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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핀 꽃 ㅣ 국민서관 그림동화 174
존아노 로슨 지음, 시드니 스미스 그림 / 국민서관 / 2015년 8월
평점 :
물들어 가는 색으로
<거리에 핀 꽃> 존 아노 로슨 기획.시드니 스미스 그림.국민서관
2017년.3.1일.정기화
1.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에 대해
- 빨간 후드티를 입은 아이가 길을 가고 있다.
하늘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 길가에 노란 꽃을 보고 꺾는다.
- 노란꽃의 향기를 맡아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담벼락 높은 곳에 빨간 꽃도 꺾었다.
- 사람들이 모인 정류장에도 꽃이 피었다.
- 가게를 지나서 길가 커다란 동물상 아래에 핀 꽃을 꺾었다.
- 길바닥 돌 틈에 핀 보라색 꽃을 보았다.
-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공원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조깅하는 사람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 공원길에 새가 한 마리 죽어 있다.
꽃 한송이를 새에게 올려주었다.
- 긴 벤취에 아저씨가 누워 있어서 발에 꽃을 한송이 내려놓았다.
- 지나가는 개에게도 꽃을 한송이 꽂아주었다.
- 그녀에게도 꽃을 한 송이 머리칼에 꽂아주었다.
- 유모차에 탄 아이에게도 달팽이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도 꽃을 한송이씩 주었다.
- 마지막 남은 꽃 한송이를 귓가에 꽂았다.
2. 그림을 보며 아이 입장으로
- 2007년 3월 4일 오후 3시 20분. 아빠가 데리러 왔다.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은 구경할게 많다.
문신한 아저씨도 있고 새도 있고 꽃도 있다.
노랗게 보이는 꽃이 예뻐서 한송이 꺾었다.
- 꽃 향기를 맡아보니 향이 좋았다.
육교를 가다보니 담벼락위에 빨간색 꽃도 피었다.
꽃을 꺾는 동안 아빠가 기다려주었다.
-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에 꽃이 피었다.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언덕위에도 꽃이 있었다.
- 유리병들이 많은 곳을 지나갔다.
꽃을 유리병에 꽂아도 좋겠다.
조금 더 꽃을 모을까
- 새들이 있는 길가에 보라색 꽃도 있다.
꽃이 한주먹 가득이다.
빨리 집에 가야지
-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공원을 지나가면 곧 집이다.
여기에도 꽃이 있으면 좋겠다.
- 그런데 길가에 새 한 마리가 떨어져 있다.
죽은 건가?
곰곰 보다가 땅에 누워있는 새에게 꽃을 한송이 주었다.
아빠가 멀리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다.
- 공원 벤치에 어떤 아저씨가 모자를 쓰고 누워있다.
아저씨 신발에도 꽃을 꽂아주었다.
일어나서 꽃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겠지
- 샤피로다. 산책나왔나보다.
샤피로목걸이에도 꽃 한송이 꽂아주었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왔다.
- 엄마다. 엄마가 집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엄마를 꼭 안아줬다.
엄마한테도 꽃 한송이 주고
- 잘 놀고 있는 동생들도 꽃 한송이 주었다.
- 높이 새들이 날고 있다.
남은 한 송이 꽃을 내 귀에 꽂았다.
기분이 괜찮다
글이 없는 그림책.
그림과 글이 서로 보완하면서 읽고 즐기는 그림책이 아니라 글이 없다.
그림이 글의 내용을 자세히 보여주거나 글이 그림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하거나 또는 글과 그림이 반대의 해석을 하므로서 재미를 주거나 여러 가지로 글과 그림이 만나면서 표현하는 책이 그림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글이 없다. 글이 없다는 것이 왜일까?
그림만으로 충분히 전달하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어서?
아니면 글이 어떻게 보면 제한적인 표현을 할 수도 있어서 다시 말해 방해할까 싶어서?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전체적으로 신선하지 않았다. 꽃이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따뜻함, 뭔가 피어오르는 기대와 희망같은 것을 아이라는 매개(-전달하는 인물유형도 신선하지 않다.)를 통해서 죽어있는 새에게 벤치에 누워 잠자는 사람에게 꽃을 한송이씩 전달하면서 색이 없는 그림책에 색을 점점 입혀가고 있다. 죽어 있는 새를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 소외된 듯한 인물에게 보내는 작은 관심? 등이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라는 의미가 주제같다. 하지만 초반에 찬찬하게 완급을 조절했다면 뒤로 갈수록 서두르고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든다.
죽은 새, 잠자는 사람, 그리고 동네 개..다음엔 엄마와 동생들이다.
엄마와 동생들은 개인적인 관계에 들어간다. 소외된 어떤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이나 애정이 표현하는 것이 이 책이 전달하려는 의미에 맞는지? 주인공이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라는 인물안에서 보여주는 범위를 이 정도로만 잡은 걸까? 너무 많은 범위로 넓히기 어려워서 인가?
섬세하게 색을 입혀가면서 전개하다가 아이가 새에게 꽃을 주면서 물들어가는 색의 변화가 급하다라는 생각... 생명이 물들 때 어느날 한꺼번에 피어나는 환희와 같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어서인가? 그렇게 해석을 한다해도 아슴찬하다
글을 쓰면서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빠’라는 인물이다.
아이와 눈을 맞주치거나 뭔가 소통한다는 부분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아이가 꽃을 꺾거나 꽂아줄 때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재촉하거나 잡아 끌지 않는다.
아이를 방치하거나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기보다 뭔가 아이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자신의 사소한 일(예를 들어 전화통화)을 처리하면서 돌아오는 것 같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는 배려.
여기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라는 부분에서 잠시. .그래서 글이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