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처 마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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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만에 읽으면서 실시간으로 충격을 받은 책을 만났다.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파리대왕』을 집필한 윌리엄 골딩의 또 다른 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페이지에 나타난 글자를 쫓아가며 읽기에 바빴다. 서술자는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가며, 그가 점차 신체를 되찾아가고 바위 섬에 표류한 이후 구조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틴이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바람들이 왜곡되게 실현되며, 마틴은 자신이 만든 환상을 보고 미쳐간다. 그때 검은 번개가 나타나 그가 만든 가짜 세상을 파괴하고, 마침내 마틴 자신마저 파괴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야 해군이었던 핀처 마틴은 방수 장화를 벗을 틈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독자인 내가 느낀 충격은 마틴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두 핀처 마틴이 만든 환상이었단 말인가?


 이 소설의 세계에 초대되려면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작중 초반부는 현재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아주 모호하게 쓰여져 있다. 인간이 아닌 주어들이 계속 나타난다. 읽으면서도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아가 자신의 상태와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면서 독자 역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나중에 그것들이 모두 죽음을 인정하지 않던 핀처 마틴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쉽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자는 적어도 자신이 인지한 것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은 누가 뭐래도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 아닌가?


 핀처 마틴은 뛰어난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의 자아를 지배하는 것은 구조되기 위한 간절한 노력보다는 바위섬의 구성물에 이름을 짓고, 각자에게 역할을 배분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소극장에서 기필코 주연을 맡는다. 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군에 입대해야 했던 현실 때문인가,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도 갈팡질팡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정의하는 일뿐이었다.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 마틴. 크리스.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 (p.103)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행위는 곧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욕망을 마음껏 발휘하는 마틴의 모습을 정당화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사망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떼를 쓰는 그의 영혼의 자작극이다. 독자는 마지막 장에 나타난 타인의 증언을 통해 차가운 진실을 마주한다. 그가 만든 세상은 검은 번개에 의해 파괴되었다. 검은 번개가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마틴의 죽음은 확정적이고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마틴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착각이다.


 우리는 모든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개인의 환상 속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계속 흐르는 시간선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스스로 만든 바위 섬과 망망대해 위에 갇힌 마틴과는 분명 다르다. 꼭 그럴까? 우리 마음 속에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이 없는가? 나에게도 많은 후회와 아쉬움과 원망과 미련이 있다. 나는 가끔 그것을 해소하는 상상을 한다. 가상의 세계 속의 나는 아주 잘 나가기도 했다가, 성인만큼 선량하기도 했다가, 추악한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금 씁쓸해 한다. 환상은 그토록 무섭다. 그것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죽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상상력이 부족한 핀처 마틴에게는 이루지 못한 과거,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섬, 구조되지 못할 미래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큰 세상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만든 세상 속에서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성취를 거두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현실이라는 검은 번개가 모든 환상을 박살 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라고 외치며 자신을 위해 살아가자는 결심을 되새기는 일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진리를 명분으로 삼아 스스로 만든 세계에 갇힐 필요도, 타인을 마음대로 하려는 욕망을 간직할 필요도 없다. 마틴의 영원 같은 시간 속에서 나다니엘은 얼마나 많이 죽고, 메리는 얼마나 고통 받았을까? 아무리 그 세계가 가짜라고 해도,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이제 타인을 마음대로 다루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왜곡된 탐욕은 인간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수병들의 시신을 거두는 캠벨과 데이비드슨은 마틴이 고통을 받았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영혼들이 있다. 대서양 한복판이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도처에 말이다. 인간의 필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처럼 지금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들을 안타까워 하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이 만든 세상은 안녕한지, 그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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