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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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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티아고는 이미 유명해졌다. 오래전에 서명숙씨가 중앙일보에 산티아고 완보기를 연재하던 무렵에 이 순례길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 나는 내가 대학원때 배우던 음악사책에서 필사본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의 그 산티아고인지는 몰랐다. 산티아고는 유행이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가보지 않은 자로선 신기하고 궁금한 동경의 대상이리라. 

산티아고는 기독교 성지순례팀이 예루살렘과 그 근방을 순례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걸어서 4-50여일을 간다면 단체로 일주일 도는 것과는 충분히 다를 것이다. 소설가 서영은씨가 나이 오십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한창 생각과 의식이 초롱초롱하던 20대에 알게된 이 소설가는  적어도 내게는 여지껏 '먼 그대'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에세이집을 대하고 한 사람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사실 이 작가의 소설을 많이 보지 못했다. 이상문학상 수상후 계간 문예지엔가 '사막을 건너는 법이 실린 것을 읽었던 것같다. 물론 그 단편의 충격에 비하면 심심해 큰 감동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미디어의 대단한 홍보도 있었지만 소설 그자체만으로도 작가의 수상작 소설에 대한 신비적일 정도의 이미지가 조성되었나보다. 그래선지 이 책을 읽고 나서 실망도 큰 것같다.  

작가는 말했다, 이 책엔 절대로 픽션의 요소가 없다고. 정말 그렇다. 이 에세이집에는 인간 서영은이 그대로 녹아 나온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적 깨달음의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우선 그보다도 순례도중에 겪는 사사로운 심적 상태가 너무나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특별히 종교적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그녀의 깨달음(특히 말인지 나귀인지와 대면한 장면)은 약간 과장되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 동행인 손위 제자와 함께하는 하루하루의 여정은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운 내적 갈등의 연속으로 솔직히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기의 정석이 여행중의 중요한 에피소드를 조금은 부풀려 재미있게 쓰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순례기에는 별로 그런 장면이 없다. 비좁은 한 알베르게에서 버너에 차를 끓여 마시는 한 할아버지로부터 차를 얻어마시는 여유로운 장면도 곧바로 쓰러진 지팡이때문에 찻잔을 엎지르고 뜨거운 물세례를 받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60대 여인의 감정적 간격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어떨 때는 독자마저 당황스러워진다. 일주일만 넘어도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예의를 차리다가도 일주일을 보통 못넘기는게 상례다. 더이상은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는 게 힘들다. 여행지에서 동행자와 더불어 짊어지는 정신적 피로는 육체적인 곤함을 능가한다. 그런지라 작가의 사소해보이는 불평들이 솔직해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기대한 모습과는 다른 왜소함에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에세이집 책장을 덮고 던져지는 책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다가오는데,간증의 현장,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자연과 착한 사마리아인들과 오래된 집들, 그리고 이러한 동행과의 토닥거림이다. 

표지가 참 예쁘다. 제목도 여운이 깊다. 노란 화살표가 관통한 한 여인네의 기다란 그림자역시 멋지게 들어맞는다. 그처럼 책속에는 이 소설가가 읊는 적지 적소의  상쾌한 경구도 눈에 띈다. 후반부에는 김동리작가와의 에피소드와 자신의 생각도 잠시 섞여있다. 그중에 세번을 끊었다는 말이 놀랍게 다가왔다. 여행중에 그만 그곳에서 정착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은이는 늘 그런 마음으로 여행을 해왔나보다. 또 그렇게 살아왔나보다. 결혼이 자신을 완성한다고 생각하면서 몇십년을 산 후에, 자신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여인들이 있다면 지은이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최근에 이 책 처럼 물음표(부정적 의미의)를 많이 그리고 읽은 책도 없다. 그런데 한가지 기억하고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녀가 말한 '끊었다'는 말이었다. 우린 여태까지 너무 연결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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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까? - 의사결정에 관한 행동경제학의 놀라운 진실
마이클 모부신 지음, 김정주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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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원제를 보니 "두번 생각하기:반직관의 힘을 이용하기"이다. 반직관이란 윅셔너리에 이렇게 나와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되는 직관.  ’반직관적’이란 ’직관이나 상식에 반대되는’이란 뜻이다. 컬럼비아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똑똑한 사람은 합리적으로 행동해 손실을 줄이고 최대의 이익을 볼 것이라는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흔히 우리가 저지르거나 맞닥뜨리는 실수의 상황들을 다양하게 그 이유와 함께 언급한다.  상식과 직관에 반대되더라도 비합리성과 선택의 실수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귀기울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급한 판단으로 인한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두번 생각할 수 있는 태도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일 먼저 제기하는 문제점은 우리가 주로 내부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객관적인 외부관점을 유지함으로써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언제 마칠지 예측은 잘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는 꽤 잘하는 편이다. 두번째 모부신이 제시하는 편견을 조장하는 생각의 습관은 기준점 설정과 관련이 있다. 즉 터널비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선택의 폭이나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르테면 사람들은 주어진 약간의 전제만으로 좋은 가능성만 고려해 판단한다. 자신이 믿는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간과한다. 또한 문제를 보는 방법은 문제를 푸는 방법을 결정하기때문에 좁은 시야는 문제해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안에 이미 구성된 적절하지 못한 심적 모델로 인해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얼마전에 나는 딸아이 가방을 사주러갔다가 98000원이라고 적힌 가격을 보고 7만원에 해달라고 흥정을 띄웠다. 가게 점원은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78000원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너무 쉽게 그 말이 나왔으므로 순간 나는 좀더 낮은 가격으로 흥정을 시작했어야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격은 금방 7만원에 낙찰되었지만 나는 좀더 싸게도 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울렛매장의 물건값은 적힌 가격의 할인폭이 들쭉날쭉하기에 가격을 높이 설정해놓고 할인폭을 많이 해주는 식으로 물건을 팔면 나같은 구매자가 많이 나오게 된다. 기준점을 높이 설정해놓아 구매자는 자신이 제시한 가격으로 쉽게 흥정이 끝나 만족할 수 있지만 이것은 판매자가 제시한 터널비젼속에 갇힌 경우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요즘 끊이지 않는 구매금액에 따른 상품권 증정행사를 하는 백화점 판매방법에 평범한 구매자들은 그 인센티브에 매번 넘어가 본의 아닌 과다구매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세번째로 저자는 대중이 전문가보다 우수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전문가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창출을 강조한다. DVD대여회사 넷플릭스가 알고리듬을 이용한 고객과 영화를 연결시켜주는 시네 매치라는 프로그램서비스를 시작해 이용자의 만족을 유도한 사례는 그러한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다양한 대중은 대중속의 평균적인 개인보다 언제나 더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전문가라해도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는 허다하다. 주식시장에서 특히 그러하지 않았나.

네번째 긍정적 의사결정의 적은 주어지는 상황이다. 8명의 실험자중 7명은 미리 정해진 답을 하고 한명만이 계속 교체되면서 상황에 대한 답을 하도록 실험을 한다고 하자. 실험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7명이 말한 답을 선택하였다. 수퍼에서 독일 와인과 프랑스 와인을 고르다가 자신이 독일와인을 구매한 경우 만일 당시에 독일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결과에 수긍할 수 있을까.  장기기증의 사례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시된 상황조건이 다르다. 독일은 기증자가 되기위해 가입하는 형식이지만 오스트리아는 기증자가 되기 싫다면 탈퇴를 해야한다. 어떤 나라에서 장기기증 등록자가 많을까. 단순히 선택권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이 특정한 판단을 하도록 손쉽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제시조건에서도 자신에게 합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는 다양한 이론과 상황을 끌어와서 상식과 합리성이 야기할 수 있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이외에도 그는 이어지는 네 개의 장에서 부적절한 수준에 복잡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빠지기 쉬운 위험, 상황보다 특성을 토대로 조직의 인과관계를 예측하려는 우, 조직내 작은 불안이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현상(변화의 과정에서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것의 무모함), 결과에 나타나는 실력과 운(평균으로의 회귀)을 다룬다. 그의 이론은 이른바 메타경영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경제학적 토대에서 살펴보는 비합리적인  인간활동에 대한 나름의 처방들이 설득력이 있다. 원저의 방대한 지적 배경에 비한다면 간혹 문맥이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 아쉬운 면이 있었다.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느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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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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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남매의 일원이었던 나는 성장기를 거치며 가족들의 성품을,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동물에 비교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가족들의 고유한 12지중 자신의 띠 한계를 벗어나 다른 동물을 창조하기에 십대의 내 능력으론 힘에 딸리기도 했다. 가끔씩 자신의 띠보다는 12지에 없는 다른 동물이 더 나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말하자면 나는 동물이 가진 일반적이나 상징적인 이미지를 연관시켜 가족의 성격분석가의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청소년기의 생각과 생활반경은 학교를 제외하면 가족이 전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욱하는 성질을 내붙이거나 어디가서 거짓말은 죽어도 못하고 살 성격이라든가 소심해서 상처되는 말을 용납못한다든가 살살 가족의 성격을 때때로 곱씹어보면서 소설 한 권 써낼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머니는 물, 아버지는 불, 쌍동이 동생은 금, 막내동생은 공기, 나는, 소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족들과 자신을 이렇게 물, 불, 금, 공기, 소금으로 지칭한다. 처음부터 어머니를 물이라고 하며 수족관 운운하는 통에 독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잠시 헷갈리고 만다. 작가는 가족을 돌보기보다 자신의 주장과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를 불로 상징했다. 권위적이고 아내를 위압적으로 다루는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물의 세가지 형태를 왔다갔다하면서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내는 유약한 여성이다. 그녀가 얼음상태에 빠져 한달을 입원했다가 다시 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릴 때 독자는 수증기로 된 엄마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다. 수증기가 된 어머니는 아버지가 저수지를 메꿔 지은 새 집에 딸 셋과 자신을 불렀을 때 그때 한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시장에서 생선을 사다가도 순간 얼음으로 되어 버리기도 하고 저녁준비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얼음이 되곤한다. 어머니가 얼음이 된다는 건 유약한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 얼어붙어 히스테리 상황이 되는 것일 게다.  

불인 아버지가 항상 불의 모습으로 권위를 휘두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물에게 흡수되어 물만이 불을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금은 나인 소금에 비해 언제나 질투심을 일으킬 정도로 외모에 뛰어나다. 아버지 불은 금을 연금술로 다스리러 매일밤 금의 방에 간다. 실제로 연금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수도검침원 아줌마와 배관공, 그리고 빚독촉을 위한 은행직원의 등장은  가족외적 구성원으로서 어떤 연결고리를 내포하는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검침원 아줌마는 밀린 수도료를 독촉하고 은행직원은 새집을 지을 때 빚을 진 돈을 갚으라고 압력을 가한다. 아버지는 이러한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 방관자로 일관한다. 이 두 개입자는 이 가족에게 닥치는 외부 현실의 복잡하고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배관공은 물이 말라버린 수도꼭지의 원인을 찾기 위해 벽을 헤집던 아버지 불을 대신해 해결사로 온 사람이었지만 그역시 닷새만에 사라지고 금에게 임신만 시킨다. 금은 열달이 지나 결국 납으로 판명된 아기를 낳고 사라진다.  

납의 탄생과 더불어 소금인 나는 아버지 불과, 남겨진 납을 키우기로 하면서 함께 현실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이야기속에 동생 공기는 기독교 신자로서 때로는 가족의 위기를 감각적으로 헤쳐나가고 기도로서 무마하곤 했다. 결국 공기역시 금처럼 사라진다. 작가는 어머니 물의 죽음을 계기로 비난의 대상이던 아버지에 대한 편견이 감소되는 서술을 펼쳤다. 결말에서 어쩔 수 없이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방법이었겠지만 다소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 물과 아버지 불의 상극적 관계가 두 사람의 섹스에서 아버지 불이 약화되는 것으로 설명했으나 현실속에서 아버지 불이 어머니물을 수증기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물리적 사실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불을 끄는 소화기능으로서의 물뿐 아니라 물을 가열해 수증기로 만드는 불의 힘을 상징의 고리속에 추가했다면 좀더 빡빡한 합리성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생각한다. 

특히 검침원과 배관공의 등장은 마치 카프카의 소설속 등장인물같이 낯설게 하는 면이 있었다. 복잡하게 정신적으로 얽힌 심리적 환우들의 집에 등장한 외부인들은 집요하고 냉정하여 상처받은 주인공의 짐이되고 음산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매개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사물의 중요 구성 요소들을 주변의 인물들에 대입해 하나의 가상현실 스토리를 개척한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얼마전 건축 설계수업을 듣기 시작한 딸아이가 수업 첫시간에 프린트물로 받은 프랑시스 퐁주의 시 '물'을 들고 한참 끙끙거리는 걸 보았다. 일주일을 버티다 결국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고 덕분에 나는 독특한 상징주의 시세계에 빠져드는 감흥의 기회를 얻었다. 이 소설에도 퐁주의 '물'이 인용되었다. 작가는 바슐라르를 읽은 것이 이 소설을 쓰게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바슐라르를 알고 이 소설을 읽으면 왜 어머니 물이 수족관으로 자꾸 들어가는지 물음표만 던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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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 조선의 거상 신화 김만덕
이성길 지음 / 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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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가 근자에 와서 새롭게 부상되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올레길(이게 역전앞과 같은 경우란 걸 알지만)이고 다른 하나는 김만덕이다. 전자 올레는 원래 제주도의 방언으로 집근처에 난 작은 길을 가리킨다는데 제주도출신의 전직 시사주간지 편집장출신의 한 여성이 스페인의 산티아고에 다녀오더니 고향 제주에 길트기를 시작해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가까운 외국인 중국과 일본으로 나가던 게 요즘은 제주올레길 걷기라는 테마로 제주도로 쏙쏙 가고 있다. 울아들도 중간고사 마치면 올레길 탐방에 나설 참이다. 

김만덕은 대중에 알려진 게 조금 더 된 거 같다. 이 글을 올리려고 김만덕을 쳐서 책 검색을 하니 아동용 도서로 보이는 김만덕 이야기책이 수두룩하게 나와있었다. 그 중 이 책은 표지가 조악하지 않고 제목도 덜 직접적이다. 그러고보니 저자는 고향을 떠나 출판업계에 종사하다 이제 다시  고향제주에 정착해 소설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제주의 여성 김만덕을 다룬 소설을 쓴 제주출신 작가의 시도가 썩 어울린다.  

이 책은 초등 고학년들이 읽어도 무방할 만큼 언어가 정선되어있고 내용도 올곧게 꾸며졌다. 김만덕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만덕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호열자로 잃고 난후 퇴기 월출선의 수양딸이 되면서 관기생활을 하다 결국 자신의 거상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기생의 신분을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마침내 건강한 상인정신으로 민심을 얻고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휼한다는 얘기로 되어 있다. 어쩔수 없이 관기로 지내지만 다른 기생들에 비해 알뜰하게 저축한 돈과 월출선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밑천으로 하여 상거래를 시작하고 당시에 육지와 제주를 잇는 중요한 상거래 품목을 결정하는 혜안으로 상도덕을 무시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이 자세히 나온다. 더불어 어머니가 호열자로 쓰러졌을 당시 만난 도형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마음도 곳곳에 배여있다. 아쉽게도 둘째 오라버니와 함께 악천후 배 사고로 이별하게 되지만 상대방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끈끈하게 느껴진다. 

생각보다 구휼의 과정은 크게 부각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의 말미는 제주의 여성으로서 섬을 벗어나 육지로 가는 최초의 여성이 된다는 변화의 상징적 움직임을 다루는데 토산품을 제작하는 할망의 희망이 만덕 자신으로서나마 실현된 예가 되었다. 소설은 튀는 곳없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려져 있다. 픽션이 가미되었다면 어디까지가 팩트인지 저자후기형식으로 약간의 안내글이 있었다면 좋았겠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초고학년, 중고용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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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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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잔인한 책이다. 정말 적나라한 책이다. 많은 책을 접해보는 중에 의도적으로 잔인성과 조악함을 들추어내겠다는 충격요법을 쓴 약간 급낮은 책들은 몇몇 본 적이 있지만 인문영역을 자리하고 토마스 홉스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안나 아렌트와 미셸 푸코까지 참고서적을 한 책으로서 이렇게 섬뜩한 내용을 가진 책은 본 적이 없다. 중세말 질 드 레라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살인극, 그것도 하류층의 오갈데 없는 어린 아이들만 골라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지른 짐승같은 얘기를 읽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나오고 만다. 그렇다. 저자는 구역질과 혐오감조차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꺼릴 때 우리 인간을 덮치는것이라고 말한다. 피범벅을 이루는 공포영화나 폭발과 총포가 난무하는 전쟁영화(휴먼적 요소가 거의 없는)를 보고 살상이 멈추지 않는 장면을 볼 때도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리는 행동역시 그 장면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일까. 혐오감을 배제할 수 없지만 가끔씩 공포영화가 솔깃해지는 심리도 폭력의 요소가 우리 유전자의 한 부분을 지배하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서 역사에서 또는 현실의 다른 어떤 공간에서 여전히 폭력은 난무한다.

 

폭력과 연관하여 다양한 생각의 범주를 끌어낸 저자는 무기, 격정, 불안,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파괴, 문화, 질서에 대해 언급한다. 그의 서술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못해 저자가 컴퓨터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철저히 감정개입을 자제하고 처절할 정도로 참혹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환형(능지처참)에 관한 서술에서 독자는 도저히 글자를 따라 읽어내려갈 수 없는 끔직함을 공유하게 된다. 언어로서 이처럼 잔혹한 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또한 그가 말하는 고통이란 노 패인 노 개인에 등장하는 찬란한 성공과 환한 미래를 위한 필히 겪어내야할 시련 정도가 아니다. 그는 고통은 고통일뿐 기호가 아니며 어떤 사명도 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통은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고통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큰 악일 뿐이라고. 폭력이 조장하는 결과로서의 고통은 그럴 수 있겠다.

 

고문은 파괴력이 가장 큰 지배기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민주화과정을 겪어낸 우리로서는 군사정권시절 숱한 고문 희생자를 알고 있다. 고문기술자라는 말까지 유행하지 않았나. 꽃다운 나이에 물고문의 희생자가된 아까운 청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입술을 깨물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형사재판의 수단이었던 고문이 19세기초반에 이르러 잠시 폐기된 적도 있었다니 신기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수십년뿐, 20세기에는 기술발전으로 더욱 무시무시한 폭력과 고문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찌장교역할을 맡았던 전직 치과의사(로렌스 올리비에 분)가 고문 도구로 치과용 기구를 사용하던 한 영화장면이 떠오른다. 고문은 동질적인 사회의 핵심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회적 범주를 장악하며, 나이외의 다른 것에 대항해 싸우는 기술이자 사회적 분할과 배제의 도구라는 저자의 설명은 냉혹하지만 진실이었다.

 

폭력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멀지 않은 곳에 구경꾼이 있다라는 말에 찬성할 수 있는가. 사자의 밥이 될 것인지, 살려줄 것인지 엄지손가락의 방향으로 죄인의 목숨을 결정하던 로마 원형경기장의 장면은 어지간히 영화에서 보아왔다. 로마황제의 결정에 따랐을까. 아니다. 수많은 군중의 함성을 황제역시 저버릴 수 없었다. 구경꾼은 방관자가 아니다. 그는 관심을 가진 관찰자이며 곤바로 흥분한 개입자가 될 수 있다.

 

고문이 밀실에서 이루어진다면 처형은 원래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치 및 사회 질서를 공고하게 하고 보존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반자, 범죄자, 무신앙자가 처형대상이었다. 사형집행을 잘 들여다보면  자의성의 정권(정치권력)과 질서의 연대(군사력)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갑지 않지만 거역하기 힘든 진실은 학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학살에는 반드시 폐쇄된 장소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마을이나 소도시는 포위상태여야하고 안마당이나 광장의 경우에도 접근로가 완전히 차단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탈출할 수 없어야 한다. 전투는 승리를 목표로 하는 반면 학살은 어떤 미래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현재의 지속만 있을뿐이다. 칼질작업의 내적인 충동이란 묘사에 이르러 독자는 또다시 악마적인 내용에 치를 떨지 모른다. 서투른 독자는 19세이상의 영화를 보고 나쁜 영향을 받는 아이처럼 이런 난폭한 묘사에 더러운 기운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드러냄의 기술이 반성의 단계로 이어지길 저자는 바랬을 것이다. 설마 유혈낭자한 묘사를 통해 새디즘적인 폭력을 상상하고 이 책을 썼으리라 상상할 수 없다.

 

힘에 대한 반역이 곧 파괴의 사회적 의미라고 정의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적어도 그렇다. 그는 우리가 가끔씩 잊기 쉬운 놀라운 진실을 드러내는 데 서슴이 없다. 모든 질서는 물질적인 대상이나 기호, 인공물을 통해 구체화된다. 힘의 건축물이나 정권의 상징물, 영주의 재산과 그의 부하가 가진 무기등이 그런 예이다. 복종이 지속되는 한 이런 사물들은 주목과 존경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사물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히 힘에 대한 반역일 수 밖에... 무굴제국의 왕 샤자한 때 지은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건축물이상으로 권력을 상징한 사물을 바라보게 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화조차도 그 안에 폭력을 함축한다. 문화가 세워진 기반을 생각해보라. 중국대륙에서 당송원명청으로 주권이 바뀌어 가고 새 조정의 성립이면에 수많은 폭력의 자취가 남아있을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각종 제도와 견해의 정당성과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질서와 폭력의 관계를 얘기해보자. 인간은 서로에 대해 느끼는 불안때문에 사회를 구성한다. 상대방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손잡고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한다.사회속의 여러 사회적인 교섭의 상화을 규제하는 사회계약이 필요하게 되었고 칼은 그 계약의 효력과 구속력을 보장했다. 규칙의 준수를 위해 감시와 제재라는 규범이 따라야 한 것이다. 즉 사회계약에는 지배의 계약이 수반된다. 폭력의 독점이 허용될 때 개인의 도덕적 허술함이 제거되고 자의적인 계약파기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지배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한 지배가 호력을 발하는 범위 안팍을 향한 폭력을 행사한다.

 

질서는 무얼까. 그것은 순응성과 동질성을 추구한다. 규칙이 엄수되고 있는지 감시되고 때로는 강요된다. 질서란 규범과 정상성에 관한 정의이다. 획일성의 생산이자 일체의 낯섬에 대한 배제와 억압이다. 소설속의 전체주의사회나 영화속 미래 기계인간 시대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읨를 곱씹어보게 되는 순간이다.

 

탈제도적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이 책(1996년 간)은  80년대 후반에 나온  자끄 아딸리의 <노이즈, 소음의 정치경제학>을 연상시킨다. 그는 프랑스 미테랑 정권의 경제자문이었다. 아딸리의 책은 무차별적 권위의 질서에 대한 단절(rupture)의 t시도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 반면 이 책은 질서로 대변되는 사회의 규범과 문화와 지배체제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폭력의 흔적과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그리고 폭력에 연관된 사물과 상황의 잔혹성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인간의 역사속에 있어왔고 인간 종의 유전자속에서 진화되어 온 요소라는 생각에 다시 유심히 읽게된다. 너 자신속의 짐승을 알라. 그리고 버려라, 그 욕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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