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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결코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독자는 아니다. 그런데 종종 그와 비슷하게 한 작가의 작품을 거의 대부분, 그것도 거의 발표 순서대로, 그것도 꽤 오랜 세월에 걸쳐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작가를 처음 만난 때와 최근 작품을 읽은 것의 시차가 십 수 년 이상 된다면 각 작품에 대한 기억은 망각의 힘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더러 두 번 이상 읽은 작품도 있고, 물론 그런 작품은 예외지만)
이 경우 그 작가의 작품들은 희미한 기억으로 재구성된 추상화처럼 변한다. 각 작품에 등장한 인물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의 겪은 에피소드들이 서로 뒤엉켜 비슷비슷한 옷으로 바꿔 입는 것이다. 마치 등번호만 다를 뿐 작가의 이름 새겨진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야구팀 선수들처럼 말이다. 기억만으로는 구분 불가. 적어도 그가 뛰었던 경기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복기해 보아야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폴 오스터는 내게 이런 지경에 이른 작가다. 꽤 오랫동안 여러 작품(거의 대부분)을 읽었다. 무척 좋았던 작품도 있었고, 단지 재미있어서 읽었던 작품도 있었고, 시큰둥하게 읽었던 작품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각각의 작품들이 지닌 서열이나 변별력이 사라지고 폴 오스터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폴 오스터가 쓴 작품이었지?! 이렇게 말이다.
<어둠 속의 남자>는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고들 하지만, 내겐 역시 폴 오스터의 작품일 뿐이다. 분명히 다른 구석들이 있지만 읽다보면 작가의 인장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표현을 달리할 뿐 폴 오스터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라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이 쉴 새 없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둠 속의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브루클린 풍자극>이고, <환상의 책>이며, <우연의 음악>이자 <거대한 괴물>이다. 아 그 시작은 <뉴욕 삼부작>이었던가?
그렇다고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이전 작품에서 징후만 엿보이던 요소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적인 설정, 부조리극같은 대화, 글쓰기에 대한 고민 등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풍이 변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작풍의 변화가 아니다. 바로 ‘늙은 작가’의 모습이다. 이 점이 슬프다.
누구는 ‘원숙함’이라는 표현으로 작가의 늙음을 달리 이야기하지만 그닥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이제 노작가가 된 폴 오스터의 원숙함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주었다. 의욕만 앞섰던 작품인 <동행>을 제외하고 작가의 원숙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작품이 있었던가? 폴 오스터는 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조숙한 글솜씨를 뽐내는 작가였다. 반면 작품의 주인공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치기 어린 행동을 하는 아웃사이더(혹은 루저)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원숙한 이야기 솜씨가 미성숙한 인물들을 그려는 기묘한 충돌이 폴 오스터의 작품의 매력(혹은 한계?)이었다. 그런데 <어둠 속의 남자>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냥 사는 것이 힘에 부치는 늙은이의 모습이고, 그를 그려내는 작가의 목소리 역시 지치고 힘겹게 느껴진다. 더욱 안타까운 건 작가의 목소리가 자조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어둠 속의 남자>를 읽으니 예전의 폴 오스터가 그립기는 하다. 하지만 노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회춘이 아니다. 두터운 삶의 경험이 주는 지혜가 담긴 진짜 노인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