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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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팔묘촌>이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중 ‘빅5’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팔묘촌>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린 한 남자의 모험담입니다.

또 기대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 작품이 탐정소설 특유의 트릭입니다. 실현 불가능한 완전범죄나 용의자의 완벽한 알리바이 따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인 <혼징가 살인사건>에서 보았던 밀실 살인사건같은 굉장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독약을 먹은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연쇄살인사건일 뿐이에요. 당연히 탐정소설다운 논리적 수사가 주는 재미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팔묘촌>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공포소설 뺨치는 설정과 서스펜스 때문입니다. 380백년전 패주한 무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몰살당합니다. 무사들이 가지고 있던 황금을 빼앗기 위해서죠. 그런데 황금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350여년이 흐른 후 마을에서는 하룻밤에 30명이 사살 당하는 참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자취를 감추죠. 다시 26년이 흐른 후 자취를 감춘 범인의 아들이 마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마을사람들은 아들을 의심하고 동시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설정이에요. 마을을 둘러싼 기괴한 역사, 과거 참사, 현재의 연쇄살인이 얽히면서 공포를 더해가죠. 주인공의 주변인물이 픽픽 죽어갈 때마다 서스펜스도 적절히 유지되는데, 아마도 요코미조 세이시의 전략은 논리적 추리가 아닌 공포였던 것 같습니다.

탐정소설이나 공포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긴장감(혹은 공포감)을 유발시키는 서스펜스적 요소와 논리적 사건 추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 합니다. 특히나 이야기의 주체가 사건을 수사하는 탐정이 되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고요.

예를 들면 공포 서스펜스물의 걸작인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역시 탐정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탐정은 늘 용의자를 머릿속에 담고 있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살인사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심리가 발현된 공포가 끼어들기는 힘들죠. 자연히 이야기의 주체는 피해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죠. 이쯤 되면 왜 긴다이치 고스케가 미미하게 등장하냐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팔묘촌>은 독자에게 공포를 안겨주려고 쓰인 작품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팔묘촌>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아주 흡사한 구성(컨셉?)을 가지고 있군요.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불과 세 작품을 읽었을 뿐입니다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팔묘촌>같은 변종 탐정소설보다 본격 탐정소설을 더 잘 쓰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인물의 심리묘사는 단선적이기 그지없는데 이마저도 중언부언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끌어내기는 역부족이었어요. 아무리 출중한 ‘공포 소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요. 생각해보면 일본 특유의 문화적 특징이 드러난 본격 탐정소설이었던 <혼징가 살인사건>이 훨씬 간명하고 재미있 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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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10-03-04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zydevil님 리뷰는 역시 최고에요~
스포일러 누설없이 저 정도로 잘 분석해 내시다니...감탄할 따름입니다.
전 <팔묘촌>, <옥문도>읽었는데, 다 별로였어요ㅋㅋㅋ

lazydevil 2010-03-05 02:07   좋아요 0 | URL
우아~~~ 쥬베이님 격하게 반갑다는 말밖에!!!!!!!!!

Forgettable. 2010-03-0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저는 팔묘촌도 나름대로 재밌게 읽었어요. 리뷰도 쓴줄 알았는데 안썼네요. ㅋㅋ
뭔가 모험담이랄까.. 추리보다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더라구요.

전 요코미조세이시 참 좋아하는데. 왜인지 옛날 느낌이 참 좋더라구요 ㅋㅋ 얼마 전에 나왔던 악마가 피리 어쩌고는 진짜 별로였지만;;

여튼 [혼징가 살인사건]을 아직도!!! 못봤는데, 얼른 봐야겠어요.

lazydevil 2010-03-05 02:06   좋아요 0 | URL
저도 일본 특유의 옛날 느낌은 참 좋았어요. 부러울 정도로 일본적인 것을 장르물에 잘 드러내는 작가인 거 같아요^^ 그니까 대가겠죠.
 

 

 

 

 

 

 

 

 

 

우익청년의 탄생기를 그린 <구월의 이틀>를 읽는 내내 갈팡질팡했습니다. 작가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독자의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건강한 우익 보수청년의 탄생기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은이 우익 보수청년이 되는 과정은 그다지 건강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것일까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이 작품에는 우익 보수세력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곳곳에 깔려있습니다. 냉소와 조롱 속에는 후련한 까발림도 있었지만 실패한 좌파 진보세력의 찌질함도 느껴집니다. 전자가 작가의 분명한 의도로 드러난 대목이라면, 후자는 현재 참혹한 패배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일 겁니다.

말할 것도 없이 <구월의 이틀>은 정치소설입니다만 그 형태가 조금 독특합니다. 장정일식 성장소설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이런 성장소설의 장치는 실제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십을 눈앞에 둔 작가가 요즘 세대의 청춘을 바라보며, 또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며 그려낸 소묘가 흥미롭거든요. 작가는 두 주인공 ‘금’과 ‘은’에게 때론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딱한 사촌형처럼 일탈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작가의 이런 양면적인 태도가 전체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자신을 감추고 중용을 견지하려는 어정쩡한 태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역시 두 주인공이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을 맺습니다. 이전까지 금과 은(두 주인공의 이름), 이성애와 동성애, 좌익과 우익, 전라도와 경상도, 문학과 정치 등 내내 대립적인 구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거든요.(이들이 서로 흘레붙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연 독자에게 선택권을 떠넘긴 후 마무리한 인상이 역력해 당혹스럽습니다.

<구월의 이틀>은 장정일 소설답습니다. 장정일은 탁월한 이야기꾼은 아닙니다. 하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시적 상징이 돋보이는 에피소드를 작품 속에 적절히 삽입하여 독자들의 즐거움을 줍니다. 문장은 전반적으로 투박하고 건조합니다. 섬세하거나 유려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그런데 그런 투박함과 건조함이 오히려 시적 이미지와 충돌하며 독특한 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야기의 토대가 충분히 정치적이니 좀더 성장소설에 치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에 주인공 금와 은은 너무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습니다. 정치의식이 진공상태나 다름없는 대다수의 요즘 젊은이들을 일깨우기에는 두 주인공은 80년대를 살아가던 386세대와 닮아있습니다. 오히려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 ‘아담’보다 늙수그레한 느낌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목표가 우익 청년의 탄생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전형화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요.

<구월의 이틀>에는 젊은이들이, 아니 꼭 젊은이가 아니라도 생각해봄직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만, 쉽게 공감하기 힘든 인물들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소설이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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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3-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빌님, 이런 글 자주 써주셔요. 뒤에 영화 이야기도 재밌더라구요^^
데빌님의 서평도 굿이지만 영화평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ㅎㅎ

lazydevil 2010-03-03 1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영화는... 요즘 극장엘 자주 못가요ㅜㅡ 맘먹고 가면 딱히 땅기는 영화는 사라져 버리고요.
암튼 뭉클님 즐봄하세요^^
 
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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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향하다>는 매튜 스커더가 나오는 1992년 작품입니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과 무려 10년의 시차가 있는 작품이죠. 그런데 젠장...!! <800만 가지...> 이후 매튜 스커더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힘없는 독자들은 그냥 닥치고 고맙게 생각하며 읽어야죠. 똑같이 밀리언셀러 클럽이라는 딱지를 달고 출간되었는데 책마다 이름을 ‘매트’에서 ‘매튜’로 바꾸건 말건 말이죠. ‘매트’가 ‘매튜’의 애칭이다 어쩐다는 설명 따위는 기대도 안합니다.그냥 감사할 따름이죠.(참고로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1>에서는 ‘스커더’를 ‘스쿠더’로 성고문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매튜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고, 전작에 잠시 등장한 일레인이 여자친구가 되었군요.

<800만 가지>는 워낙 강렬했습니다. 알콜 중독자이자 무면허 탐정인 매튜 스커더라는 인상적인 캐릭터가 쏟아내는 고독과 자책감은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끔찍한 상황과 어우러져 절망의 끝이 무엇인지 혹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눈물짓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다가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나네요. 연쇄살인마를 쫓는 탐정이 질질 짜고 그러거든요. 로렌스 블록의 최고 작품일 것이 분명한 <800만 가지>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다른 작품이 고파지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본작의 문제가 아니라 전작 때문이죠. 시속 160km의 불같은 광속구를 보고 난 후 시속 149km 짜리 직구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그런 경우죠.

여러모로 <800만 가지>에서 볼 수 있었던 로렌스 블록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 사이사이에 속도감 넘치는 대화가 적절히 삽입되죠. 황소걸음으로 사건을 추적하는 매튜 스커더의 뚝심도 그렇구요. 의뢰인이자 파트너로 등장하는 범죄자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도요. 매튜를 돕는 뒷골목 출신의 흥미로운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800만 가지>보다 밋밋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평범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과 다른 건, 당연히 로렌스 블록의 작가적 역량이겠지만, 작품 곳곳에 감정적인 트임이 존재합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매튜와 일레인의 대화가 대표적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너무나 기쁜 나머지 독자인 제가 구원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매튜와 일레인의 관계 속에서 삶은 희망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인물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네 평범한 삶에 고스란히 적용되는 보편적인 희망의 원리 말입니다. 좀 거창하죠? 다른 하나는 역시 매튜 스커더 시리즈는 평범한 탐정소설과는 다르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역시 매튜 스커더에게는 알싸한 맛이 있어요.

<800만 가지>를 휙휙 다시 넘겨보며 생각해보니, 매튜 스커더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순서를 뒤바꿔 <무덤으로 향하다>를 읽고 난 다음 <800만 가지>를 읽어도 되겠다는 싶더군요. 알콜 중독자 매튜 스커더의 필사적인 생존기만 놓고 보면 오히려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저처럼 149km짜리 직구가 밋밋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거고요. 암튼 또 다른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기대해봅니다. 그 이름이 ‘매트’든 ‘매튜’든 ‘스커더’든 ‘스쿠더’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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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2-1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즐기며 읽으시는 게 팍팍 느껴지네요. 저는 아직 그리 자유롭지 못한 단계인 거 같아요. 아직은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에 손이 가거든요.(공부하는 느낌?) 이 단계가 어느정도 끝나면, 님과 같이 자유롭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즐길 수' 있게 되겠죠?ㅎㅎ

lazydevil 2010-02-18 13:08   좋아요 0 | URL
게으른 나머지 공부를 등안시하는 책읽기 모드로 빠진거죠^^;; 저는 공부하는 책읽기에 열심이신 뭉클님이 부러워요~~^
 
39계단
존 버컨 지음, 정윤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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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설가 이승우가 쓴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긴장은 속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극적 긴장을 보여주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슬로비디오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들을 생각해보라. 빠른 전개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니크한 전개여야 한다. 구체는 속도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구체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날짜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시간 단위로, 시간 단위로 흐는던 시간을 분단위로 바꾸는 것이다. 단위가 바뀔 뿐,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소설이 구체적이어서가 아니라 감추기와 보여주기의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로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마침 존 버컨의 책 <39계단>을 읽고 있었기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기대와 달리 <39계단>은 심심한 작품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작가협회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스릴러 70선'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이는 작품의 무게가 아니라 작품이 선점한 역사적 위치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승우의 주장대로라면 <39계단>은 빠른 전개에만 충실한 작품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세월의 흐름 때문에 유니크한 전개는 퇴색되었고, 구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감추기와 보여주기의 전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역력합니다. 그러니 요즘 독자들에게는 심심하기 그지없는 작품으로 읽힐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얄팍한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읽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했다는 거죠.

원작만큼이나 고색창연한 히치콕의 영화 <39계단>이 오히려 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각색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승우가 지적한 ‘구체’의 문제입니다. 영상으로 구체화된 상황이 관객의 긴장감을 자극한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복하면 역시 스릴러의 목표는 속도가 아니라 긴장인 것이죠. 히치콕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스릴러의 천재고요.

작품을 떠나 출간된 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봅니다. 양장본으로 출간된 이 책의 가격은 1만원입니다. 페이지당 20행이 인쇄되었고, 본문은 228페이지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비쌉니다. 굳이 국내출판 저작권을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작품에 대한 만족도나 표지 디자인까지 들먹이며 책값이 비싸다니 어쩌니 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명 만화가인 이우일이 그린 표지 그림이 작품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요. 다만 같은 판형에 같은 행수, 본문 326페이지, 상당금액의 저작권료까지 지불한 코맥 매카시의 <로드>가 1만1천원인 걸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39계단>의 책값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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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2-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9계단이 다시 나왔네요.lazydevil님 말처럼 이 작품은 작품의 무게가 아니라 작품이 선점한 역사적 위치및 히치콕의 영화덕분에 더 유명한 것이 사실이지요.
그나저나 가격이 200페이지 남짓인데 만원은 좀 너무 심하군요.개인적으로 얼마안되는 페이지를 양장본으로 하고 가격을 올리는 형태는 좀 거시기 합니다 ㅡ.ㅜ

lazydevil 2010-02-05 23:2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썩 재밌게 읽은 작품이 아닌 지라... 본전 생각이 조금 나더군요.ㅎㅎ

느린산책 2010-02-0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글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면서도 예리하네요.
제가 딱 좋아하는 글 스따일~ 입니당.
ㅎㅎ 제가 또 직업병이 도졌네여^^

lazydevil 2010-02-05 23:30   좋아요 0 | URL
뭉클님,국어샘이신 듯ㅎㅎ 학생들은 좋겠네요. 책을 사랑하는 진짜 국어샘에게 수업을 받으니까요^^
 
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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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코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독자는 아니다. 그런데 종종 그와 비슷하게 한 작가의 작품을 거의 대부분, 그것도 거의 발표 순서대로, 그것도 꽤 오랜 세월에 걸쳐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작가를 처음 만난 때와 최근 작품을 읽은 것의 시차가 십 수 년 이상 된다면 각 작품에 대한 기억은 망각의 힘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더러 두 번 이상 읽은 작품도 있고, 물론 그런 작품은 예외지만)

이 경우 그 작가의 작품들은 희미한 기억으로 재구성된 추상화처럼 변한다. 각 작품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의 겪은 에피소드들이 서로 뒤엉켜 비슷비슷한 옷으로 바꿔 입는 것이다. 마치 등번호만 다를 뿐 작가의 이름 새겨진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야구팀 선수들처럼 말이다. 기억만으로는 구분 불가. 적어도 그가 뛰었던 경기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복기해 보아야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폴 오스터는 내게 이런 지경에 이른 작가다. 꽤 오랫동안 여러 작품(거의 대부분)을 읽었다. 무척 좋았던 작품도 있었고, 단지 재미있어서 읽었던 작품도 있었고, 시큰둥하게 읽었던 작품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각각의 작품들이 지닌 서열이나 변별력이 사라지고 폴 오스터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폴 오스터가 쓴 작품이었지?! 이렇게 말이다.

<어둠 속의 남자>는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고들 하지만, 내겐 역시 폴 오스터의 작품일 뿐이다. 분명히 다른 구석들이 있지만 읽다보면 작가의 인장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표현을 달리할 뿐 폴 오스터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라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이 쉴 새 없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둠 속의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브루클린 풍자극>이고, <환상의 책>이며, <우연의 음악>이자 <거대한 괴물>이다. 아 그 시작은 <뉴욕 삼부작>이었던가?

그렇다고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이전 작품에서 징후만 엿보이던 요소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적인 설정, 부조리극같은 대화, 글쓰기에 대한 고민 등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풍이 변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작풍의 변화가 아니다. 바로 ‘늙은 작가’의 모습이다. 이 점이 슬프다.

누구는 ‘원숙함’이라는 표현으로 작가의 늙음을 달리 이야기하지만 그닥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이제 노작가가 된 폴 오스터의 원숙함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주었다. 의욕만 앞섰던 작품인 <동행>을 제외하고 작가의 원숙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작품이 있었던가? 폴 오스터는 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조숙한 글솜씨를 뽐내는 작가였다. 반면 작품의 주인공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치기 어린 행동을 하는 아웃사이더(혹은 루저)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원숙한 이야기 솜씨가 미성숙한 인물들을 그려는 기묘한 충돌이 폴 오스터의 작품의 매력(혹은 한계?)이었다. 그런데 <어둠 속의 남자>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냥 사는 것이 힘에 부치는 늙은이의 모습이고, 그를 그려내는 작가의 목소리 역시 지치고 힘겹게 느껴진다. 더욱 안타까운 건 작가의 목소리가 자조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어둠 속의 남자>를 읽으니 예전의 폴 오스터가 그립기는 하다. 하지만 노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회춘이 아니다. 두터운 삶의 경험이 주는 지혜가 담긴 진짜 노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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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1-2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오스터 작품은 십삼년 전 문팰리스를 읽은 게 유일합니다. 책 앞장을 펴보니 '가족이란 운명공동체'라는 메모가 적혀있군여.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머리가 안 좋아요) 뭔가 안갯 속을 헤매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 같아여 ㅎㅎ

lazydevil 2010-01-28 13:44   좋아요 0 | URL
에궁~, 저도 그 즈음 그 책으로 시작했어요!^^ 요즘은 <달의 궁전>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왔죠? 전 머리도 나쁜 주제에 메모조차 안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