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의 건축여행
승효상 지음 / 안그라픽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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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삶이다.
부엌을 어디에 놓느냐, 거실의 위치나 크기는, 창문의 높이는 등등 건축의 양식에 따라 우리네 삶을 달라진다.

삶이 없는 외관상의 멋은 건축이 아니다.
진정한 건축을 보려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달동네'는 좋은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달동네 골목 또는 작은 공터는 아이들의 정겨운 웃음 소리로 채워졌다가도 어느 순간에 동네 아줌마들의 바쁜 일손에 서두름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런 중에 가까운 곳 어디선가 할아버지들의 진중한 장기판 소리가 울려온다.
그리고 북적이던 골목은 어느 순간엔가 긴 적막만 남기고 비워져 버린다. 침묵은 골목에 또다른 주장이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푸근함을 품고 있는.

서양건축은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반면 동양건축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건축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만 수행한다.

개인적으로 산책을 좋아한다. 혼자하는 산책.
무작정 걷다가 보면 맘 속의 복잡한 것들이 길바닥에 다 떨어져나가 버리고 없다. 머리가 텅 비워진다.
하지만 내 앞에 문득문득 나타나는 의미모를 조형물들은 비워진 내 머리를 다시금 가득 채우곤 한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조형물도 우리네는 알지 못한다. 수억의 조형물일지라도 삶의 공간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고 삶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지워가는 지우개일 뿐이다. 

가끔 마주치는 들꽃이 길거리 화단을 형형색색 채우고 있는 인공의 꽃들보다 더 아름답다.
인공이 반드시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청계천은 처음에는 나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걷기 시작하고 자연이 돌아오면서 지금은 좋아졌다. 우리네 삶과 자연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달동네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계속해서 회색빛깔의 사각형 건축물로 우리 삶을 채워갈 필요도 없다. 

저자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를 통해 서울의 600년 역사나 더욱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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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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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영복 님의 저서를 보면 감옥에서 20년을 지낸 분같지 않게 인생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인 즉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그들 개개인의 삶은 어떤 위대한 저서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그를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의 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18C 카톨릭 수도사이다.
17C에서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C에 한층 철저해졌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카톨릭교회에 대한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적이게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경이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당연히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성경을 다양한 세속언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더이상 하나님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말하시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불어 볼테르, 괴테 등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특히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발달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도전을 가져왔다.


종교와 이성은 항상 대립될 수 밖에 없다. 이성의 발달은 종교의 쇠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락으로 추락한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회복의 필요성.
하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전부인양 쏟아내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분노.


저자는 "제발 입닥치고 조용히 해! 그냥 이전처럼 내말을 들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맛을 본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소화되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까?


< 보태는 이야기 >


- 침묵은 무조건 좋을까?
침묵시 중요한 것은 평소 이미지다. 평소 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침묵과 작은 긍정의 미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침묵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군'하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평소 확신이 있을 때는 한마디씩(?) 던져야 한다.


- 너무 감정적인 글이나 말은 무조건 나쁜 걸까?
청소년기 시절, 깊은 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연애편지를 쓴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밤은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  다음날 아침 혹은 메일을 발송한 이후 다시 본 편지 내용이 너무 낯뜨거워 얼굴을 붉혔던 추억들...


감정적인 글과 말은 칼이 될 수 있다. 그 칼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진솔한 말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날 때 가능한 것.


상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끔은 이성의 고삐를 풀고 그냥 던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 SNS를 통한 소통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최근 SNS를 통한 무분별한 악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혹자는 상대방과 마주보지 않는다는 이점은 얼굴 붉히지 않고 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도망가기 >


폐쇄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는 사이...
너무나 이상적인 사이다.


불편한 침묵은 '어설픈, 설익은 말'을 끄집어 내게 만들고 결국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


간혹 지나친 선입견으로 무작정 어떤 대상에게 야유와 경멸을 보내기도 한다.
정작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침묵,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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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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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한 끊임없는 자극들은 현대인의 외부 인지 감각을 무디어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상품의 판매와 소비가 생명인 현대사회의 탐욕자들은 무디어진 감각을 깨워 더 많은 판매와 소비를 촉진코자 좀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더욱더 자극적인 괴물들이 되어 왔고 우리네 현대인들은 그 괴물들에게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현대인들이 그 괴물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을 곧바로 필름에 담아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감 넘치는 영화와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화면 속에 담겨진 전쟁과 대량 학살은 새로 개봉한 액션영화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다. 즉 화면 앞의 우리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이 담겨진 그 전투와 대량학살이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연극이나 영화의 웅장하고 화려한 장면) 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가상과 실제의 모호한 경계선은 청소년들이 이슬람 무장단체인 IS의 대원으로 참여하는 비상식적인 결과를 낳았다.
현대사회에 대한 반항과 스트레스를 가상세계에서의 폭력으로 해소하던 청소년들에게 IS에 가담하는 것은 어쩌면 재미난 새로운 가상게임으로의 접속과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지구촌을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하였다. '나비효과' 이론이 이렇듯 삶가운데 충실히 적용하는 시기도 없었다.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의 결정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미지'로만 전달되어지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로만 인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미지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만 하고 결코 자유로워져서는 안된다.


피로사회라는 별명을 가진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눈 앞이 아닌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기아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면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때로는 진정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디어져만 가는 감각 속에서 결국 그러한 사진도 우리들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자극적인 이미지들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결국 그냥 무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주관적인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사진도 결국 누군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누군가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선택된 이미지는 당시 일어난 어떤 일을 그저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은 깨끗이 처리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이다.


둘째, 사진은 연출되어지고도 한다. 자신들의 고통이 좀 더 커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는 뭔가를 고발하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행동까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연출을 통해 더 충격적이고 무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셋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 즉 가난한 나라들에서나 빚어지는 비극이라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넷째, 특정한 문제를 광범위한 지역 또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느끼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나 고작 인간 본성이나 시대적인 사악함에 대한 한탄 정도에만 머물게 한다.


다섯째, 사진의 예시 기능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의견, 편견, 환상, 잘못된 정보 등을 조장한다. 사진은 특정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며 다만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더구나 보편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를 특정한 사진을 통해 예시함에 따라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과거 특정 사건을 떠올릴 때 이야기가 아닌 단편적인 사진을 통해 기억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보여지는 것에 대한 단순한 신뢰가 아닌 그 이면의 실제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듯 하다.


우리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인간은 관음적 존재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상은 좀더 폭력적이고, 좀더 음란한 각종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이라는 쉬운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단순히 관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가 곧 시들해진다.


우리는 연민을 느낌으로써 그들의 고통과 우리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무고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통이 없는 현실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구 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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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탈출 -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
앵거스 디턴 지음, 이현정.최윤희 옮김, 김민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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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피케티 열풍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어 한다.

책의 제목인 '위대한 탈출'은 인간 역사에서 빈곤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대탈출을 성공한 것은 아니다. 즉 여전히 빈곤이라는 거대한 수용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

과학과 경제의 발달로 모든 인류의 빈곤해결이 가능함에도 여전히 세상의 절반은 굶주고 있다.
더불어 빈곤에서 탈출한 인류내에서도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소유를 두고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듯 불평등의 문제는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이고, 둘째는 더 풍요로운 삶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이다.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은 탈출한 그룹과 탈출하지 못한 그룹간의 불평등이다. 이는 이 책의 주제이다.

풍요로운 삶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은 탈출한 그룹내의 불평등으로서 결국 인간의 탐욕에 기인한 불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풍요로운 삶이란 생존을 넘어 조금더 편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남과의 비교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사치를 위한 삶일 것이다. 이것은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질투는 선사시대부터 수십만년동안 형성된 '공평한 분배'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겨우 300년 정도의 근대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엄청난 불평등을 접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핵심은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특히 이미 가진 자들의 역할 정립이 중요하다.

이 책의 결론은 가진 자들은 탈출하지 못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말아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가 '원조환상', 즉 부유한 사람 또는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사람 또는 가난한 나라에 돈을 더 주기만 하면 세계의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원조환상은 빈곤을 퇴치할 처방이 아니라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많은 중국과 인도보다는 아프리카 여러나라 등에 대한 원조로 실제적인 원조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조는 대부분 국가 대 국가로 이루어지는데 실제 원조를 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빈곤탈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이러한 원조는 지배층의 독재권력 강화에 사용되어지고 이러한 체제를 더욱 곤고케 한다는 것이다. 권력 유지를 위한 자본이 내부 피지배층이 아닌 외부 원조에서 온다면 굳이 피지배층의 복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급속한 발전과 냉전체제의 붕괴는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하나의 생활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큰 공동체 속에서 거대한 지배층이 등장한다. 이 책은 그들에 대한 합리화 논리다.

빈곤국가의 독재권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원조'가 아니라 그러한 비정상적인 체제를 통해 이익을 얻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속의 거대한 지배층이다. 한정된 물질에서 누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누군가는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치다. 대탈출에 성공하고 거대한 물질을 소유한 그들에게 새롭게 탈출에 성공하여 자신들과 같이 된 누군가를 맞이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 이외 그들은 그냥 수용소에 있어야 한다.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공동체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항상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지배층이 공동체의 현명한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고 실제 태생은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은 항상 부패를 낳는다.

대탈출의 시작은 현명한 리더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지배층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패해 왔다.
자연이 바다가 오염되면 태풍을 통해 정화시키듯 그러한 부패가 극심해질 때면 항상 대혁명이나 전쟁을 통해서 정화되어지는 역사가 반복되어져 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찰나에 지나지 않는 현재를 사는 우리네 인생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현 지배층의 흐름에 편승해서 이 찰나를 편히 지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혁명의 물결은 시대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아닌 시대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왔다.
그 물결은 우리네의 작은 변화의 물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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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기생충 제국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칼 짐머 지음, 이석인 옮김 / 궁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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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제5침공'이라는 흥행에 실패한 조금은 지루한 영화를 얼마전 보았다.
외계인들이 인간의 머리에 기생하면서 인간을 조정하고 지구를 침략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런 류의 영화에 상당히 익숙하다. 영화 '에일리언'처럼 독립된 개체로, 또는 바이러스 형태로 인간에게 기생하며 인간을 조정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상과학영화들 말이다.


이런 류 영화들의 공통점은 그 외계 기생충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고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또 하나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인간의 몸에 기생하면서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통제하고 조정한다는 것이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외계생물의 숙주가 된 인간은 '잘 먹는다'. 이는 몸 속의 외계 기생충이 '잘 성장하도록'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5침공'에서는 외계생물의 숙주가 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그냥 '외계인'이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무엇인지 모르는 미지의 생명체 그리고 나의 몸 또는 함께 있는 누군가의 몸 속에서 육체와 정신을 조정하고 결국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임을 감안하면 공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회통념상 일반적으로 '기생충'하면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한다. 누군가에게 '기생충같은 XX'라고 하면 상대방에게는 엄청나게 모욕적인 발언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을 접어두고 실제 우리가 기생충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실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금세 알수 있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형성된 근거없는 단순 편견만을 가지고 우리들은 기생충이라는 존재를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성향은 기생충이라는 존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별한 이유없이 그냥 무작정 남들이 싫다고 하니까 나도 싫은 식의 태도는 쉽게 우리 삶 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단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 뿐.


이 책은 '기생충'이 무엇인지, 자연 그리고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기생충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생명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복잡하고 매우 잘 적응된 생물'이다. 모두가 진화하는데 반해 퇴화하고 있다는 기생충에 대한 불편한 편견은 일부 진화론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기생충은 동식물의 몸이라는 매우 특이하고도 어쩌면 상당히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진화되어왔다. 이러한 진화는 동물 또는 식물,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서로간에 생존의 우위를 점하고자 경쟁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존재를 위한 경주는 결국 양자 모두를 진화하도록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


최근에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기생충이라는 존재는 생태계에 아주 깊숙히 관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동식물의 암수 양성으로의 진화, 개체수의 조정 등이 상당부분 기생충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정한 기생충의 소멸은 특정한 생태계 부분의 파괴의 증거로 활용되기 한다.
또는 화학비료로 인한 환경파괴가 심한 이 시점에서 천적 기생충을 활용한 해충 조절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저자는 기생충에게 생명체는 하나의 섬이라고, 그것도 아직도 탐험할 곳이 많은 섬이라고 말한다.
기생충은 어떤 숙주에 살면서 그 숙주로부터 삶에 필요한 것들은 얻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어쩌면 지구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생물들은 지구를 숙주로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그 수백만의 생물 중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통념상 혐오스러운 이미지의 기생충만을 생각할 때 이런 연결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지구에 살면서 지구의 생명력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만큼 이 지구의 생명력을 깎아먹고 있는 존재도 솔직히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기생충은 스스로 파멸하지 않기 위해 숙주를 돕기도 한다. 비록 숙주를 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결정이겠지만 결국은 숙주와의 공존을 선택한 것이다.


인류도 어쩌면 결정을 해야 할 시점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영화들이 인류의 과거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다양한 예측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이를 우리는 단순히 재미로 보고 있지만 만약 그것이 현실이 될 때는 더이상 재미가 아닌 심각한 현실이 될 수 있다.
실제 공상과학영화의 많은 부분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


영화에서 지구를 침공해온 대부분의 외계인은 첨단과학의 발달과 전쟁 등으로 자기들의 별이 파괴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 마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 반대로 인류가 핵전쟁으로 지구를 파괴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우주로 떠나기도 한다.


어떤 유형이든 결국은 지구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금.
숙주인 지구의 죽음은 곧 인류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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