참말 하느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

 

 이윤기는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그의 의식에는 언제나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성찰한다. 에피소드처럼 나열된 의식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한 전제가 되고, 페이지가 더할수록, 문을 향한 달림은 빨라진다. 어디를 향한 문인가? 창세기에 묘사된, 야곱의 꿈에 나왔던 하늘의 문이다. 그 문이야말로 이윤기가 평생을 추구했던 길이요 삶이요 진리였다.

 

 도대체 이윤기, 라는 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소설가도, 번역가도, 시인도,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나는 그를 '하늘의 문턱에 선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밖에 갇힌 자"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허물로 낙원을 잃고 밖에서 그 허물을 한하며 이를 가는 자. 열쇠가 들어 있는 낙원으로 열쇠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자. 따라서 문을 부수지 않고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는 자……." 이것이야말로 이윤기의 모습 그 자체이다.

 

 본래 『하늘의 문』은 1994년에 출간된 이윤기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담긴 소설이다. 

 

 『하늘의 문』에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다분히 투영되어 있다. 국토를 도보로 일주하려는 야망과 베트남 전 참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겪는 문화의 차이에 대한 깨달음,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 이러한 부분은 번역하듯 묘사되어 있어 자서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자전적인 면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기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 하늘의 문으로 가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윤기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말은 늘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이 세상의 사물은 어차피 개인의 경험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히기 마련이므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모두 자전의 운명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것 역시 바른 방식이 아니다. 이윤기는 이 책 속에서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하늘의 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바뀌어야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의 문』은 결국 고백록이다.

 

 한 마디로 이윤기는 그리스 인 조르바

이다.

 

 최근에 나는 이윤기의 딸, 이다혜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2013년에 사서 1년만에 『하늘의 문』을 완독했다. 그 동안 나는 정말로 즐거웠고, 이윤기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그를 소리꾼, 조르바, 똥폼의 사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문턱의 남자'라고 부른다. 사실, 난 아직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문턱"이라는 말을 내 삶에 쓸 수 있다면, 그 때는 알게 되겠지.

 

 limin: 문턱, 경계.

 문턱: 1.문짝의 밑이 닿는 문지방의 윗부분.

 2. 어떤 일이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려는 무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limin으로서의 문턱: 두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문턱의 남자는, 이분법의 세상에서 벗어난 하늘의 남자, 야곱인 것이다. 헬라인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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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독에서 벗어나시옵소서. 이제서야 그대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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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요즘 시대에, 이 세 명의 여성 작가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소통의 방식은 바로 젊음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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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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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

 『죽음의 중지』는 새해부터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기를 내걸며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원과 연금, 보험 문제 등이 떠오르면서 이 불멸의 삶은 국가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현상을 재앙으로 여길 때쯤, 다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소설의 첫 부분이다. 첫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주제 사라마구가 다루었던 익숙한, 그러나 가혹한 주제들, 즉 삶과 죽음의 문제, 종교와 타락의 문제, 정부와 국민의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설의 죽음이 멈춘 상황을 다방면으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는 기쁜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슬픈 일이 될 수도 있는 죽음의 중지. 나는 이 부분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라마구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나는 죽음의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죽음이 몸이라는 감옥에 구속되어 있는 영혼의 해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혼은 영원히 몸의 족쇄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만약 몸이 폭탄이나 화학 물질에 산산조각이 난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일까? 즉, 죽음의 반댓말이 반드시 삶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라마구는 죽음의 중지라는 상황을 통해, 죽음의 중지와 삶의 중지를 구별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천국과 지옥

 신기한 것은 이 현상이 포르투갈 국가 내에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는 정상적으로 죽을 사람은 죽는다. 국가 내에서도 짐승이나 식물은 죽고, 사람만 죽지 않는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신에게 나아갈 수 없게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천국 혹은 지옥이 될 터인데, 세상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사라마구는 거리낌 없이 대답한다. 만약 아무도 죽지 않고 이 땅 위에 생존한다면, 그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분명 생지옥일 거라고.

 

 『죽음의 중지』에서 가장 불행하게 된 사람은 바로 성직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신을 섬길 이유가 사라졌다. 누구도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이 처절하게 종교적 논쟁을 하는 부분은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신이 사라진 세상, 그 곳은 과연 행복할까? 신이 사라지면, 역설적으로 자유가 사라진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 분명하니까. 신은 통제자가 아니라 자유의 근원임을 모르고........ 그들으 그저 현재의 상황에 기뻐할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을 버린 그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어리석은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

 눈이 머는 전염병, 진실의 요구, 이름 없는 자에 대한 추적, 그리고 죽음의 파업. 세 번째 사례를 제외한 모든 일에 정부가 개입한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감염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두 번째 사례에서는 의사의 아내를 추적하고, 마지막 사례에서는 국경선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다가 결국 마피아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사태를 막으려고 한다.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이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결국 그들의 조치와 정책 모두가 국민들을 슬픔과 절망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이것이 사라마구 소설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판 의식이다. 만약 이것을 볼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사라마구의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인 국민, 개인이라는 것을.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관통하는 주인공, 의사의 아내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추적자인 주제 씨, 그리고 『죽음의 중지』의 죽음. 이제부턴 두 번째 부분이다.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이름의 여인. 이제 소설의 흐름은 시간을 거스른다.

 

 죽음을 극복한 사랑

 죽음을 극복한 사랑, 이것이 이 소설의 진짜 주제이다. 그는 이 주제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여자로 형상화시킨 이후, 마치 신처럼, 그녀에게 인격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언제 죽을지를 알려주는 자주색 편지를 한 첼리스트에게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첼리스트를 사랑하여 결국 편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죽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그 다음 날부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라마구는 이 줄거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죽음이 어떻게 사랑에 굴복하게 되었는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사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사랑이 이야기를 이끌지 않았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연민과 책임감의 사랑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는 이유 없는 사랑이, 『죽음의 중지』는 죽음을 뛰어넘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녀는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죽음을 멈추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사라마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삶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얼마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국경선을 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 세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들 안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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