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짐 열린책들 세계문학 266
조셉 콘래드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자리나 모임에서 다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지닌 사람은 흐름에 따라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인원이 모이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사람들이 눈을 돌린 것은 OTT와 유튜브였다. 그들은 이야기의 바다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또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이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 더 강렬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내가 이야기를 이끌거나, 그 흐름에 완전히 따라가야 몰입이 잘 되는 법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재생되는 것을 사용자가 주도하는 경험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컨텐츠를 추천하고 관람하는 이유는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로드 짐(Lord Jim)』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를 알게 된 계기는 잭 런던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선원 생활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담긴 뱃사람의 면모에 감탄했고, 특히 잭 런던은 공개적으로 그의 작품에 찬사를 남겼다. 게다가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의 명성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소설 아닌가? 그래서 그의 작품들 중 무엇을 먼저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전반부의 이야기를 보고 이끌리듯 책을 집었을 것이다. 뛰어난 항해사 짐은 파트나호를 타고 가던 중,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승객은 800명이지만, 구명정은 일곱 척뿐이었다. 짐은 고민하다가 승객들을 깨우지 않고 구명정으로 몰래 빠져나간다. 하지만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선장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은 행적을 감춘다. 결국 짐만 재판정에 서서 증언을 한다. 당연하게도 유죄가 선고되고 짐은 항해사 자격을 잃은 채 고국을 떠나게 된다. 그러던 그가 파투산에 정착하고 그곳 원주민을 다스리는 '로드 짐'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속을 종잡을 수 없는 행적으로 방문자들과 원주민들 모두의 원성을 산 그는 총에 맞아 쓸쓸히 사망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말로라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콘래드는 이것을 소설이 아니라, 어떤 구전된 이야기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전반부 이야기의 중심 소재인 파트나호 사건을 실화에서 끌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후반부 이야기는 기존의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상상력의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가 자신도 인정했듯이, 전반부의 이야기와 후반부의 사건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정확히 말해 말로의 증언을 끝까지 경청하고 나면 알게 된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영화나 책의 서평에 적힌 대략적인 줄거리와 감상, 비판점을 보고 난 후, "그 작품을 봤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말이 통하기도 한다. 직접 작품을 감상한 사람도 사소한 사항들은 놓치기 마련이고, 대략적인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야기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흐름이 있고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작품에 대한 인상은 희미해지겠지만,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더 오래 남으리라. 조셉 콘래드는 짐이 <우리 중의 한 명>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하지만, 말로야말로 독자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끈기있게 기억하고, 시작한 말을 끝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는 인생과 같다. 시작된 이상 반드시 끝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짐의 고민과 선택, 후회와 도피, 지배와 최후는 각자의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 독자는 원하는 만큼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흥미가 떨어진다면, 즉시 책을 덮고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린 다음, 먼지가 쌓일 때까지 내버려둘 수도 있다. 만약 계속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루만에도 가능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토록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큰 특권이다. 모두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스릴 주도권이 있다. 컨텐츠가 넘치다 못해 만연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에 대한 인식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이유이다. 


 이 소설이 처음 책의 형태로 나왔을 때, 작품이 나를 이끌었다는 말들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들은 단편소설로 시작된 이 작품이 급기야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한두 명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적 증거를 찾아내고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그 사람들은 서술 형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한 사람이 그토록 오랜 시간 혼자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내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상황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약 16년을 이 문제로 숙고해 보았지만, 아직도 그 주장에 수긍이 되지 않는다. 열대와 온대 지역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모험담을 주고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하나의 모험담만 담겨 있으며, 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 몇 차례 중단되기도 한다. 듣는 이들의 참을성에 관해 말하자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처음부터 가정되는 필수사항이다. 재미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나는 애초에 이 이야기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p.577~5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전한 기독교 (개정무선판)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잘 안다고 확신하지만, 자신의 신념만큼 흔들리기 쉬운 것도 없다. 믿음의 영역은 의심을 뛰어넘어야 하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이런 것이다. 전적으로 믿기로 다짐했다면,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예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그것 나름대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나 순간의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매순간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사람은 "내가 가는 길이 맞을까?"라는, 다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에 대해 자신 있게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보며 유독 많이 든 생각은 기독교인이 끝나지 않는 회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영적 '전쟁'이라고 종종 표현하는 까닭이 이 때문인가? 아마 그들도 끊임없는 의심을 겪었을 것이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적인 초점에서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전능한 창조주가 나를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빠른 속도로 믿음의 궤도를 벗어나려고 애쓴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컨테이어 벨트를 거슬러 가려는 것처럼,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믿음과 의심은 한 몸처럼 따라간다. 가끔은 믿음의 내용이 삶으로 나타날 때, 회의감은 극대화된다. 내가 믿음이라고 부르고,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 사실은 자기 만족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다.


 C.S. 루이스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 하나는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이 있다는 증거만큼이나 신이 없다는 주장과 근거도 방대하다. 저자는 그러한 정보들 중 자신의 취향이나 이해에 신을 끼워맞추지 말라고 선언한다. 애초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익하다. 특히, 창조적 진화론이 그렇다. 저자가 말했듯, "이 이론이 하나님을 믿는 데 따르는 감정적 위안은 듬뿍 제공하면서, 믿음에 따라오는 덜 유쾌한 결과물들은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비롯하여, '비기독교적인' 세상과 '기독교적(이라고 자칭하는)인' 나 사이의 불편한 지점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는 "종교의 감동은 모두 누리면서 그 대가는 하나도 치르지 않겠다"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요컨대,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이 일종의 싸움이라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밖에 없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중간 지대에 있기에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벨트는 불신을 향해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거나 넘어지면 금세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가 경고하는 또 하나의 죄악은 "나는 잘하고 있다"는 교만이다. 즉, 교회에서 헌신하고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에 취해 넘어질 수 있다. 루이스는 그런 사람이 불신자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내가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교만은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이나 교만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일'이고, 모든 죄의 시작은 바로 '자기중심성'에 있다. 기독교가 세상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는 자 본인의 마음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무수한 매체들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마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적절한 정도를 가르치지 못한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인을 품는 법을 잊어버린다. 


 믿음이 끝나지 않는 싸움인 이유는,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내면으로 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의 견고함 또는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의 교만 앞에서 무너진다. 그들에게서 도무지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너무 편했고, 이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래서 실수하기도 하고, 내가 위선자인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젖는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세상 어딘가에서 조용히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을 지킨다. 말은 자신을 드러낼 뿐이니까. 대신 누군가는 삶으로 믿음을 증명한다. 그 존재만으로 나는 힘을 얻는다. 


 C. S. 루이스를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모두 읽으며, 흥미롭고 감동적인 모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했던 직설보다는 그러한 우화들이 나를 더 매료시키기는 하지만, 다양한 종파를 아울러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를 탐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기억할 만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확인한다. 조만간 작가의 다른 책도 살펴보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다 2023-03-1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글 너무 잘쓰심..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너는 나의 문학>이라는 노래가 있다. "너는 나의 문학 작품이야"라는 고백을 다양한 책을 통해 전하는 가사가 인상적인데, 그 중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이 언급된다. 헤르만 헤세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막스) 데미안은 익숙한 독자들이 더럿 있을 것이다. 그 명성과 영향력이 지대했기에 어린 시절 『수레바퀴 아래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던 내가 『데미안』을 이제야 읽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다분히 담긴 이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너무 커버린 탓이겠지. 기존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깨라, 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막스 데미안의 외침은 오래 전부터 내면화되었던 주제였기에 '늦은 혼잣말'이 되었다. 그래도 박소은의 노랫말이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너는 나의 데미안"이라는 말은 "너는 또 다른 나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왜 그토록 정해진 틀과 자신을 가둔 세계를 깨고자 했을까? 때로는 그 보호되고 정제된 세상이 자신을 지켜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새'라는 상징성이 큰 까닭은 거기에 있다. 아기새는 어미새의 둥지 아래서 먹이를 먹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단순히 주변의 환경을 깨는 것에 그친다면, 성장과 반항은 무의미하다. 그 모든 몸짓들이 도약으로 이어졌을 때, 새가 느낀 고통은 커다란 희열로 변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원리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때로는 더 나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억압을 거스르는 태도, 제1차 세계대전이 주는 상실감 등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의 일부였다. 그러한 경험들이 많은 것을 대변해줄 수는 있어도 전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헤르만 헤세의 발칙한 사유들, 예를 들어 아브락사스나 카인의 표식 등에 대한 기나긴 설명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은 유럽처럼 카톨릭(내지는 개신교)이 일상생활에 배어 있지도 않기에 야곱의 씨름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들이 표제로 나올 때 의아함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1장부터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제해주는 '사이다'를 선사하는 데미안의 모습이 더 각인되었으리라. 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양면적이다. 구세주처럼 보이는 존재가 악마가 되고, 영원한 사랑처럼 여겨진 존재가 사실은 과장되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싱클레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변에서 알을 깨라고 다그쳐도,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까. 

그는 그저 한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내면에서 빛났으며, 그의 마음에 기쁨의 빛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사랑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까지 찾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 - P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뗏목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세계문학의 시작점이 된 주제 사라마구. 노벨문학상이라는 수식어든,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수식어든 그것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시작된 13년여간의 여정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지만, 방향성은 동일하다. 요즘 들어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그 탐구의 과정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들은 늘 소환된다. '도시' 시리즈로 시작하여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적인 주제인 '자발적 신성모독'의 정점에 오른 『예수복음』이나 『죽음의 중지』 등의 작품들은 나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된다. 포르투갈에서 파문을 당하고 추방자의 길에 올랐지만, 누구보다 조국에 대해 기억하고 회고하는 그의 면모는 제임스 조이스를 연상시킨다. 포르투갈,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는 그에게 애증의 관계인 셈이다. 『돌뗏목』은 주제 사라마구와 포르투갈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책이다. 


 이 서사시는 마치 물수제비처럼, 페드로 오르세가 던진 돌 하나가 반도를 움직이게 했다는 작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마술적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다. 시간과 물리 법칙을 초월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세계가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다. 언론은 페드로 오르세를 찾아 나서고 그와 얽힌 인물들, 주제 아나이수와 조아킴 사사 등이 충돌한다. 그의 오랜 독자로서, 이 작품만큼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순간들 하나하나가 무척 새로웠다. 


 나는 이야기의 흐름이 주는 흥미로움에 주목하고 싶다. 분리된 반도가 뗏목이 되어 대양을 유랑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보통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 예컨대, 한반도가 분리되어 태평양을 떠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소설가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발생하는 대혼란을 묘사할 것이고 어떤 이야기꾼은 대통합의 기회로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romance)'를 다루는 주제 사라마구는 당연히 혼란보다는 통합에 주목한다. 포르투갈은 빠른 속도로 떠다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구의 회전을 느끼지 못하듯 꽤나 일상을 잘 유지한다. 반도의 항해가 멈추었을 때, 그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은 거대한 상징이다.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우리는 새롭게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 평화로웠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배다른 자식이 나오는 불상사도 발생했지만, 이 모든 것이 허구임을 알고 있는 독자는 작가의 메시지에 주목하면 될뿐이다. 일부러 그가 등장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한 까닭도 다른 작품에서 확보한 보편성을 제거하고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결국 반도는 멈추고, 그 위치와 방향은 바뀌었다. 어떻게 되었든 이 사건은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을 넘어서서 각 나라들의 반응과 움직임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작가의 솜씨가 매우 탁월했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을 읽기 전, 반도가 움직인 사건의 파괴적인 영향이나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같은 감옥 생활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외부의 시선에서는 정치적으로만, 내부의 시선에서는 일상적으로만 분석하여 그러한 상징을 차단한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구호 따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일들의 집합임을 강조한다. 세계의 해석은 다를지 몰라도, 적어도 포르투갈인들은 그래 왔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 기적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과바이는 마침내 내일 라코루냐의 정신병원과 연락이 닿으면 어머니가 다른 환자들과 함께 이미 내륙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어떠신데요. 전과 마찬가지로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답변은 다른 누구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은 땅이 다시 사람들로 복잡해질 때까지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그곳에서 계속 머물며 기다릴 것이다. - P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과 끝은 맞닿아 있다. 조지 오웰의 초기작으로 알려진 『버마 시절』은 『1984』를 연상시킨다. 카우크타다는 버마인에게 있어서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주인공 플로리는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버마를 떠나지 못하고 자살한다.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는 역시 비극에서 온다. 불의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극에서 어떤 행복한 결말을 바라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특히 영국인들)은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오만하며, 플로리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체제에 순응하고 있다. 


 자전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된 『버마 시절』에서 독자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차별과 지배를 정당화하며, 명분을 내세워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조지 오웰은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옹호하거나 묵인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제도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며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남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조지 오웰은 두 가지 형태의 비판을 동시에 수행했다. 하나는 계몽을 앞세우며 식민지를 착취하는 영국 제국주의의 위선을 고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깨끗한 척 하지만 사실 남들처럼 추악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체제가 어떻게 각 인물을 무너뜨리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으로 최근에 읽었던 『엽란을 날려라』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작품에서 거듭해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발견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인식이다. 『엽란을 날려라』에서는 돈과 사랑의 관계, 특히 가난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짚어내었다. 한편, 『버마 시절』에서 나타나는 베랄과 엘리자베스의 사랑, 플로리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사뭇 다르다. 모두가 가난과 거리가 멀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계산적인 사랑을 한다. 엘리자베스가 버마에 온 까닭도 남편감을 찾는 것이었고 플로리는 순수한 사랑을 내세우지만, 과거에 두었던 정부에 의해 파멸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이다. 소설에 나타난 관계 맺기는 언뜻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결여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 엘리자베스가 플로리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장면에서 그의 모반을 보고 경멸하는 부분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얕았는지 새삼 느끼게 한다.


 결국 이 버마 땅에서 선량한 인물은 없었다. 영국인들은 본질적으로 침략자들이고, 원주민 관리들 역시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이익만 불리기에 급급했다. 때로 그들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인을 모함하고 해치는 것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가 잔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변명하는 대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한 세대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시대의 흐름을 비판없이 따라갈 수는 없다. 플로리의 맹목적인 믿음과 최후를 통해, 독자는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