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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단히 잔인한 책이다. 정말 적나라한 책이다. 많은 책을 접해보는 중에 의도적으로 잔인성과 조악함을 들추어내겠다는 충격요법을 쓴 약간 급낮은 책들은 몇몇 본 적이 있지만 인문영역을 자리하고 토마스 홉스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안나 아렌트와 미셸 푸코까지 참고서적을 한 책으로서 이렇게 섬뜩한 내용을 가진 책은 본 적이 없다. 중세말 질 드 레라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살인극, 그것도 하류층의 오갈데 없는 어린 아이들만 골라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지른 짐승같은 얘기를 읽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나오고 만다. 그렇다. 저자는 구역질과 혐오감조차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을 꺼릴 때 우리 인간을 덮치는것이라고 말한다. 피범벅을 이루는 공포영화나 폭발과 총포가 난무하는 전쟁영화(휴먼적 요소가 거의 없는)를 보고 살상이 멈추지 않는 장면을 볼 때도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리는 행동역시 그 장면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일까. 혐오감을 배제할 수 없지만 가끔씩 공포영화가 솔깃해지는 심리도 폭력의 요소가 우리 유전자의 한 부분을 지배하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서 역사에서 또는 현실의 다른 어떤 공간에서 여전히 폭력은 난무한다.
폭력과 연관하여 다양한 생각의 범주를 끌어낸 저자는 무기, 격정, 불안,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파괴, 문화, 질서에 대해 언급한다. 그의 서술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못해 저자가 컴퓨터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었다. 철저히 감정개입을 자제하고 처절할 정도로 참혹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환형(능지처참)에 관한 서술에서 독자는 도저히 글자를 따라 읽어내려갈 수 없는 끔직함을 공유하게 된다. 언어로서 이처럼 잔혹한 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또한 그가 말하는 고통이란 노 패인 노 개인에 등장하는 찬란한 성공과 환한 미래를 위한 필히 겪어내야할 시련 정도가 아니다. 그는 고통은 고통일뿐 기호가 아니며 어떤 사명도 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통은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고통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큰 악일 뿐이라고. 폭력이 조장하는 결과로서의 고통은 그럴 수 있겠다.
고문은 파괴력이 가장 큰 지배기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민주화과정을 겪어낸 우리로서는 군사정권시절 숱한 고문 희생자를 알고 있다. 고문기술자라는 말까지 유행하지 않았나. 꽃다운 나이에 물고문의 희생자가된 아까운 청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입술을 깨물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형사재판의 수단이었던 고문이 19세기초반에 이르러 잠시 폐기된 적도 있었다니 신기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수십년뿐, 20세기에는 기술발전으로 더욱 무시무시한 폭력과 고문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찌장교역할을 맡았던 전직 치과의사(로렌스 올리비에 분)가 고문 도구로 치과용 기구를 사용하던 한 영화장면이 떠오른다. 고문은 동질적인 사회의 핵심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회적 범주를 장악하며, 나이외의 다른 것에 대항해 싸우는 기술이자 사회적 분할과 배제의 도구라는 저자의 설명은 냉혹하지만 진실이었다.
폭력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멀지 않은 곳에 구경꾼이 있다라는 말에 찬성할 수 있는가. 사자의 밥이 될 것인지, 살려줄 것인지 엄지손가락의 방향으로 죄인의 목숨을 결정하던 로마 원형경기장의 장면은 어지간히 영화에서 보아왔다. 로마황제의 결정에 따랐을까. 아니다. 수많은 군중의 함성을 황제역시 저버릴 수 없었다. 구경꾼은 방관자가 아니다. 그는 관심을 가진 관찰자이며 곤바로 흥분한 개입자가 될 수 있다.
고문이 밀실에서 이루어진다면 처형은 원래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치 및 사회 질서를 공고하게 하고 보존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반자, 범죄자, 무신앙자가 처형대상이었다. 사형집행을 잘 들여다보면 자의성의 정권(정치권력)과 질서의 연대(군사력)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갑지 않지만 거역하기 힘든 진실은 학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학살에는 반드시 폐쇄된 장소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마을이나 소도시는 포위상태여야하고 안마당이나 광장의 경우에도 접근로가 완전히 차단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탈출할 수 없어야 한다. 전투는 승리를 목표로 하는 반면 학살은 어떤 미래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현재의 지속만 있을뿐이다. 칼질작업의 내적인 충동이란 묘사에 이르러 독자는 또다시 악마적인 내용에 치를 떨지 모른다. 서투른 독자는 19세이상의 영화를 보고 나쁜 영향을 받는 아이처럼 이런 난폭한 묘사에 더러운 기운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드러냄의 기술이 반성의 단계로 이어지길 저자는 바랬을 것이다. 설마 유혈낭자한 묘사를 통해 새디즘적인 폭력을 상상하고 이 책을 썼으리라 상상할 수 없다.
힘에 대한 반역이 곧 파괴의 사회적 의미라고 정의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적어도 그렇다. 그는 우리가 가끔씩 잊기 쉬운 놀라운 진실을 드러내는 데 서슴이 없다. 모든 질서는 물질적인 대상이나 기호, 인공물을 통해 구체화된다. 힘의 건축물이나 정권의 상징물, 영주의 재산과 그의 부하가 가진 무기등이 그런 예이다. 복종이 지속되는 한 이런 사물들은 주목과 존경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사물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히 힘에 대한 반역일 수 밖에... 무굴제국의 왕 샤자한 때 지은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건축물이상으로 권력을 상징한 사물을 바라보게 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화조차도 그 안에 폭력을 함축한다. 문화가 세워진 기반을 생각해보라. 중국대륙에서 당송원명청으로 주권이 바뀌어 가고 새 조정의 성립이면에 수많은 폭력의 자취가 남아있을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각종 제도와 견해의 정당성과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가서 질서와 폭력의 관계를 얘기해보자. 인간은 서로에 대해 느끼는 불안때문에 사회를 구성한다. 상대방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손잡고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한다.사회속의 여러 사회적인 교섭의 상화을 규제하는 사회계약이 필요하게 되었고 칼은 그 계약의 효력과 구속력을 보장했다. 규칙의 준수를 위해 감시와 제재라는 규범이 따라야 한 것이다. 즉 사회계약에는 지배의 계약이 수반된다. 폭력의 독점이 허용될 때 개인의 도덕적 허술함이 제거되고 자의적인 계약파기를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지배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한 지배가 호력을 발하는 범위 안팍을 향한 폭력을 행사한다.
질서는 무얼까. 그것은 순응성과 동질성을 추구한다. 규칙이 엄수되고 있는지 감시되고 때로는 강요된다. 질서란 규범과 정상성에 관한 정의이다. 획일성의 생산이자 일체의 낯섬에 대한 배제와 억압이다. 소설속의 전체주의사회나 영화속 미래 기계인간 시대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읨를 곱씹어보게 되는 순간이다.
탈제도적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이 책(1996년 간)은 80년대 후반에 나온 자끄 아딸리의 <노이즈, 소음의 정치경제학>을 연상시킨다. 그는 프랑스 미테랑 정권의 경제자문이었다. 아딸리의 책은 무차별적 권위의 질서에 대한 단절(rupture)의 t시도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 반면 이 책은 질서로 대변되는 사회의 규범과 문화와 지배체제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폭력의 흔적과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드러낸다. 그리고 폭력에 연관된 사물과 상황의 잔혹성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인간의 역사속에 있어왔고 인간 종의 유전자속에서 진화되어 온 요소라는 생각에 다시 유심히 읽게된다. 너 자신속의 짐승을 알라. 그리고 버려라, 그 욕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