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고 하고 한동안 광우병에 관한 괴담들이 인터넷화두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곡류등 작물뿐 아니라 육류제품역시 대규모 축산업으로 생산될 것이고, 철창속에서 갖은 항생제와 영양제(스테로이드?)를 주입당하며 오로지 육질만을 위해 비인간적인(아니 비동물적인, 아니 부당한) 방법으로 사육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나 있었다. 최근에 읽은 미국인 가정의학 전문의가 쓴 남자아이 바로 기르기를 다룬 한 책에서는 미국에선 이미 30년전부터 소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여왔다고 되어 있었다. 광우병은 둘째치더라도 스테로이드 먹인 소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게되는 것 아닌가 염려스럽다. 미국국내 소비되는 육우에게도 스테로이드를 마구 먹이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수출용에만 그런 건 아닐지. 푸에르토리코의 여아들이 7-8세에 벌써 초경을 하는 등 신체적 조숙이 나타나자 스테로이드 먹인 소고기( 이 나라에 수출된)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나 의심해보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최근에 로하스를 사표로 삼은 한 식품기업은 자사가 운영하는 친환경매장에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이념에 호응하며 자사의 매대에서 판매되는 육류는 동물 권익 보호의 규울을 지키고 있노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보호니 자연환경보존의 차원에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을 살리자라는 구호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축으로서의 동물, 우리가 식용하는 사육동물의 권익에 대해 생각하자는 주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적어도 국내의 사람들에게는) 약간 낯설게 다가오는 점도 없지 않다.

 

컬럼비아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리처드 불리엣이 쓴 이 책은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한 역사학자의 답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야생에 있던 동물이 사육화되어 오늘날에 이른 과정을 자세하고 방대한 자료를 통해 역사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과 동물의 본래적 관계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포스트 도메스틱 post- domestic(역자는 '후기사육시대' 라고 옮김) 시기이며 이 시기는 이전의 사육시기와 그 이전의 프리 도메스틱 pre- domestic('전기사육시대'라고 옮김)의 단계를 거친 후에 도래한 단계로 설명한다. 즉 사육시기란 마치 지금 성인들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형태인 가축을 기르고 잔치때 소나 돼지를 직접 잡아 육식하던 행위가 당연시되었던 시기이다. 반면 포스트도메스틱의 시기(내 생각에는 이 말은 사육시대 다음시대라는 느낌이 강해 후기사육시대라고 할 때 연상되는 사육시대안의 후반부를 가리키는 의미와는 다르다고 본다)는 실제 사육동물의 도살을 목격하지 않으며 제품하되어나온 육류를 통해 사육동물에 관한 정서나 이미지를 연상하지 못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고기, 동물가죽, 실험동물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하면서 이것이 제공하는 제품들과 문화적 서비스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부적인 일들을 알게되면서 반발도 히게 된다. 그리고 프리 도메스틱은 사육시대 이전의 시기로 동물과 자신을 어렴풋이 구별하게 된 호미니드 조상들이 인간/동물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생활 형태에 눈뜨고 동물과 관련된 미적 감수성을 보여주거나 영적 명상(제의)을 실행에 옮기던 시기였다.

 

저자는 현재 포스트도메스틱의 시기가 프리도메스틱시기의 정서를 재연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 정서란 수천년의 사육시대 동안 억눌려왔던 정서, 즉 인간에게 이익을 주지만 인간화할 수 없는 동물들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거나 멸종위기의 야생동물과 다시 접촉하고싶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정서들이다.

 

사육이전 시기에서 사육화가 진행된 과정은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라고 보통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저자 불리엣은 이 과정이 반드시 의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것을 자연스럽게 발생된 공생관계로 취급하고 싶어한다. 돼지의  사육화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자신의 정착지에서 돼지가 음식쓰레기를 처치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새끼돼지를 애완용으로 받아들여 사람들이 먹는것과 같은 식물뿌리와 덩이줄기를 주었을 것이고 몇십세대를 거듭하면서 돼지들은 자발적으로 사람사는 마을로 찾아들어 음식물 찌거기를 먹어치우면서 가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집돼지가 된 돼지들은 희생동물로서 종교적 제의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불리엣은 사육시대로 이행하면서도 살아남았던 상상적이고 영적인 용도로서의, 인간/동물 관계가  가축화가 보다 더 진전됨으로써 마침내 쇠퇴의 길을 걷는 과정을  제 8장 정서적 상징의 추락이란 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장은 마치 당나귀에 관한 재미있는 책속의 책같은 느낌을 자아내었다. 저자는 자신이 낙타이용 경제에서 당나귀가 담당한 역할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에 알게된 당나귀에 대한 신적인, 악마적인, 멍청한 바보같은 모습을 많은 실제 인용 이야기들을 통해 들려주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당나귀로 변한 멍청한 닉 바텀의 이야기를 읽어가다보니 자꾸 영화<슈렉>의 똑똑한 당나귀가 생각났다. 포스트 도메스틱 시기의 인간화된 동물모습의 하나인......

 

저자가 제시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동물을 바라보는 미국식 정서에 관한 것이다. 강력한 종교적 뿌리를 가진 농업국가로서 과학적 연구및 보호단체가 이제 막 싹트려고 하는 미국에서는 픽션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을 인간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했다는 점이다. 무수한 동물 종 중 인간을 오직 한가지 종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교리가 암시하듯, 인간을 동물화하기(이것은 다윈의 영향을 받은 영국과 유럽 풍토에서 나타난 경향)보다는 " 동물을 인간화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것이다. 피터 래빗과 도널드 덕의 성격을 비교해봐도 짐작이 간다.

 

불리엣은 애드리언 프랭클린이 <동물과 현대문화>에서  해리엇 리트보와 키스 테스터의 입장을 비교하고 있는 것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리트보의 편에 서 있음을 시사했다. 역사적 문화적 변동의 의미를 인정하면서 사회인류학과 푸코에 기초한 테스터의 분석을 더 예리하다고 평가한 프랭클린은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부르디외, 푸코, 엘리아스 보드리야르를 언급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동물 문제에 몰두한 사람은 없었다고  불리엣은 강조한다. 따라서 자신은 "변화가 지닌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우연한 성격을 가까이서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리트보의 입장이 호소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다양하고 방대한 지역적 문화적 자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일본인의 동물에 대한 생각을 통해 사육이전 시기의 정서를 찾아내고자 했는데 어떤 기회에 어떤 연유로 일본의 자료와 접하여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었는지 좀더 개인적인 고백이 필요해 보였다. 일본에 대한 단순한 반감이라기보다, 혹여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 그는 맹자와 공자의 사상도 언급한다)- 신비화하기에는 너무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중국인들을 포기하고나니 남은 것이 일본의 음식문화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 동양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도 있어 보이는 걸 어쩌랴. 미야지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은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 문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저자가 찾은 "행복한"-적어도 저자에게는 그럴 듯 싶어 붙여본다- 상상력의 미래는, 다시 말해 동물의 정령화를 보여주는 상상력의 산물은 서구에서는 아직까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전 TV에서 구마모토 지방의 한 말농장 주인은 잘 팔리는 말고기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농장(이는 곧 공장이었는데)의 한 곳에 말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석을 세우고 매일 직원들과 함께 기도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있었으며 집에 돌아와서도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켜준 말들의 영혼을 위해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육시기의 잔상과 정령에 대한 감성을 깨우지 못한 포스트도메스틱 시기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독특한 행동이긴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라기 보다 사업에 대한 일본인들의 꼼꼼한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불리엣은 구마모토 말고기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이 내용을 알았다면 하야오나 하루키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 전체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과격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포스트 도메스틱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육가공품으로만 만나는 사육동물의 격하된 위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상상의 영역에서 퇴출당한 산업상품으로 변질되어 버린 그들을 창조적 심성으로 되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불리엣은 진정한 천재가 나타나 프리 도메스틱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해 주길 원한다.  "동물이 신과 교감하고 반인반수가 존경받던 시대, 동물을 죽이는 것이 경외감과 죄의식이 들게 만들었던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하려면 진정한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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