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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다 - 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
조우석 지음 / 동아시아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중앙일보에서 개인 칼럼을 쓰는 현직 기자의 책이다. 뜨문 뜨문 읽었던 신문에서의 글에서는 이토록 보수예찬론자인지 전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떳떳한 보수, 용기있는 보수가 되고자 스스로 활짝 독자의 심판대에 나섰다. 꺼먼 바탕에 큼직한 활자로 '나는 보수다'라는 서명이 찍힌 책을 마주하니 충격효과가 꽤 크다는 느낌인데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자칭 보수라고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장려할 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은 마치 이 저자의 생각이 진정 용기있는 보수인지 검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만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70년대의 교육현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천지 개벽이라고 할만한다. 진보진영쪽의 두 대통령이 집권한 10년의 세월을 거쳤기에 언제나 핍박받던 진보는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실세가 되었던 진보의 폐해도 심심찮게 거론될 수 있고 나름 참신한 사고의 보수진영의 발언도 기대할만 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답습의 힘은 의외로 커서 과거의 오류를 극복한 새로운 기운으로서의 진보나 보수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히 혁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에드워드 윌슨의 말 '우리는 구석기시대의 감정과 중세의 제도와 현대과학기술을 함께 가지고 있다'를 한국인 멘탈리티에 적용하고 이렇게 대입시킨다. '21세기 한국인은 조선시대의 자폐, 외곬의 마인드와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가지고있다.' 즉, 한국사회는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는 강력한 중심축이지만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의 늪이 함께 존재하는 독특한 슈퍼밈을 가졌기 때문에 종종 심각한 갈등과 부조화를 빚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흑백, 선악의 진영을 나누는데 익숙하고 주류와 엘리트층과 언론 기업 정치의 기성체제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평등주의 정서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구심력을 상쇄하는 수준으로 부정적, 소모적인 힘이 커질 경우 비극적인 한국 해체도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그의 지적이 적절한 시기의 적합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6, 7, 80년대를 풍미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항상 집권파의 정권유지에 최후의 무기이자 보루였던 것처럼 한국해체의 비극이 운운되는 경고의 수준자체가 보수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우려의 입장이 된다. 그는 한국 해체를 부채질하는 5가지 요인을 1. 현대사회를 성난 얼굴로 바라보는 역사허무주의, 2.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3. 이념분쟁, 4. 무교양주의와 반문화주의-지식인 사회의 급격한 붕괴, 5. 우리안의 근본주의 DNA 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순서로 언급한 다섯가지 요인은 책의 구성에서는 먼저 네번째 지식인사회의 붕괴가 이슈화되고 나머지 요인들이 순서대로 나오는데 무엇보다 저자의 생각에는 이 네번째가 더 현실감각있게 다가오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리버럴 그룹의 지식인이 30년의 혁혁한 역사흐름을 통해 권력화했다고 보는 저자는 소외된 대중이라는 용어자체도 가차없이 처단한다. 그는 이마트나 대형백화점에서 강요된 선택때문에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는 사람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인용한 소외론 비판부분은 원 저서를 확인후 문맥적 의미를 파악한 후 인용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싶지만 어쨌든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허위의식만 조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조선조 사대부들의 돈과 재화에 대한 자기검열과 사회적 감시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조선조 사대부들의 이중적 의식이 또다른 허위의식을 가진 서구적 모델과 만나 특유의 분열증으로 증폭했다는 것이다. 유교의 비실용적 부분을 과대하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그의 말대로 절대순수를 내건 조선조 특유의 인문학을 지지하는 세력들만큼이나 전체의 눈을 상실한 판단이 아닐까. 조선조 때 관직에서 물러난 뒤 끼니걱정하면서 말년을 보낸 학자와 정승들의 삶이 그에게는 자칫 비아냥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면, 퇴임후 수많은 재산을 차명으로 빼돌려 50만원밖에 재산이 없다던 전직 대통령의 삶을 칭송하고자 하는 의도란 말인지 참으로 알 수 없다.
저자는 탈유교 반전통노선의 성취를 이룬 박정희정권의 개발연대에 이룩한 모더니즘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한복판에 있었던 시절의 문약전통이 세종대왕상을 동상뒤에 설치하는 사업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심지어 일본의 근대화가 메이지때 낡은 인문주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기존 해석을 강조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통부정의 배짱을 찬양하는 부분에 이르면 후쿠자와의 아시아 침략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우기 동북아 최고의 유교해체주의자로서 오규 쇼라이와 이토 진사이를 언급하며 순수한 통치술의 차원으로 유학에서 도덕과 윤리의 요소를 제거한 것에 칭찬으로 일관한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오규 쇼라이와 마루야마 마사오가 없다고 통탄한다. 현재 극우내지 보수적 역사입장의 틀을 제공했다고 할 마사오를 학계의 천황이라고 부르는 저자는 과연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저자, 너는 그냥 보수가 아니구나, '골수' 보수구나 하고 외친다. 마사오는 전후 일본의 황폐한 상황에 구심점을 제공한 인물로 일본인들에게 칭송될지는 모르나 그의 부드러운 듯 확고한 역사왜곡의 기반이 오늘날의 일본의 교육과 의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저자가 일본 사가와 사상가들의 저서를 통해 조선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읽었다면 이또한 식민사관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시사교양프로와 연예인 잡담프로가 산술적으로 똑같은 무게와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국면을 정보의 무중력이라고 한단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무중력에 문화 포퓰리즘이 가세해 하향평준화를 더욱 빠른 속도로 재촉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인터넷매체의 확산속에 대중문화의 속성에 대한 지식인그룹의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으로 물질은 항상 정신을 앞서 나아갔고 우리 세대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비단 한국병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며 전세계적인 관심과 집중의 대상이 아닐까. 그것은 인류의 21세기적 현상이고 어느 시대건 정신세계의 가벼움에 대한 기성세대의 우려는 있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진보, 보수의 특정 한 쪽의 잘못은 아니다.
조우석은 한국형 역사 허무주의를 일컬어 나만의 진리, 자페적 진리의 늪에 빠진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그마에 충실하고 색안경을 끼고 본 현대사라는 것이다. 역사 허무주의는 1948년 건국이후 대한민국역사를 정통성이 없다고 규정하거나 이후 개발연대의 성취를 애써 부인하려는 역사인식을 통칭한다고 말한다. 성공의 역사인 현대사에 눈감은채 분노와 원한을 반복하고 있는 진보지식인들의 멘탈리티와 한몸으로 돌아가는 지적태도이며 불행한 정서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채호의 육경을 불살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조선조 유학자들의 이중의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나라만들기 첫삽을 뜬 할아버지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자는데 힘을 준다. 그에 의하면 유교적 전통의 말살은 타당한 것이고 20세기 한국역사는 천지개벽이 된다. 기억공동체로서의 한국사회는 과연 근대화라는 하나의 잣대에 기초한 이러한 보수적 역사인식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만들기는 구심력을 강력하게 행사했다며 부러워 하고 미국의 68세대는 한국의 386세대와는 달리 포용과 순치의 힘을 발휘했다고 칭찬하기에 급급해서야 되겠는가? 일본과 미국처럼 역사변조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닮아가자는 말인가?
친일등의 과거사 청산이 소모적인 내출혈이라는 주장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지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지평을 위해 무한정 무작정 무조건 보듬을 수는 없다. 물론 청산 방법의 한계도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슈에는 도통 관심도 없다는 게 더 문제인 것같다. 아직은 소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거다. 백범이 건국과정에서 부정적 반대세력의 좌장이었다는 해석은 상당히 도발적이며, 아울러 민첩하고 발빠르고 현실적응에 우수한 자만이 역사상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보는 저자의 입장은 일본 만엔권에 후쿠자와의 초상이 그려져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반감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뽑는 정치인들에게 던진 설문에서 김구가 유일하게 많은 득표를 보여준다고해서 그의 현실 부적응 감각을 지적하는 것은 승자의 역사라는 냉혹한 승부사 이미지만 키워줄 뿐이다.
반기업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이 한국사회에 뿌리깊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철옹성같은 대기업의 영향력과 정치와의 연루관계라는 시각에서보면 계속 유지되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타당한 사고의 근거없이 형성된 반감은 문제일 수 있겠으나 독점 재벌과 대기업공화국의 면모에는 발전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감되고 있다. 또 저자가 제시하는 실사구시와 희생양찾기 게임의 종결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나, 평등주의의 늪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라는 말은 아직은 무리수다. 미국 유학생들중에서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며 등교하는 사람은 친구들과 교수들로부터 대접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미국식 배금주의의 정석을 본 것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도 이런 미국을 무조건 닮자라는 건 과거의 한국역사를 내던지고 동양의, 동아시아의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을 버리자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본다.
미국이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되면서 전 세계의 경제가 기우뚱거리고 있다. 우리 증시도 무려 몇백포인트가 내려가면서 장회복의 가능성이 있나 없나 점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연 우리가 진보나 보수라고 생각하는 행동과 사고의 영역이 뿌리칠 수 없는 내 과거의 오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기반에 오류가 있다면 과감히 재배열하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제발 골수 00다라는 말은 안듣고 살아야겠다. 중용의 미덕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