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청년의 탄생기를 그린 <구월의 이틀>를 읽는 내내 갈팡질팡했습니다. 작가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독자의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건강한 우익 보수청년의 탄생기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은이 우익 보수청년이 되는 과정은 그다지 건강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것일까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이 작품에는 우익 보수세력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곳곳에 깔려있습니다. 냉소와 조롱 속에는 후련한 까발림도 있었지만 실패한 좌파 진보세력의 찌질함도 느껴집니다. 전자가 작가의 분명한 의도로 드러난 대목이라면, 후자는 현재 참혹한 패배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일 겁니다.
말할 것도 없이 <구월의 이틀>은 정치소설입니다만 그 형태가 조금 독특합니다. 장정일식 성장소설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이런 성장소설의 장치는 실제로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십을 눈앞에 둔 작가가 요즘 세대의 청춘을 바라보며, 또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며 그려낸 소묘가 흥미롭거든요. 작가는 두 주인공 ‘금’과 ‘은’에게 때론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딱한 사촌형처럼 일탈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작가의 이런 양면적인 태도가 전체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자신을 감추고 중용을 견지하려는 어정쩡한 태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 역시 두 주인공이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을 맺습니다. 이전까지 금과 은(두 주인공의 이름), 이성애와 동성애, 좌익과 우익, 전라도와 경상도, 문학과 정치 등 내내 대립적인 구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거든요.(이들이 서로 흘레붙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연 독자에게 선택권을 떠넘긴 후 마무리한 인상이 역력해 당혹스럽습니다.
<구월의 이틀>은 장정일 소설답습니다. 장정일은 탁월한 이야기꾼은 아닙니다. 하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시적 상징이 돋보이는 에피소드를 작품 속에 적절히 삽입하여 독자들의 즐거움을 줍니다. 문장은 전반적으로 투박하고 건조합니다. 섬세하거나 유려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그런데 그런 투박함과 건조함이 오히려 시적 이미지와 충돌하며 독특한 효과를 내는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야기의 토대가 충분히 정치적이니 좀더 성장소설에 치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에 주인공 금와 은은 너무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습니다. 정치의식이 진공상태나 다름없는 대다수의 요즘 젊은이들을 일깨우기에는 두 주인공은 80년대를 살아가던 386세대와 닮아있습니다. 오히려 <아담이 눈뜰 때>의 주인공 ‘아담’보다 늙수그레한 느낌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목표가 우익 청년의 탄생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전형화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요.
<구월의 이틀>에는 젊은이들이, 아니 꼭 젊은이가 아니라도 생각해봄직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만, 쉽게 공감하기 힘든 인물들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소설이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