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수다 - 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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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서 개인 칼럼을 쓰는 현직 기자의 책이다. 뜨문 뜨문 읽었던 신문에서의 글에서는 이토록 보수예찬론자인지 전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떳떳한 보수, 용기있는 보수가 되고자 스스로 활짝 독자의 심판대에 나섰다. 꺼먼 바탕에 큼직한 활자로 '나는 보수다'라는 서명이 찍힌 책을 마주하니 충격효과가 꽤 크다는 느낌인데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자칭 보수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장려할 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은 마치 이 저자의 생각이 진정 용기있는 보수인지 검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만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70년대의 교육현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천지 개벽이라고 할만한다. 진보진영쪽의 두 대통령이 집권한 10년의 세월을 거쳤기에 언제나 핍박받던 진보는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실세가 되었던 진보의 폐해도 심심찮게 거론될 수 있고 나름 참신한 사고의 보수진영의 발언도 기대할만 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답습의 힘은 의외로 커서 과거의 오류를 극복한 새로운 기운으로서의 진보나 보수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히 혁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에드워드 윌슨의 말 '우리는 구석기시대의 감정과 중세의 제도와 현대과학기술을 함께 가지고 있다'를 한국인 멘탈리티에 적용하고 이렇게 대입시킨다. '21세기 한국인은 조선시대의 자폐, 외곬의 마인드와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가지고있다.' 즉, 한국사회는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는 강력한 중심축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의 늪이 함께 존재하는 독특한 슈퍼밈을 가졌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갈등과 부조화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흑백, 선악의 진영을 나누는데 익숙하고 주류와 엘리트층과 언론 기업 정치의 기성체제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평등주의 정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구심력을 상쇄하는 수준으로 부정적, 소모적인 힘이 커질 경우 비극적인 한국 해체도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그의 지적이 적절한 시기의 적합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6, 7, 80년대를 풍미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항상 집권파의 정권유지에 최후의 무기이자 보루였던 것처럼 한국해체의 비극이 운운되는 경고의 수준자체가 보수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우려의 입장이 된다. 그는 한국 해체를 부채질하는 5가지 요인을 1. 현대사회를 성난 얼굴로 바라보는 역사허무주의, 2.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3. 이념분쟁, 4. 무교양주의와 반문화주의-지식인 사회의 급격한 붕괴, 5. 우리안의 근본주의 DNA 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순서로 언급한 다섯가지 요인은 책의 구성에서는 먼저 네번째 지식인사회의 붕괴가 이슈화되고 나머지 요인들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무엇보다 저자의 생각에는 이 네번째가 더 현실감각있게 다가오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리버럴 그룹의 지식인이 30년의 혁혁한 역사흐름을 통해 권력화했다고 보는 저자는 소외된 대중이라는 용어자체도 가차없이 처단한다. 그는 이마트나 대형백화점에서 강요된 선택때문에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는 사람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인용한 소외론 비판부분은 원 저서를 확인후 문맥적 의미를 파악한 후 인용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싶지만 어쨌든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허위의식만 조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조선조 사대부들의 돈과 재화에 대한 자기검열과 사회적 감시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조선조 사대부들의 이중적 의식이 또다른 허위의식을 가진 서구적 모델과 만나 특유의 분열증으로 증폭했다는 것이다. 유교의 비실용적 부분을 과대하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그의 말대로 절대순수를 내건 조선조 특유의 인문학을 지지하는 세력들만큼이나 전체의 눈을 상실한 판단이 아닐까. 조선조 때 관직에서 물러난 뒤 끼니걱정하면서 말년을 보낸 학자와 정승들의 삶이 그에게는 자칫 비아냥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면, 퇴임후 수많은 재산을 차명으로 빼돌려 50만원밖에 재산이 없다던 전직 대통령의 삶을 칭송하고자 하는 의도란 말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저자는 탈유교 반전통노선의 성취를 이룬 박정희정권의 개발연대에 이룩한 모더니즘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한복판에 있었던 시절의 문약전통이 세종대왕상을 동상뒤에 설치하는 사업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심지어 일본의 근대화가 메이지때 낡은 인문주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기존 해석을 강조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통부정의 배짱을 찬양하는 부분에 이르면 후쿠자와의 아시아 침략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우기 동북아 최고의 유교해체주의자로서 오규 쇼라이와 이토 진사이를 언급하며 순수한 통치술의 차원으로 유학에서 도덕과 윤리의 요소를 제거한 것에 칭찬으로 일관한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오규 쇼라이와 마루야마 마사오가 없다고 통탄한다. 현재 극우내지 보수적 역사입장의 틀을 제공했다고 할 마사오를 학계의 천황이라고 부르는 저자는 과연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저자, 너는 그냥 보수가 아니구나, '골수' 보수구나 하고 외친다. 마사오는 전후 일본의 황폐한 상황에 구심점을 제공한 인물로 일본인들에게 칭송될지는 모르나 그의 부드러운 듯 확고한 역사왜곡의 기반이 오늘날의 일본의 교육과 의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저자가 일본 사가와 사상가들의 저서를 통해 조선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읽었다면 이또한 식민사관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시사교양프로와 연예인 잡담프로가 산술적으로 똑같은 무게와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국면을 정보의 무중력이라고 한단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무중력에 문화 포퓰리즘이 가세해 하향평준화를 더욱 빠른 속도로 재촉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인터넷매체의 확산속에 대중문화의 속성에 대한 지식인그룹의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으로 물질은 항상 정신을 앞서 나아갔고 우리 세대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비단 한국병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며 전세계적인 관심과 집중의 대상이 아닐까. 그것은 인류의 21세기적 현상이고 어느 시대건 정신세계의 가벼움에 대한  기성세대의 우려는 있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진보, 보수의 특정 한 쪽의 잘못은 아니다.

 

조우석은 한국형 역사 허무주의를 일컬어 나만의 진리, 자페적 진리의 늪에 빠진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그마에 충실하고 색안경을 끼고 본 현대사라는 것이다. 역사 허무주의는 1948년 건국이후 대한민국역사를 정통성이 없다고 규정하거나 이후 개발연대의 성취를 애써 부인하려는 역사인식을 통칭한다고 말한다. 성공의 역사인 현대사에 눈감은채 분노와 원한을 반복하고 있는 진보지식인들의 멘탈리티와 한몸으로 돌아가는 지적태도이며 불행한 정서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채호의 육경을 불살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조선조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나라만들기 첫삽을 뜬 할아버지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자는데 힘을 준다. 그에 의하면 유교적 전통의 말살은 타당한 것이고 20세기 한국역사는 천지개벽이 된다. 기억공동체로서의 한국사회는 과연 근대화라는 하나의 잣대에 기초한 이러한 보수적 역사인식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만들기는 구심력을 강력하게 행사했다며 부러워 하고 미국의 68세대는 한국의 386세대와는 달리 포용과 순치의 힘을 발휘했다고 칭찬하기에 급급해서야 되겠는가? 일본과 미국처럼 역사변조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닮아가자는 말인가?

 

친일등의 과거사 청산이 소모적인 내출혈이라는 주장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지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지평을 위해 무한정 무작정 무조건 보듬을 수는 없다. 물론 청산 방법의 한계도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슈에는 도통 관심도 없다는 게 더 문제인 것같다. 아직은 소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거다. 백범이 건국과정에서 부정적 반대세력의 좌장이었다는 해석은 상당히 도발적이며, 아울러 민첩하고 발빠르고 현실적응에 우수한 자만이 역사상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보는 저자의 입장은 일본 만엔권에 후쿠자와의 초상이 그려져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반감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뽑는 정치인들에게 던진 설문에서 김구가 유일하게 많은 득표를 보여준다고해서 그의 현실 부적응 감각을 지적하는 것은 승자의 역사라는 냉혹한 승부사 이미지만 키워줄 뿐이다.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이 한국사회에 뿌리깊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철옹성같은 대기업의 영향력과 정치와의 연루관계라는 시각에서보면 계속 유지되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타당한 사고의 근거없이 형성된 반감은 문제일 수 있겠으나 독점 재벌과 대기업공화국의 면모에는 발전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감되고 있다. 또 저자가 제시하는 실사구시와 희생양찾기 게임의 종결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등주의의 늪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라는 말은 아직은 무리수다. 미국 유학생들중에서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며 등교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교수들로부터 대접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미국식 배금주의의 정석을 본 것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도 이런 미국을 무조건 닮자라는 건 과거의 한국역사를 내던지고 동양의, 동아시아의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버리자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

 

미국이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면서 전 세계의 경제가 기우뚱거리고 있다. 우리 증시도 무려 몇백포인트가 내려가면서 장회복의 가능성이 있나 없나 점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연 우리가 진보나 보수라고 생각하는 행동과 사고의 영역이 뿌리칠 수 없는 내 과거의 오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기반에 오류가 있다면 과감히 재배열하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제발 골수 00다라는 말은 안듣고 살아야겠다. 중용의 미덕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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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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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일차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고안된 내용이다. 이 책은 러셀이 독일과 전쟁상황이었던 당시에 사회재건의 법칙이라는 주제로 한 강연내용을 모은 것이다. 영국에서의 출판당시에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미국판에서 현재의 국내판 이름과 같은 제명을 얻었다. 사람은 왜 싸울까? 어찌보면 진화생물학의 서명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생물학적 , 심리학적 사회생물학적 토대위에서 풀어야 더 멋진 답이 나올 법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기존의 철학적 사고기반을 포기하고 전쟁이라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충동의 욕구라는 프로이드적인 분석을 원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절박한 노 철학자의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생물학적 시도 못지 않은 반성을 불러온다.  

100년 전 이야기지만 글의 살아있는 생동감은 현재의 어떤 인문서적을 능가한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적어도 경제적 측면의 패권에는 회의를 가지고 있는 지금과 달리) 확신을 보이는 태도는 그리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안인, 이를테면 출산과 양육을 위해 자신의 직장을 포기한 여성들에게 그에 못지 않은 급여를 지급하자는 의견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국가는 어떤 해로운 점과 이점이 있을까. 막연하게 교육을 통해 심어져온 애국심이란 이면에는 어떤 숨겨진 특징이 있을까. 독일인들이 왜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일까. 그들은 제국주의 대열에 뒤쳐졌다는 자격지심과 영국과 프랑스에대한 시샘때문에, 과도한 국가차원의 애국심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걸까. 기본적으로 충동과 욕구에 좌우되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함으로써 당시의 파괴적인 상황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러셀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희망은 훌륭한 삶이란 개인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 되기 위해선 인간의 삶과 무관해 보이는 목적, 비개인적이고 인간을 넘어서는 목적에 이바지해야한다고 그는 말한다. 신이나 진리, 아름다움같은 목적을 말한다.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은 인간의 실존속에서 영원한 어떤 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다툼과 실패와 뭉서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서운 힘으로부터 거리가 먼 삶이다. 속세의 다툼과 실패는 이런 영원한 세계와 접촉이 제공하는 정신력과 근본적인 평정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시절에 꼭 필요한 위로였고 오늘에도 별다른 가감없이 유효한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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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지에의 동방여행>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최정수 옮김, 한명식 감수 / 안그라픽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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쉔베르크의 12음기법으로 된 음악을 들었을때 도무지 이게 음악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고전과 낭만주의 음악이 너무나 좋아서, 아니 인상주의 드뷔시나 현대적 민속음악인 바르톡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쉔베르크는 아니다, 음악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쉔베르크의 피아노곡을 들었을 때도 구조가 보였고 음의 놀이감이 느껴졌고 그래서 좋아졌다. 단지 쉔베르크의 음악이 대중들의  음악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면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차가운 건축개념이 등장했을때 그것은 쉔베르크의 음렬음악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지지 않았을까... 쉔베르크의 음악이 전문가 음악이 된 반면에 당시 동시대의 건축가는 현대 건축의 정의를 새로 시작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의 토대를 만들어 버렸다. 르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조각가이자 시계세공업자의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를 둔 그는 자신의 조상들 중에서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취해 필명으로 썼다. 1887년 스위스 라 쇼 드 퐁에서 태어난 그는 1930년에 프랑스로 귀화한다. 책 말미에 실린 그의 연보는 드라마틱하고 정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철저한 삶을 살다간 한 놀라운 건축가를 연상시킨다. 이 건축가도 앳된 청년 시절이 있었을까 의아한 마음이 든다. 허나 이 책은 바로 젊은 시절의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었던 한 젊은이의 팔딱거리는 일기요 여행기록이었다. 

24세의 청년 샤를 에두아르 쟌느레의 여정은 베를린, 드레스덴, 프라하, 빈, 바츠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콘스탄티노플, 아토스, 아테네, 델포이, 브린디시, 나폴리, 로마, 피렌체, 루체른에 이르는 길이었다. 191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이다. 그는 여행중 라 쇼드 퐁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진정한 창조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아토스산에 올라 그는 오늘날의 건축가들이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시간에 쫓기는 날림작업을 한다고 탄식한다. 고대 건축의 규범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그는 그 곳에서 젊은 용기와 정직한 건축가가 되도록 하는 정당한 욕망을 얻었다고 술회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자산이 있어 가능할까. 세기의 건축가도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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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깊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파리는 깊다 - 한 컬처홀릭의 파리 문화예술 발굴기 깊은 여행 시리즈 1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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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의 손 로댕전이라고, 지난 방학동안 아이들과 서울 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1층의 중요전시관이 번잡하다고 입장권을 절취하자마자 2층으로 내몰린 우리 관람객은 작은 소품위주의 감상을 마치고나서 생각하는 사람이나 키스, 칼레의 시민중 몇몇 조각상등의 대형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파리 로댕미술관의 소장품들일 것이었다. 수년전에는 오르세 미술관 작품들이 서울전시를 갖기도 했다. 덕수궁내 현대미술관에서 고흐의 작품들을 흐믓하게 감상하고 기념으로 작품 씨디도 한장 구매하고 기념 스프링 수첩도 몇개 얻어서 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파리에  다시 가면 오르세에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파리는 확실히 문화유산의 보고다. 뿐아니라 노천카페의 천국일 터이고 미식가들의 본거지일 것이다. 비포선셋과 비포선라이즈라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나왔던 영화를 보고 파리의 거리들에 대한 애착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꼭 여행을 좋아하고 유럽의 도시들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파리는 누구에게나 로망의 도시다. 두말할 나위가 없다. 

파리는 깊다고 선언한 이 책은 '깊은 여행' 시리즈의 1탄이다. 컬쳐홀릭을 자처하는 저자는 파리를 수십번 방문한 이력을 가진 파리 애호가이다. 한두번 스쳐가는 과객이 아니라 골수 파리 팬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시선은 일시적 관광객과 다른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전반부에 주로 파리에 소재한 대표적 미술관(몽마르트를 포함해)들을 소개하고 후반부에는 책과 휴식과 강과 식당과 카페의 도시로서 파리를 조망했다. 이른바 파리 예술산책과 파리 도시산책이다. 나는 따분한 전반부를 일단 건너뛰고 좀더 가벼운 듯한 후반부를 먼저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돌아와 각종 화가들과 미술관 이야기를 듣고 저자의 간단한 경험담도 대했다.  자세히 보니 전반부도 그다지 깊은 내용은 아니었다. 

저자의 체험위주로 쓴 여행담이 될 것인지 한 도시 파헤치기와같은 전문 도시기행의 자료가 될 것인지 노선이 뚜렷했다면 더 낫지 않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문헌에서 인용했을 법한 내용과 파리에서의 체험들이 뒤섞여 하나로 잘 녹아나지 못한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때깔나고 감칠맛나는 문장들이 있어 술술 잘 익히는 글체도 아니다. 그래도 베르메르 부분이나 로댕미술관 얘기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싶기도했다. 저자의 파리사랑이 깊다는 것은 전해진다. 하지만 독자들이 파리를 깊게 느끼게 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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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사냥꾼>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과일 사냥꾼 - 유쾌한 과일주의자의 달콤한 지식여행
아담 리스 골너 지음, 김선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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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판을 만지기 전에 나는 후식으로 복숭아를 먹었다. 그저께 받은 복숭아 한 박스에는 다섯개가 상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영 입에도 못댈 정도로 뭉글러져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복숭아수확에 애를 먹었을 농가의 시름도 떠올리지만 택배도중 치었든 원래 문제가 있었든 상한 게 3분의 1이라면 못마땅해지는 건 당연하다. 오늘 복숭아말고 먹은 과일을 생각해보면 사과, 포도가 더 있다. 

과일을 둘러싸고 준비없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오늘 먹은 과일 정도 얘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과일을 주제로 한 글쓰기로 두꺼운 책 한권을 만들었다. 빌 브라이슨의 책을 개인적으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에 이 책도 기호에 맞는 책이라고 할 수 없었다. 끈기를 가지고 책의 마지막 장까지 갔건만 책이 왼쪽 바닥에 얼굴을 대고 뒤집어졌을 때도 머리속에 남아 떠오르는 내용이 없다. 딱히 책의 어떤 부분을 열고 한 단락을 읽어보지만 글은 단락이상으로 연결되는 접착제가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왠만한 과일 사랑이 아니라면 이렇게 중구난방의 진하고 게걸스런 수다를 늘어놓지 못할 것이다.  

컴퓨터 매킨토시가, 컴퓨터 회사 애플사가 왜 그런 이름을 달고 있고 그 회사의 로고가 한입 먹은 사과 모양인지 아마도 1777년 뉴욕출신의 존 매킨토시때문이 아닐까. 미국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인 모양이다. 그는 돌리 어윈이라는 영국 왕당파집안의 딸을 사모해 그녀가 가족과 건너간 캐나다까지 쫓아가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죽은 돌리의 썩은 시신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다 온타리오의 한 지역에 정착했다. 그가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발견한 스무그루의 사과나무중 단 한그루만 살아남았지만 나무는 멋지게 열매를 맺고 그는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 다른 나무에 접붙이기를 했다. 이렇게 태어나 20세기초에 널리 보급된 품종이 매킨토시 사과였다. 왜 매킨토시고, 애플이고 로고가 그 모양이었는지 ......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은 굉장히 점잖은 책이었다. 그 책에는 사과, 감자, 대마초, 튜울립의 몰랐던 놀라운 사실들이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더불어 소개되고 있었다. 그 책은 식물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와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은 획기적인 책이었다. 책은 이렇게 말했다. 정원의 식물들이 우리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용해 종족 번식을 하고 있다고. 주객전도의 자연의 신비를 가르쳐주었다. 반면에 이 책은 시시콜콜한 과일탐험에 얽힌 사적 이야기와 함께 과일관련해 온갖 문헌의 지식을 열거해 놓았다. 그런데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꾸 'so what?'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윤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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