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무나리의 동물원 비룡소의 그림동화 206
브루노 무나리 글.그림, 이상희 옮김 / 비룡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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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뚫렸다. 들어가자.

 

브루노 무나리의 동물원.

2017.3.3. 정기화

 

표지그림부터 보아야 이야기전개가 쉬워진다.

철조망이 있고 한 구석이 얽키설키해서 구멍이 생겼다. 보아하니 구멍이 여러군데가 있다. 좀 오래전에 세워진 동물원인가보다. 그 구멍으로 초록색파란색이 들어간 나비 두 마리가 날아들어간다.

화살표 방향으로 동물원을 가르키면서 주의사항이 표지판도 있다.

그렇게 화살표를 따라가면 어떤 동물들이 어느방향에 있는지 여러 가지 크기의 표지판들이 서 있다. 여느 표지판과는 느낌 살짝 다르다.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앵무새는 무지개가 뜬 날에 태어났어요.>

앵무새가 그래서 무지개색일까? 앵무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와 앵무새의 색감이 다르다. 질감이 몽땅 묻어나는 나뭇가지는 사진을 붙여놓은 듯 하다. 하얀눈동자의 앵무새가 돌아보는데 몸체도 크고 노골적으로 바라본다는 기분이 든다. ..?

근데 이 나비들이 앵무새가 무지개가 뜬 날 태어났다는 걸 어찌 알지? 이번이 처음 놀러온게 아니었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앵무새 몸 색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나?

 

<비가 오면 새들은 코끼리 배 밑에서 비를 피해요.>

코끼리는 앞선 나뭇가지의 질감으로 그려져 있다. 그려져있다라기보다 사진으로 찍어 그것을 콜라쥬? 하듯이 붙인?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질감이 느껴진다. 코끼리가..정말 비를 맞고 있는 듯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게 코끼리밑에서 비를 피하는 새? 암만 병아리같기도 한데..새들은 펜으로 마무리선을 따고 그 안에 노란색으로 칠했다.

두 마리의 초록파랑나비들과 같은 기법으로 그렸다.

 

<플랑밍고들은 자기들이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걸 잘 알아요. 놀 때도 대칭을 이루고 놀지요>

양면이 플랑밍고 놀 듯이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는 펜선을 마무리하지 않고 한붓으로 그리듯이 가장자리선이 드러나지 않게 그려져있다. 플라밍고의 색이 붉은빛도 아니고 다홍빛?이 많이 섞여있는 갈망하는감정을 일으킨다고 해야하나? 곱다라고 말하기에는 생기가 넘치는 색이다. 내 맘에 이쁘게 들어온다. 근사하군.

 

< 얼룩말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었어요.>

얼룩말이 두 마리다. 절반씩의 몸체가 앞모습과 꼬리가 있는 뒷모습이 나뉘어 두 마리다. 왜일까? 나비가 한 마리씩 얼룩말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왜 얼룩말은 절반으로 나뉘어 두 마리지? 얼룩말의 특징이 뭐지? 그러고 곰곰 생각해보면 얼룩말을 볼 때 몇 마리인지 셈해보면서 놀았던거 같다. 왜일까? 다른 우리에서는 세어보지 않는다. 아마도 얼룩말을 줄무늬가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몇 마리인지 헷갈리게 하는 . 그래서 몇 마리인지 자꾸 세어보고 싶은 놀이같다.

 

<사자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지요>

진짜..그렇게 생각했다. 사자는 가만히 털푸덕하니 앉아 있다.

움직여봐 움직여봐 하며 짓궂게 놀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가만히 앉아 우리를 마주보고 있을때가 많다. 그렇게 우리를 쳐다보면..

재네들은 좋겠다. 동물들의 왕이잖아. 무서운게 없을거야. 젤 세니까

그런 이미지의 사자가 턱 하니 앉아 우리는 저리 매력적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씩 웃으며....이책 좋은데.

저 많은 갈기털..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은 빗질을 해보고 싶은데 가까이 근접할수 없는 동물들의 왕 사자. 멋지다.

 

<다람쥐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모아요>

다람쥐하면 이내 생각하는 도토리라는 먹잇감을 모으는 습성을 떠올린다. 다른 동물들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도토리를 여기저기 숨기고 일년내내 그렇게 식량으로 도토리를 모으는 이미지. 어디다 숨겼는지도 모를만큼 .

 

<코뿔소는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파이터다. 커다란 체격하며 상대가 무엇이 되었든 뿔로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고 그런 모습을 티비에서 많이 보았다. 나무도 들이받고..할만큼 눈은 나쁜거 같고 표정이 험상궂어 보여서 파이터라고 하는 이미지.

그에 비해 실제 코뿔소가 그려져있는데 눈빛이 영..파이터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코뿔소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동물로 보인다.

 

<뱀은 자기 몸을 묶었다 풀었다 해요.>

좋아 좋아. 그래그래 뱀의 몸뚱이의 길고 가늠으로 해서 저렇게 해보고 싶었다. 묶었다가 풀어보고 싶은 충동 ..그 매끄럽고 탐스럽기까지 하는 풍만함도 느껴지는 뱀의 몸에서 풍겨나는 육감적인 느낌이 고대로 묻어나는 커다란 뱀이 있다. 가늘가늘한 애들한테서는 느껴지지 않는. ..이 매력뽀인트를 어찌 잘 잡았을까.

 

<여우는 모피 장사꾼을 보면 얼른 숨어요>

모피목도리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 기억에 동물원에 여우는 참 작고 볼품없었다. 여우누이를 읽고 자랐던 어린시절이 있기에 여우는 영악하고 꾀가 많은 무시무시한 동물인데 그 체격이 작은데서 오는 실망감이라니..서운했다. ‘여우누이라는 이미지가 없는 서양인이 갖는 여우는 모피목도리인가보다.

 

< 새들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요.>

진짜 그렇다. 새들은 몸통이나 그런 것들로 비숫한 애들은 동물원에 가면 커다란 높은 우리에 한꺼번에 몽땅 두었다. 그래서 도대체 몇 마리가 있는지..몇 종이나 있는지 알수 없다. 또 어찌나 뭔가들의 소리로 가득차 있는지..셀수 없다. 그리고 끼리끼리 잘도 앉아 있다. 보면 자기들끼리 뭔가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한. 그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나무의 탈을 쓴 가짜 나무 이미지가 역력한 나무의 양 사이드 가지에 올라앉아 나란히 나란히 앉아 있는거..날아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보기 드물다.

 

< 어떤 낙타는 혹이 두 개예요. , 우리가 올라탈 자리가 있네요.>

낙타를 볼 때 혹이 몇 개인지부터 센다. 쌍봉낙타인지 단봉낙타인지..그리고 거기에 올라타서 정말 어디론가 움직일수 있을것인지..머나먼 사막의 모래길을 저것을 올라타고 갈수 있을지가 궁금해지는..혼자 우뚝 서 있는 낙타의 모습이다. 눈길을 저기 멀리 사막의 열기를 그리워하나 싶은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눈빛의 낙타가 서 있다.

그리고 발밑은 흙들이 보실보실 일어나있어서 낙타가 가만히만 서 있지는 앉는다고 느껴진다. 어디론가 가야할 채비가 끝났다는 말인가 싶다.

<물개는 묘기 부리는 걸 좋아해요>

묘기부리는 동물 = 물개. 좋아하지 않은 공식이지만 익숙한 공식이기도 하다. 색이 예쁜 공을 가지고 놀이하는 듯한 물개. 실제 그들의 성질에 한 부분일수도 있다. 뭔가를 가지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올려보는 습성이 있을수도 있다. 아무튼 수면에 올라온 듯한 머리만 보이는 물개의 놀이로도 보이고 수면밖에서도 놀이하는 모습을 표현한 듯 물그림자.

나비도 물개와 같이 묘기를 부리고 있다. 가만히 모자를 쓰고 나를 바라보는 물개의 모습이다.

 

<원숭이들은 손을 발처럼, 발을 손처럼 사용해요>

기다란 몸으로 꼬리며 손과 발을 자유로이 움직이며 유연하게 빠르게.

그 기억안에 원숭이들. 가늘가늘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휘리릭 움직이기도 하는 원숭이들이 보인다. 손을 발처럼, 발을 손처럼

 

<호랑이는 커다란 줄무늬 고양이예요>

...대박이다. 호랑이가 고양이. 고양이움직이는게 호랑이를 같은 과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호랑이도 큰 줄무늬 고양이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애네들은 고양이와 내가 관계맺음과 비슷하게 느긋하게 살고 싶은 욕구..?

천천히 몸을 살짝 낮춰 걷고 있는 고양이와 같은 호랑이.

굵은 테두리 선으로 호랑이를 그려놓음으로서 무섭다기 보다 뭔가 애매한 크기의 호랑이다. 고양이보다는 크고 위협적이고 호랑이보다는 작고 부드럽다. 그러니 나비들이 호랑이 꼬리쯤에 놀고 있다.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나비놀잇감처럼..

 

<표범은 커다란 얼룩 고양이고요.>

저 붉은 눈동자..콧등의 분홍색과 쭈삣하니 서 있는 수염에서 점점이.땡땡무늬옷을 입은 표범. ..검정 표범을 좋아하는데..까만 몸을 배고 누워보고 싶다는. 그런면에서 땡땡무늬 표범도 얼룩고양이와 같이 다가온다.

테두리선을 그리고 눈동자는 대신 매력이 있으나 약간 묘한 분위기의 색으로 그려넣었다.

 

<하마는 늘 수영장이 비좁다고 투덜거려요>

콧등만 불뚝이 나와서 그 커다란 몸체는 저기 물 아래 어디엔가 있을거야.하면서 막상 그 몸이 물 밖으로 나오면 참 어이없이 크면서도 둥둥하면서 짧은 녀석들. 무진 숏다리로 보이는 녀석들. 그에 비해 콧구멍은 어찌나 큰지..물빛도 난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뭔가로 잔뜻 밀도나 물기가 다른 물에 비해 섞여있는 분비물이 많아 보이는 늡늡해보이는 물이다. 물빛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 하마만이 들어가 편안해 보이는 물이다.

저 멀리 보이는 네모난 것들은 하마 이빨~~^^

 

< 공작은 뽐내며 거닐어요. 공작은 원래 그런 거예요.>

.. .. .. .

깔끔하다. 공작은 난 우아하고 아름다우니 나에게 복종하라. 내 아름다움은 모두에게 알려 숭배하라. ’ 라고 하는 포스를 수시로 보여준다.

수시로 자신의 날개를 펼쳐들고 우~~하게 걸어 나온다.

난 원래 이래..라는 원조들이 여기있다.

 

< 캥거루는 자기 뒷다리가 너무 길다는 걸 몰라요.>

그렇군. 캥거루는 뒷다리가 길구나. 그래 무진장하니 길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꼬리또한 무진장하니 길다. 캥거루는 .. 뱃속의 아기주머니만 기억에 있나? 그러면서 꼬리힘이 장난이 아니라는 지식이 들어있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저 꼬리로 휙~~ 칠수도 있겠다는.

잘못하다가는 저 꼬리로 한 대 볼수~!도 있을거 같다는.

 

<북극곰은 영리해요. 만약 곰들이 야구 경기를 한다면 북극곰이 심판을 볼거예요>

그런가? 북극곰이 영리한가. 접해본 기억이나 본 매체들이 없어서리.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으나 이렇게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북극곰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노란..금빛으로 서 있는 곰이 생소하면서 실제 이런 색일수도 있나 의심스럽기도 한..

그런데 앞서 모습들의 그네들이 갖고 있는 특징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표현해놓고 있으니 노란빛의 곰이 실재하다고 짐작되어지는데..

 

<호저는 풀숲에 들어가면 찾기 힘들어요>

찾기 힘드니 호저가 풀숲에 들어가면 조심해야 해요. 풀숲이라도 아무곳에나 걸어다니고 앉았다가 호저를 만나면 아찔해요. 그러니 호저하고 풀숲에서는 숨밖꼭질같은거 하면 안되요. 크크크..

 

<거북은 산만큼 나이가 많아요>

산만큼 나이가 많은 거 거북. 그러며는 거북이 산처럼 나이가 많고 많고 많아지면 산이 될수도 있을까라는 헛생각 잠시 지나간다.

그렇게 거북은 오래 살고 천천히 살아가는 거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먹으면서 ..우리가 다가가도 자신의 할 일을 멈추는지 잘 모를만큼 꾸준하게 산다. 세상의 우리 사는 속도와는 다른 시간대로 거북이는 산다.

저 앞산이 내가 보이는 산이 거북이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 거북산 시간의 속도가 나와는 참 달라서 서로가 모른다.

 

나가는 곳. 이라는 팻말에 나비의 친척? 들로 보이는 애벌레며 베짱이며 다른 나비들이 여러마리 모여있다. 동물원에 놀러온 나비두마리를 배웅한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이겠고..그냥 거기에 있는거다. 개네들이 무리지어 살만한 공간이 저기 인가보다.

 

 

앵무새를 보면서 깜짝 놀라게 다가오는 점은 그들은 정말 화려한 색.

정말 실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물들였거나 색을 입혔다고 할만큼 화려한 앵무새들이 많다.

코끼리..그 거대함에 놀란다. ..정말 거대하다. 그 배밑에서 뭔가 다른 무엇들이 비를 피해도 좋을 만큼 거대하다.

홍학. 늘씬 늘씬 쫘악 쫘악 뻗어갈만큼 길게 뻗어있는데 가만히 서 있다.

우아하게. 그들이 가진 색감도 비현실적이고 몸체도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존재들이 우아하게 가만히 서 있어서..조용 보고 있으면 현실이기보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얼룩말의 줄무늬가 뭔가 착가에 빠지게 하는 놀이를 할수 있다. 그들은 잘 움직이고 뛰는 모습들을 관찰된다. 그런 움직임이 가만히 있는 홍학과 다른 비현실성이 있다.

다시 보게되었다. 부르노 무나리. 동물원. 그 동물들의 이미지를 잡아서 정말 군더더기 없는 한두문장으로 표현했다. 동물들 또한 다른 질감이나 테두리선으로 우리가 느끼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식의 동물들 한 마리 한마리 그림책의 재미가 이런거였구나.

그림책의 재미중에 한꺼풀의 안개가 걷힌 듯한 재미를 알았다.

단순하게 별다른 배경이나 설명없이 동물원을 나타내고 있다.

좋다. 완전 행복하다. 즐겁다

 

 

맘대로 동물을 보다, 놀다

 

브루노 무나리. 2017.4.4. 정기화

 

동물원에 들어가 표지판 앞에 서서 어디서부터 돌아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동물부터? 아니면 동선을 가장 짧게 잡아 전체 동물을 휘리릭 둘러보는거? 아니면 지금 가장 활동적으로 움직일만한 동물부터? 것도 아니면 사람들이 가장 붐비지 않는 동물부터?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동물원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다.

제목으로 미루어 하게 동물들이 한 마리씩 있고 이름이 있고 글이 있다.

뻔할까? 앵무새는 알록달록하다. 코끼리는 커다란 담처럼 비를 맞아도 무감각한 듯 거대하게 그려져 있다. 매력적인 눈빛을 갖고 있는 사자는 우리를 마주보며 그냥 앉아 있다.

얼룩말은 반쪽으로 나눠 그렸다 왜지?

호랑이와 표범은 장난치듯이 그렸다. 이상하다.

한명의 작가가 그렸는데 그리는 방법이 다르다. 마무리선 없이 그린 앵무새나 사자, 사진을 갖다 붙인 듯한 코끼리, 두꺼운 마무리선으로 그려넣은 호랑이와 표범. 물감의 결이 다른 듯한 뱀과 북극곰.

그러면 짤막하게 붙여 놓은 글은 어떤가?

<앵무새는 무지개가 뜬 날에 태어났어요.> 앵무새? 색이 화려해

<사자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지요.> 사자는? 동물의 왕이지

<다람쥐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모아요.> 다람쥐는? 도토리.

동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동물의 먹이나 크기, 사는 지역, 등등 어떤 일관성으로 분류한 글이 아니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로 그리고 썼다.

얼룩말의 우리에 갔을 때 습관적으로 몇 마리가 있는지 세어보곤 했다. 줄무늬가 있어서 재미도 있지만 그 줄무늬로 인해서 몇 마리가 있는지 헷갈려서 처음부터 제대로 세어지지가 않는다. 한 마리를 반으로 나눠 그림으로서 헷갈림을 표현한 게 아닐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뱀은 자기 몸을 묶었다 풀었다 해요.>

항상 궁금했다. 뱀을 한번 묶어 보면 어떻게 될까? 가느다란 실뱀은 그냥 풀어질 거 같다. 하지만 두꺼운 뱀은? 과연 묶어질까? 묶으면 숨이 막혀할까? 뼈가 없으니 유연해서 묶어도 부러지지 않을거야.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정말 뱀이 묶어지는지 모른다.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이미지를 기준으로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동물원 그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단순함 안에 작가의 기준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내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감정적인 섬세함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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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상자 베틀북 그림책 86
데이비드 위스너 지음 / 베틀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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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우체통이 사라지는 시간대에 산다

 

시간상자. 데이비드 위즈너.

2017.3.3. 정기화

 

모래사장같은 이면지를 지나고 지나서

해변가에 삽을 들고 있는 어떤 소년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새가 세 마리. 멀리 배경으로 사람들이 있다. 한적하지만 여유가 묻어나는 외롭지 않은 바닷가 풍경이다.

시간상자의 제목. 어디선가 본 듯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다. 쓸모를 알지 못하지만멋져보이거나, 손때가 묻었거나, 세월이 지나간 흔적들이 있거는 자잘한 물건들.

그 사이로 멀리 동그란 동전이 있다. 저거 우리나라 대전통보 그런 엽전들인가?

다들 사연들을 담고 돌고 돌아 여기에 모아놓은 물건들. 그렇다면 작가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느 구석에 있는 물건들을 그려놓은건가?

 

..이건 뭐야? 하고 보니 뭔 생명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뒤에 있다.

서로 이 생명체를 보고 있는 모양새다. 그림책에 눈동자와 내가.

그럼 이 생명체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거야? 발이 몇 개야?

그렇게 잠시 놀란 장면을 지나가면 어떤 소년이 돋보기를 들고 아까 그 벌레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모래에서 놀기에 적당한 삽들과 양동이들이 있다. 친숙한 자세로 엎드려 있어서인지 눈높이가 나와 같아 편안하다

 

해변가에 파도가 밀려오는 장면을 배경으로 여러컷의 긴 그림들이 폭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멀지만 걸어오는 모습, 조금 두껍게 엎드려 땅파는 역동적인 컷..그리고 길지만 아주 가깝게 들여다보는 옆얼굴. 그리고 파도에 덮쳐지는 두컷의 그림. 해변가에 가깝게 다가가는 듯하다.

으으....미역줄거리같은 것들이라니..실타.

그 사이로 낯선 물건하나. 수중카메라?? 신기한데.

아이는 필름을 현상한다.

여러컷으로 아이의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서두르면서 뛰어가고..현상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리고 들여다본다.

들여다보는 장면은 전체에 프레임없이 깔려있다. 이 모든 것이 사진을 보기위한 작은 과정이라는 듯이..이런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프레임이 없이 배경을 깔고 그 안에 작은 컷으로 프레임으로 그려넣은 그림들.

..로봇물고기다. 짙은 파란색의 바다로 보이는 곳에 붉은 빛의 물고기들이 떼지어 가고 있다. 그 가운데 로봇물고기가 나란히 물고기처럼 나아가고 있다.

도대체 저건 뭐지?

그리고 다른 사진. 바다의 대왕오징어들이 새끼오징어를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어주고 있다. 저 밝은 빛의 물고기는 아귀? 크크크..

검정 프레임을 두른 그림들은 모두 현상된 사진인가보다.

세 번째 검정프레임안에는 가시복 기구를 탄 물고기들? 납치되는 건가? 왠지 기구를 탄 물고기들 표정이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나? 놀란 기운이다.

장면을 넘어갈수록 점점 더 상상이 넘어서는 사진들이 나온다.

카메라가 떨어지는 외계인들의 수중도시 사진을 지나가면서 다른 장면에도 사진기가 있는지 찾아보지만 별로 없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들고 있는 어느 동양인소녀. 그리고 소년 소녀들..

다들 사진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배율을 높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시대를 거슬러 흑백의 사진들이 남겨져있다

아이는 자신도 사진을 들고 찍고는 다시 그 카메라를 바다로 던진다.

현상했던 사진들은 바다로 흘러가고..아이는 그 카메라가 던져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 카메라는 바다 멀리멀리 다양한 생명체들을 지나 건네지고 건네져서

어느 바닷가에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모래사장의 면지가 남겨져있다.

 

시간상자. 원제는 뭘까?

찾아보니 해변에 밀려온 표류물. ..제목을 시간상자로 하니 더 포장이 되어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단순히 영어의 원뜻도 저 의미만 있는 단어일지 의문이 든다.

카메라의 기능을 생각해보았다.

기록하고 추억할 수 있는 지금 현재를 고스란히 종이에 옮기는 물건.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여기가 아닌 먼 나라의 사람이나 생활도 알 수 있는.

연결지을 수도 있고 전달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시간을 저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

하지만 아이가 현상한 다른 사진들을 바다로 흘러가도록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진들도 신기할텐데..간직하고 싶지 않았을까?

다른 아이들과 같은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거 같다.

시간은 소유할 수 없이 흘러가는 거라는 의미일까?

그렇지만 사진을 찍음으로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의미를 남겨놓기?

난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즐겼는지 곰곰 자면서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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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화요일 비룡소의 그림동화 84
데이비드 위스너 글.그림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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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화요일

데이비드 위즈너. 비룡소.

2017.3.2. 정기화

 

아주 오래전에 읽었고 데이비드 위즈너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했다.

뼈대는 간단하다.

연잎에서 자고 있던 개구리들이 연잎을 타고 날아가는 하룻밤이야기다.

잠잠하던 동네를 습격하는 개구리들의 비행.

글이 거의 없이 전개하는 방법이 어울려 보인다.

 

처음 시작 세로로 긴 세 컷의 그림이 있다.

곤히 자고 있는 개구리 -> 가운데 개구리 눈이 붕 떠지면서 연잎과 함께 몸이 붕 떴다.-> 다른 개구리들이 놀라는 가운데 같이 부웅 뜨려고 한다.

이 세컷의 그림이 앞으로 전개될 그림책에 대한 기대감을 확실히 높여준다.

그림또한 개구리의 축축하고 안개가 낀 숲속 연못같은 눅눅함도 잘 표현되어 있다.

갈대와 부들의 흐릿한 그림자 배경이 그럴싸하다.

 

화요일 저녁, 8시쯤.

이번엔 가로로 긴 세컷의 그림이다.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다가 달이 떠오르는데 연못의 죽은 나무껍질에 올라앉은 자라가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는 자라의 두리번 거리는 시선의 방향과 눈빛에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에그머니나. 의 시늉이 보이는 등껍질로 화들짝 말려 들어갈 틈도 없이 버둥거리는 듯한 자라의 팔다리가 ..기세등등하게 연잎을 타고 날아가는 개구리들 밑으로 깔려있다. 위풍당당하다고 해야하나. 까맣게 반들거리고 축축한 눈빛의 개구리들이다. 어디를 가는지.

그렇고 넘어가면 개구리들이 곡예비행을 하며 신이 났다. 전신주에 앉아 수많은 새떼들이 놀라 달아나게 할만큼 하늘을 개구리들이 뒤덮었다.

이 장면을 실제로 본다면....목아지가 쪼여드는거 같다.

 

그럼 날아가서 어디 마을을 둘러나볼까? 개구리반장? 통장처럼 느껴지는 통장개구리를 위시하여 마을에 하늘로 날아간다.

이때 시작 밤 1121. 연못에서 여기까지 3시간 반즘 걸렸다. 꽤 거리가 있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어떤 사람(-작가라 추정했다.) 유리창너머로 개구리가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예절바른 개구리다.

빨랫줄에 걸려 연잎에서 떨어진 개구리도 있고 빨래를 뒤집어쓰고 날아가는 개구리도 있다. 유령놀이라도 하려나?

웬걸 빨래감이 어느새 망토로 변신해서 바람을 펄럭이며 날아온다. 멋진데..

열린 문으로 굴뚝으로 들어와 밤늦게 티비를 보기도 하고..그렇게 개구리들의 공간에서 틈사이로 상황을 살피는 고양이가 눈에 띤다

영리한 고양이.

 

새벽 438.

...이제야 눈에 보이는 새벽시간이다. 12시까지 너무 짧은 비행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룻밤을 온전히 날았구나. 시간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건?

개가 개구리를 몰고 뛰어가는 장면이 리얼해서였나?

역전되어서 개구리에게 쫒겨 혀를 내밀고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개의 모양새가 웃겨서인가?

생각보다 개구리들의 표정이 경직된 듯 느껴진다. 가끔 활짝 웃는 개구리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표정들이 다양하지 않다. 개의 몇 개의 컷으로도 잘 그려지는데 비해..개구리의 표정을 실제 우리가 관찰하기 어려워서 인것도 같다.

개구리가 속한 파충류부류가 세세히 표정을 표현하기 어려움도 있을 듯 하고..

 

동이 트는 듯한 빛이 살풋이 들어오자 갑자기 연잎들이 출렁이며 개구리들을 떨어뜨린다. 펄쩍 펄쩍 뛰어 자신들이 살던 연못으로 돌아와..불만에 가득찬 개구리라니 표정들이 볼만하다.

그나저나 마을은 의문투성이다. 수많은 연잎들. 샌드위치먹던 남자의 증언등으로..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8시즘.

그림자에 설마..돼지꼬리? 뭐를 타고?

..돼지들은 아무것도 타지 않았다. 아니 자기들 꼬리를 타고 있는건가?

날아오름에도 잠자는 돼지도 있다. 분홍빛의 토실토실한 돼지들..

 

시간만 한줄씩 쓰여져있고 글이 생략된 그림책.

굳이 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그렇다 해도 글이 들어간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할까?

그림을 보충할 필요의 글? 아니면 어떤 해석의 글? 그냥 이대로가 좋은 그림책?

의문의 하룻밤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을 읽는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책이다. 각자의 해석을 들으면서 뜯어먹는 재미가 있는.

그러기에 충분한.

 

그런데 작가는 왜 이런 상상을 했을까? 어디에서 시작한걸까?

연잎이 넙대대하고 질겨서 비행접시하기에 좋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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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핀 꽃 국민서관 그림동화 174
존아노 로슨 지음, 시드니 스미스 그림 / 국민서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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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어 가는 색으로

 

<거리에 핀 꽃> 존 아노 로슨 기획.시드니 스미스 그림.국민서관

2017.3.1.정기화

 

1.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에 대해

- 빨간 후드티를 입은 아이가 길을 가고 있다.

하늘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 길가에 노란 꽃을 보고 꺾는다.

- 노란꽃의 향기를 맡아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담벼락 높은 곳에 빨간 꽃도 꺾었다.

- 사람들이 모인 정류장에도 꽃이 피었다.

- 가게를 지나서 길가 커다란 동물상 아래에 핀 꽃을 꺾었다.

- 길바닥 돌 틈에 핀 보라색 꽃을 보았다.

-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공원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조깅하는 사람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 공원길에 새가 한 마리 죽어 있다.

꽃 한송이를 새에게 올려주었다.

- 긴 벤취에 아저씨가 누워 있어서 발에 꽃을 한송이 내려놓았다.

- 지나가는 개에게도 꽃을 한송이 꽂아주었다.

- 그녀에게도 꽃을 한 송이 머리칼에 꽂아주었다.

- 유모차에 탄 아이에게도 달팽이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도 꽃을 한송이씩 주었다.

- 마지막 남은 꽃 한송이를 귓가에 꽂았다.

 

2. 그림을 보며 아이 입장으로

- 200734일 오후 320. 아빠가 데리러 왔다.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은 구경할게 많다.

문신한 아저씨도 있고 새도 있고 꽃도 있다.

노랗게 보이는 꽃이 예뻐서 한송이 꺾었다.

- 꽃 향기를 맡아보니 향이 좋았다.

육교를 가다보니 담벼락위에 빨간색 꽃도 피었다.

꽃을 꺾는 동안 아빠가 기다려주었다.

-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에 꽃이 피었다.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언덕위에도 꽃이 있었다.

- 유리병들이 많은 곳을 지나갔다.

꽃을 유리병에 꽂아도 좋겠다.

조금 더 꽃을 모을까

- 새들이 있는 길가에 보라색 꽃도 있다.

꽃이 한주먹 가득이다.

빨리 집에 가야지

-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공원을 지나가면 곧 집이다.

여기에도 꽃이 있으면 좋겠다.

- 그런데 길가에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죽은 건가?

곰곰 보다가 땅에 누워있는 새에게 꽃을 한송이 주었다.

아빠가 멀리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다.

- 공원 벤치에 어떤 아저씨가 모자를 쓰고 누워있다.

아저씨 신발에도 꽃을 꽂아주었다.

일어나서 꽃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겠지

- 샤피로다. 산책나왔나보다.

샤피로목걸이에도 꽃 한송이 꽂아주었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다.

- 엄마다. 엄마가 집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엄마를 꼭 안아줬다.

엄마한테도 꽃 한송이 주고

- 잘 놀고 있는 동생들도 꽃 한송이 주었다.

- 높이 새들이 날고 있다.

남은 한 송이 꽃을 내 귀에 꽂았다.

기분이 괜찮다

 

 

글이 없는 그림책.

그림과 글이 서로 보완하면서 읽고 즐기는 그림책이 아니라 글이 없다.

그림이 글의 내용을 자세히 보여주거나 글이 그림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하거나 또는 글과 그림이 반대의 해석을 하므로서 재미를 주거나 여러 가지로 글과 그림이 만나면서 표현하는 책이 그림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글이 없다. 글이 없다는 것이 왜일까?

그림만으로 충분히 전달하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어서?

아니면 글이 어떻게 보면 제한적인 표현을 할 수도 있어서 다시 말해 방해할까 싶어서?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전체적으로  신선하지 않았다. 꽃이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따뜻함, 뭔가 피어오르는 기대와 희망같은 것을 아이라는 매개(-전달하는 인물유형도 신선하지 않다.)를 통해서 죽어있는 새에게 벤치에 누워 잠자는 사람에게 꽃을 한송이씩 전달하면서 색이 없는 그림책에 색을 점점 입혀가고 있다. 죽어 있는 새를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 소외된 듯한 인물에게 보내는 작은 관심? 등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라는 의미가 주제같다. 하지만 초반에 찬찬하게 완급을 조절했다면 뒤로 갈수록 서두르고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든다.

죽은 새, 잠자는 사람, 그리고 동네 개..다음엔 엄마와 동생들이다.

엄마와 동생들은 개인적인 관계에 들어간다. 소외된 어떤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이나 애정이 표현하는 것이 이 책이 전달하려는 의미에 맞는지? 주인공이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라는 인물안에서 보여주는 범위를 이 정도로만 잡은 걸까? 너무 많은 범위로 넓히기 어려워서 인가?

섬세하게 색을 입혀가면서 전개하다가 아이가 새에게 꽃을 주면서 물들어가는 색의 변화가 급하다라는 생각... 생명이 물들 때 어느날 한꺼번에 피어나는 환희와 같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어서인가? 그렇게 해석을 한다해도 아슴찬하다

글을 쓰면서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빠라는 인물이다.

아이와 눈을 맞주치거나 뭔가 소통한다는 부분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아이가 꽃을 꺾거나 꽂아줄 때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재촉하거나 잡아 끌지 않는다.

아이를 방치하거나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기보다 뭔가 아이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자신의 사소한 일(예를 들어 전화통화)을 처리하면서 돌아오는 것 같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는 배려.

여기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라는 부분에서 잠시. .그래서 글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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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파랑새 그림책 93
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 그림, 강도은 옮김 / 파랑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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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하는 맛

 

여우

마거릿 와일드 브라운

 

붉은여우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올려다보는 동자의 서슬이 강렬하다. 귀는 둥그스름하지만 하늘을 향해 서 있고

앞다리 가늘지만 꿋꿋하게 버티는 기분이다. 그렇게 나를 노려다보는 가운데 까만 까치 한 마리 여우를 향해 시선 집중해서 애절한? 사랑하는? 눈빛으로 보인다. 까치가 여우를 사랑하나?

이상스럽지만.

여우라는 글자 또한 까만 배경을 중심으로 쓰여져 있다.

뭔가로 긁은 듯한 선들이 많은 황토색 배경에 이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이면이...붉다. 여우가 가진 색보다 더 붉은 황토색으로 보인다. 에너지가 넘친다.

파레트에 물감도 잔뜩 물기도 잔뜩 섞여서 붓이 아닌 도구로 색을 덜어내어 그리면서 그리고 싶은 형태들의 가장자리를 만들었을까? 이 색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면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비벼보고 싶다. 만져보고 손가락사이로 색들이 삐져나오는 기분을 상상하고 싶다. 생명을 잔뜩 품고 있을 거 같다고 해야하나. 이 붉은 빛이, 색이 나를 쿵쿵 뛰게 한다.

 

개가 까치를 물고 뛴다. 잡아 먹으려나? 까치는 놀라는 눈치다. 가장자리에 아까와 같은 붉은 빛으로 마무리 되었다. 가운데는 흰빛들이 설치듯이 지나가고 있는 밍밍하지만 밝아지는 황토빛이다. 유화의 느낌이 난다. 두껍게 바른 유화들을 죽죽 그려대고 있는 작가가 그려진다.

이 붓터치가 설레나?

 

. 둥그스름한 바위들이 크고 작게 자리잡고 그 사이에 나무기둥? 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이파리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숲속에 물가다. 거기로 새를 물고 달려오고 있다.

 

개가 까치는 물고 가고 그 뒤를 여우가 뛰어가는 모습이 있다. 까치를 서로 잡아먹으려는 모습들인가?

 

<큰 불로 새카맣게 타 버린 숲을 개 한 마리가 달리고 있었어. ...> 왼편에 글들이 있다.

한 방향이 아닌 세로로 방향을 돌려 읽거나 바로 보거나 글을 쓴 판을 다르게 만들어서 짜깁기 한 거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했을까? 글씨가 손글씨다. 어떤 서체도 아니다. 원작을 한면 보았다. 원작은 더 글씨가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다. 더욱 왜 이런 방식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큰 불로 날개를 다친 까치를 개가 물고 동굴로 데려간다. 잡아먹으려고? 했더니 날개 다친 까치가 날지 못할거라고 움츠러들자 개는 <‘난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그래도 산다는 건 멋진 일이야!’> 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까치는 개가 살던 동굴에 박혀 숨어버린다. 메마르지는 않은 갈색으로 전체를 깔았다.

 

<우리 강가로 나가자. 내 등에 올라타. 그리고 네가 본 걸 내게 말해 줘...>

점점 커지는 슬픔으로 까치가 동굴을 나서자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던 개가 까치를 등에 태우고 강물로 간다. 물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까치는 본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은 개와 날개 다친 까치. 그림은 강가에 비치는 개와 까치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까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다. 눈들이 다 빨갛다.

 

<개는 까치를 등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어..> 마음을 내어주는 까치와 개는 서로의 눈이 되어주고 날개가 되어줄 수 있도록 푸른빛 속으로 힘차게 달렸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날아라 , 날아! 내가 너의 눈이 될어 줄 게 너는 나의 날개가 되어 줘.>

그렇게 마음으로 친구가 되는 이들로부터 바람이 까치의 깃털 속으로 스며들어가면서 까치는 기분이 좋아진다. 뭐라해야하나? 이 색들을 흙색? 이라고 할까 개가 달리는 공간에 색이 청록색이 깔린 흙색같다. 그 개가 지나쳐 온 그곳들은 좀더 다갈색처럼 보인다. 개 잔등에 올라탄 까마귀. 그들은 한몸처럼 다닐거같은..

 

<개는 까치를 등에 태우고 매일 이곳저곳을 달렸어. ..여우의 눈빛은 왠지 불안해 보였어. 진한 붉은 색의 여우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났어. 여우의 눈빛은 왠지 불안해 보였어. 활활타오르는 불길...> 혓바닥을 슬쩍 내밀고 까치를 돌아다보며 웃고 있는 개의 모습이 익히 알던 개의 모습이 떠오른다. 충성스럽고 애교스러운 그래서 인간들과 같이 살고 있는 개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편에 여우 한 마리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다. 왠지 불안한 눈빛이란다. 그다지 불안해 보이지는 않지만 응시하고 있는 여우는 보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고 쓴다. 숲을 태운 큰불을 떠오르게 하는 글이다. 까치가 여우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로 읽힌다. 바들바들 떨었다. 왤까? 다시는 날지 못하게 만든 이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여우의 불안한 눈빛때문인가? 붉은 빛이 많은 그림들에서 새싹이 돋기 시작한다는 말에 어울리게 초록빛이나 연두빛이 조금씩 나타난다.

 

< ‘어서와. 우리와 함께 지내자.’ ..> 노란빛? 의 눈을 가진 여우가 개의 보이지 않는 쪽으로 다가가 <..너희가 달리는 걸 보았어. 정말 특별해보이더라...> 라고 말한다. 특별해 보이더라는 말에 무게가 실린다. 여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에..?

까치는 자신에 상처입은 날개를 여우가 보지 않도록 숨기듯이 하고 발톱에 부리는 새우고 여우를 바라본다. 개와 까치의 중간에 여우가 기다랗게 그려져 있다. 개와 까치의 공간이 여우로 인해 분리되는 듯하다.

 

<..어느새 동굴 속은 여우의 냄새로 가득 차 버렸어.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의 냄새였지>

여우의 왼쪽눈이 더 광을 내듯이 노란빛으로 정면을 보고 있다. 강렬한 눈빛이다. 두 눈만 클로즈업 시켜놓았다. 눈을 이렇게 클로즈업 시키는 것. 나를 보고 있는 거처럼 보인다. 눈빛에 느낌이 가득 차 있다. 글은 여우의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쓰고 그림으로는 눈빛이 가득하도록 강렬하게 그렸다.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의 냄새란다. 이상하다. 질투와 외로움은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둘의 사이좋음을 질투하고 그래서 상대를 배려하고 보살피는 모습에 외로움을 느끼는거 같다. 그럼 분노는 어디에서 온 걸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 둘에게 화가 나는 걸까? 외로우니 슬프고 슬프니 화가 나서 일까? 여우가 특별해 보인다고 할 만큼 둘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그 안에 일원이 되고 싶은 감정이 들었을까?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들에게 다가갔으나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일까? 계속 자신을 경계하는 까치를 여우는 아나보다. 그들에 사는 곳에서 그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가봐도 어렵다. 왼편에 어둠속에 잠긴 보금자리가 숨어 있고 그 앞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빛이 어디에선가 있는지 아래녁에 바위가 빛을 반사하고 있다.

 

<여우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애야.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조심해...나는 개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바람보다도 더 빨리..나랑 함께 가자. > 까치가 여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있다. 어떻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애라고 말할수 있을까? 무엇을 보았길래..?

여우는 왜 까치에게 같이 떠나자고 하나? 잡아먹으려고? 신체 건강하지 않은 둘을 잡아먹는건 그다지 어려웁지 않다. 그럼 잡아먹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나? 그렇다면 여우가 좋은 아이라고 말하는 개는 왜 그렇게 단정짓나?

 

<하늘을 나는게 어떤 건지 기억해? 진짜로 나는 것 말이야..> 개보다 빨리 달린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던 까치는 자신의 기억을 깨우는 여우의 말에 움직인다. 자신의 지난날. 날개가 다치지 않았던 자신의 몸으로 직접 날던 시간들이 일깨워지면서 까치는 여우를 따라 나선다

중요한 부분이다. 처음부터 여우를 경계하면서 개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던 까치가 마음을 바꾼다. 무엇 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날수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까치는 개를 떠난다. 화려한 시절이라고 해야할까? 인간들이 잘 하는 왕년에..내가 말이야를 떠오르게 한다. 잠이 깬다.

 

<...드디어 내가 날고 있어. 진짜로 날고 있다고!...> 왠지 시원해보이기도 한 몸이 거꾸로 뒤집어진 까치의 모습이 불안한 그림이다. 대각선으로 여우의 붉은 몸둥이rk 눈에 가득 들어온다. 그리고 노란눈빛의 여우가 뒤집어진 까치는 회심의 미소를 짓듯이 보고 있는 모습도 점점 들어온다. 날으듯이 화면 가득이 여우가 뛴다. 여우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잡아먹는거 훨씬 쉬울텐데...

 

<...이글거리는 붉은 사막까지 달려갔지..> 여기도 붉은 사막이란다. 이 그림이 좋았다.

직선으로 뻗은 듯한 여우의 몸과 나는 거처럼 훨씬 커 보이는 까만 까치. 붉은 빛이 나는 사막으로 날으듯이 달려가는 여우. 죽어도 상관없겠다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까치는 비록 자신이 직접 날지는 못하더라도 여우덕분에 나는 거처럼 날았다고 위안이 될까? 이러고 나서 여우에게 잡아 먹혀도 괜찮을 거 같은 기분이다.

위쪽에 종이를 바느질해서 붙여 놓은 듯한 흔적이 보인다. 저것 뭘까

 

<..이제 너와 개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될 거야...> 벼룩이라도 털어 내듯 까치를 떨어뜨리고여우는 까치는 지긋하게 바라본다. 노란 눈의 여우가 까치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 너와 개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될 거라고. 여우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진다. 분노와 질투와 외로운 냄새를 풍겼다고 했다. 그래서 외로움을 까치에게도 개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었던건가? 둘 사이에 오직 침묵만이 흘렀을 때 까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우는 외로움 때문에 이 둘을 갈라놓고 싶었던 걸까? 여우가 까치를 잡아먹을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

 

<..까치는 이글거리는 붉은 사람 한 가운데 홀로 남겨졌어. ..온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어.> 그랬다 . 왼쪽 아래에 까치는 멍한 듯 붉은 해를 바라보며 서 있다. 붉은 빛이 여전히 많은 사막그림이다.

 

<그 순간 까치는 혼자 남겨 두고 온 개가 생각났어. >그림을 조금 세밀하게 본다면 개가 보일까? 하고 들여다 보지만 깊다.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심조심, 비틀 비틀, 폴짝폴짝, 까치는 친구가 있는 곳을 향해 멀고 먼 여행을 시작했어>왼편 위쪽에 붉은 가장 붉은 빛을 등에 지고 까치는 이동한다. 멀고 먼 여행길을.

 

마지막 이면지에 처음에 펼쳐진 붉은 빛으로 가득차 있던 그곳이 청록색의 나무들이 서 있는 이제는 하얀구름과 파란하늘색으로 여느 숲이 있다. 처음의 그곳이 불타오르는 숲으로 그려놓은 붉은 빛이었나 보다.

 

개와 여우는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충성스런 이미지의 개는 날개를 다친 까치를 도와주고 일어나기를 말없이 기다렸다가 까치와 같이 살아간다. 자신이 생각하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건 멋지다고 위로를 한다. 구해주고 위로하고 기다리고 살아가고 있는 개는 한결같게 보인다.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온 여우는 특별해보인다는 칭찬? 과 함께 그들의 보금자리로 들어온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 가운데로 들어온다. 자신을 의심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는 까치에게 개를 배신하자고 계속 유혹한다. 물러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돌변하지도 않은채 계속 유혹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지체없이 떠난다. 교활하고 꾀가 많다고 생각하는 여우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간다. 그에 비해 까치는 나는 새라것 외에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설날에 까치? 외국그림책인데 그곳에서도 까치는 이런 이미지일까? 까치는 힘들고 슬픔에 빠져 어쩔줄 몰라했지만 개와 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잘 살아가다가 여우로 인해 불안해하고 움츠러든다. 여우의 시선에 힘들어하고 의심하다가 결국 개를 배신하고 여우와 같이 떠난다. 세상을 다시 나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한다. 그랬다가 혼자 남겨졌을 때 처음 날개를 다친 불타오르는 숲에 몸을 다친 그날을 연상하는 거처럼 온몸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것만 같다고 아파한다. 하지만 까치는 길을 나선다. 자신이 배신했던 개를 떠올리며 비틀거리며 길을 나선다.

 

의외의 결말. 여우가 까치를 잡아먹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외로움에 대해 말을 하고 떠난다. 외로움. 여우는 처음부터 개와 까치를 떼어놓기 위해 다가온 것일까? 불안한 눈빛이라는 여우였다. 여우는 특별해보이는 이들을 질투해서 일까 아니면 그들 속에 속해있고 싶어서 일까? 특별해보이는 그들과 같이 있으면 자신도 특별해질거 같은 바램으로 왔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여우의 눈빛이 다르게 보인다. 뭔가를 아는 듯한, 질문하는 듯하면서도 갈망하는 듯한. 참 묘하게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눈빛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가온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니 깨고 싶은 질투일까? 얻지 못해서 분노하고 화가 나면 떠나면 되는데 떠나지 않고 곁을 떠나지 않으니 급기야는 깨버리고 싶은 질투심이 일어나고 그 질투심으로 인해 외로워지는 걸까?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의 냄새라는 문장에 여우의 심정을 알고 싶다. 여우의 이미지는 처음 내게 있던 이미지이긴 하나 여우의 눈빛이나 저 문장이 여우의 복합적인 감정변화가 느껴진다. 이럴수 있을까? 저럴수 있을까? 하는 불안정한 정서가 느껴지는 여우. 제목을 여우로 잡은 것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일까?

나는 여우에게 감정적 이입이 더 크다. 까치의 선택이나 배신에 감정이입이 되기보다 여우의 눈빛이나 그렇게 까치를 버리고 떠나버리는 여우의 마지막 모습이 더 기억에 남고 감정적으로 흔들려서다. 특별한 두 친구를 바라보는 자의 외로움이나 그로 인한 질투와 분노를 더 많이 기억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 불릴만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런 상황에 고마움을 느꼈을까? 몰랐을거다. 몰랐으니 고마움도 없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한 장치의 여우가 나왔다고 하기에는 ...

 

일부러 왼손으로 글씨는 쓰는 방법. 수고로움을 선택했을 때는 무엇인가 목적한 바가 있었을때다. 불안함과 불편함? 여우가 가진 불안함이라는 정서를 나타내는건가? 까치가 여우에게서 느끼는 불안함? 그럼 개는 불안해하지 않나 돌아보면 개는 그렇지 않다. 불안함을 읽는 우리에게 느끼도록 하는 장치일까? 불안함도 있지만 불편함도 있다. 그냥 왼손으로만 쓴게 아니라 방향도 자주 바꾸었다. 불안한 글씨체를 편하게 읽게 하지도 않았다. 책을 이리저리 틀어서 읽도록 했다. 쉽거나 빠르게 읽지 않고 일정의 불편함을 안고 읽게 하고 싶은 장치일까 싶다.

 

친절하게 자신을 일으켜준 개를 배신하고 여우를 따라나선 까치.

개를 떠나 날으는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때가 아닌 오래전 기억에 날으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배신을 하고 떠난다. 다른 무엇에 대한 애정이나 갈망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자기에 대한 애정이 까치를 변하게 한다. 자기를 버리지 못한다. 어찌보면 까치로서는 그럴수 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난 너를 배신하는게 아니야. 나를 찾기 위함이고 나를 알기 위해서 떠난거야라는. 까치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다쳤으니 슬프고 슬픈데 위로를 해주니 받아들이고 안정을 찾으니 자신을 찾고 싶어지는. 그렇구나. 까치는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그러나 마지막에 까치는 멀고 먼 여행을 떠난다. 혼자남은 개를 생각하면서. 이 대목에서 까치가 내리는 선택에 희망을 그리는 거 같고 마지막 이면지 그림이 맞물려 잘 들어간다. 그럼 나는 그런 상황에 까치와 같은 희망을 그리는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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