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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계단
존 버컨 지음, 정윤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소설가 이승우가 쓴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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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은 속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극적 긴장을 보여주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슬로비디오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들을 생각해보라. 빠른 전개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니크한 전개여야 한다. 구체는 속도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구체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날짜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시간 단위로, 시간 단위로 흐는던 시간을 분단위로 바꾸는 것이다. 단위가 바뀔 뿐,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소설이 구체적이어서가 아니라 감추기와 보여주기의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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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마침 존 버컨의 책 <39계단>을 읽고 있었기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기대와 달리 <39계단>은 심심한 작품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작가협회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스릴러 70선'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이는 작품의 무게가 아니라 작품이 선점한 역사적 위치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승우의 주장대로라면 <39계단>은 빠른 전개에만 충실한 작품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세월의 흐름 때문에 유니크한 전개는 퇴색되었고, 구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감추기와 보여주기의 전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역력합니다. 그러니 요즘 독자들에게는 심심하기 그지없는 작품으로 읽힐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얄팍한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읽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했다는 거죠.
원작만큼이나 고색창연한 히치콕의 영화 <39계단>이 오히려 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각색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승우가 지적한 ‘구체’의 문제입니다. 영상으로 구체화된 상황이 관객의 긴장감을 자극한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복하면 역시 스릴러의 목표는 속도가 아니라 긴장인 것이죠. 히치콕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스릴러의 천재고요.
작품을 떠나 출간된 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봅니다. 양장본으로 출간된 이 책의 가격은 1만원입니다. 페이지당 20행이 인쇄되었고, 본문은 228페이지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비쌉니다. 굳이 국내출판 저작권을 확보하지 않아도 되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작품에 대한 만족도나 표지 디자인까지 들먹이며 책값이 비싸다니 어쩌니 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명 만화가인 이우일이 그린 표지 그림이 작품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요. 다만 같은 판형에 같은 행수, 본문 326페이지, 상당금액의 저작권료까지 지불한 코맥 매카시의 <로드>가 1만1천원인 걸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39계단>의 책값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