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다가 보면 세상과 잠시 이별하고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러다가 그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본문중)


만물의 창조주나 수천만년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면서 겨우 100년남짓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 것이지......
왓치맨이란 영화를 본 적있다.
이 영화에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수퍼영웅이 된 사람들과 사고에 의해 실제 신과 같은 존재가 된 닥터 맨하튼이라는 반신이 등장한다.
수퍼영웅들은 스스로를 절대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더 나아가 닥터 맨하튼에 도전한다.
닥터 맨하튼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간 중 가장 똑똑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냥 똑똑한 인간일 뿐이다.'
최근 200~300년 사이 인간의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이제 창조주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하지만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이룩한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증기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본문중)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갈 때 그의 참모습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그것을 인지한 우리들은 그만큼만 그를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간다.
물론 우리가 가진 가치관이나 편견이나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통해 가지게 된 사전지식으로 인해 조금더 이해가 빨라질수는 있겠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본문중)


인간의 '자기사랑'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선이면서 또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절대악이다.


좀더 깊숙이 들어가서보면 인간의 삶은 유치하다.
자기사랑의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존재케 하기 위한 결정을 지속하면서도 때로는 덧없는 순간의 쾌락을 위해 유치한 선택을 하게 된다.
욕망충족의 쾌락은 그것이 달성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극에 이른다.
실제 그 쾌락을 경험할 때는 이미 쾌락의 덧없음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의 절정은 마치 마약과도 같다.


'이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화해한다. 모든 곳에서 그는 영접받고 축복받을 것이다. 저를 맞아들이는 장소의 형태와 결합하여 차츰차츰 그 형태와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완강한 저항이 철저한 복종으로 변했다가 어떤 새로운 생존 속에서 다시 반항으로 소생할 것이니 이 소용돌이와 평화의 교차가 우주적인 삶을 구성한다.'(본문중)


태초에 인간은 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땅에 대한 욕심이 많다. 인간의 역사는 땅싸움의 역사였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땅을 좋아하는 인간은 땅을 그냥 두지 않는다. 마치 원수인 것처럼, 땅이 인간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땅을 괴롭힌다.
남산 산책을 갔다. 분명 산에 갔지만 흙을 밟을 수는 없었다. 옆에서 누군가 '그냥 두지' 하고 말한다.
흙을 무척이나 그리워하면서도 인간이 만든 문명은 우리와 흙을 강제 이별시킨다.


우리가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갈수 있는 방법은 '죽음'이다.
'완강한 저항'이 죽음을 통해 흙과 하나되는 '철저한 복종'이 된다.
어쩌면 흙과 하나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흙과 분리되려고 하는건가?


하지만 죽음은 결국 우리를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


흙으로 돌아간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본문중)


인간은 항상 외롭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신의 반쪽만 보여주기 때문에 반쪽짜리 결합만 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인간은 계속 외롭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숨겨진 반쪽이다. 하지만 그 숨겨진 반쪽을 함께 할 누군가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만약 그(그녀)가 있다면 내 생명을 던지리라.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출발할 때면 항상 무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과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여행은 우리에게 피곤함과 금전적 부담과 시간의 낭비를 준다.
그런 것들을 감수하면서도 왜 우리는 얘타게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걸까?


우리는 자신을 찾고 싶어 한다. 큰 기계속에 작은 부속품으로 살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와 만나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본문중)


슬픈 것은 그렇게 어렵게 만난 자신은 존재라는 관점에서 너무도 의미없다는 것이다.
세상가운데 돈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하지만 세상의 존재들 가운데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의 많은 존재들 중 내가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냥 존재들이 흘러가는 데로 같이 흘러갈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실패한 여자 세릴 스트레이드, 그녀는 무너진 삶을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걷기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어쩌면 인생은 PCT 걷기와 비슷하다.
정상을 향해 오르다가도 다시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고, 끝없는 평지를 걷다가고 갑자기 숲이나 큰 강 등을 만나기도 한다.
세릴이 PCT의 종점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이런 경험들을 통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본문중)"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라는 끈으로 잘 유지되고 있던 세릴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던 끈이 풀어져 버린다.
완전히 무너진 그녀는 무분별한 섹스와 마약에 빠져서 결혼에도 실패하고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그녀가 전혀 산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그리고 체력도 없는 그녀가 혼자서  PCT 4,285km를 걷기 시작한다.

"다시 배낭을 메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그냥 계속해서 길을 걷는 것뿐.(본문중)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생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죽음이후의 삶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천국이나 지옥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단지 '무'로 돌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극한 고통의 순간에는 사후의 세계가 무엇이든 그냥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하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결정은 도박이다.
사후에 더 고통의 순간이 나를 기다릴 수 있게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이 그나마 극한 고통 속에서도 자살을 막아주는 공로자들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장 최악의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까.(본문중)"

가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때 이렇게 세릴과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한다.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좋아질 일 밖에 없다.
그러니 기뻐하자.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어. 언제나 누구의 딸, 엄마, 그리고 아내였지. 나는 나 자신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어.(본문중)"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직장동료, 상사 등등 세상에서 연관되어진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교육을 통해서 또는 TV, 신문 등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서 소속된 국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세계 정의 등등 범국가적인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라 무엇인가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이 속에서 '나'는 없다.

개인적으로 산 속을 걷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 가고 싶고 힘든 길을 선택할 것이다.
내 속에 깊이 배여있는 지독한 냄새나는 찌꺼기들을 모두 땀과 함께 배출하고 싶다.
마지막 내려오는 길에 계곡물에서 이 찌꺼기들을 남겨 놓고 올 생각이다.
산이 욕하지는 않을 것같다. 
아주 보잘것 없는 나란 존재보다 산은 훨씬 대범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공허한 십자가 (보급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공허한 십자가', 사형제도의 무력함을 이야기한다.

범죄자에게서 진정한 사죄를 받아낸다는 의미에서는 사형제도의 무력하다.
사형수 히루카와에게 살인은 과거의 일이고 사형은 단지 자신의 운명일 뿐이다.
사형수 히루카와에게 살인과 사형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에게 어차피 죽음은 정해진 것이고 사형은 누군가 죽을 날을 미리 정해준 것일 뿐이다.

사형수 히루카와에게 유족들이 얻고 싶었던 '사죄의 마음'은 사형이라는 벌로서는 얻을 수 없었고 사형은 그러한 사죄의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사형이라는 형벌은 반드시 살인자에 대한 사죄의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서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살인이라는 범죄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에 따라 또다른 죽음을 원하는 것이다.
둘째 재범을 방지코자 하는 것이다. '공허한 십자가'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카하라의 딸은 모범수로 출소한 살인자 히루카와에 의해 살인되었다.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살인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사실' 위주의 판단뿐만 아니라 관련자들에 대한 '내면'적인 문제도 함께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살인자는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환경과 상처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고 이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살인자의 내면적인 치유가 병행된다면 재범의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니시나 후미야, 이구치 사오리 이들은 21년전 중고등학교 시절 사랑에 빠지고 아기를 낳게 된다. 하지만 두려움에 휩쌓인 이들은 그 아기를 살인하고 기억속에 묻는다.

이들의 문제와 대처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문제와 만나면 먼저 원인을 찾고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원인을 찾을 때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고, 둘째는 외부에 전가하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용기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의 무게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만 쉬운 일이다. 편안한 일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문제로 인해 비난받는 위치가 아니라 비난하는 위치에 설수도 있다. 그 문제 때문에 내가 고통받고 있으니 그 문제의 책임을 앞에 있는 네가 져야한다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을 때도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문제속에 주저않는 것이고, 둘째는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속에 주저않는 것은 너무도 편한 일이다. 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 그러면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공허한 것이고 도움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책임은 스스로가 져야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결국 길은 열릴 것이고 그러한 문제와 해결 끝에는 더 성숙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케이스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와 대면한 순간은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다. 때문에 앞으로는 좋아질 일밖에 없다. 즉 희망적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문제와 대면한 그 순간의 고통이 두려워 문제를 대면하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몸이 아프면서도 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한다. 주사바늘에 대한 시각적인 공포와 그리고 주사바늘이 몸속에 들어올 때의 따끔함이 싫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 주사를 맞는 일은 생각처럼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할 뿐이고 이 결단은 미래의 더 큰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후미야와 사오리도 좀더 일찍 용기와 결단을 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영아살인 후 후미야(남성)는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공헌하고자 노력하고 임신후 자살을 시도하는 여성과의 결혼까지 한다.
사오리(여성)는 자기 주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죄에서 찾으며 세상가운데 자포자기 한다.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가장 좋은 것은 문제가 발생한 21년전에 용기있게 맞이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21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삶을 망가트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자수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들의 결정에 대해 찬성에 한 표를 던진다.
우리에게 결단의 용기를 발휘할 기회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문제가 발생한 그 순간 결단하지 못했더라도 21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그 결단은 할 수가 있다.

이야기에는 '하나에'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하나에는 후미야의 아내이다. 
하나에는 후미야와 결혼 전 또다른 남성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후미야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하나에는 불행한 여성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도벽이 있으면서 외도까지 일삼는 무직의 아버지...
하나에는 이런 불행한 가정에서 탈출했지만 결국 한 남성에게 모든 돈을 사기당하고 그의 아들까지 임신하는 불행 속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하나에의 부주의와 어리석음을 질책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한번더 생각할 것은 하나에의 불행은 당시 하나에가 살고 있던 사회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공장에서 적당히 일하다가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사무직 남성을 만나서 결혼하고 직장을 적당히 그만두는 것이 당시 사회모습이었다.
하나에는 이러한 여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틀 속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강박관념은 하나에의 판단을 흐리게 했고 결국 잘못된 결정을 하게 했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은 항상 스스로가 지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피부색이 어떻든, 학력이 어떻든,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모두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회다. 
나의 인생의 길와 종착역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재미없는 삶일까?
가끔 주위 직장 선배들을 보면서 너무나 동일한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미래의 나의 모습도 함께 발견하면서 허탈함을 가지게 된다. 

성숙한 사회는 하나에와 같은 문제를 책임으로 인식하고 실제 책임을 지는 사회다.
복지제도나 각종 사회 부조리를 개선코자 하는 노력들이 이러한 류일 것이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좀더 나은 사회가 부여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명사회는 극도의 통제사회다.
비록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모두는 감시자이고 더불어 감시대상이다.


같은 팀 직원이 얼마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한 것이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글'의 힘을 빌린 것이다. 구글서비스는 여행지 선택과 투어코스, 그리고 비행기시간을 고려한 출발시간까지 완벽한 가이드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개인정보가 완전히 노출되고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고 한다.


'결정장애',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신장애다. 결정을 위해서는 제반상황들의 고려와 그에 따른 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책임이 함께 동반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사유하고 반성하고 개선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제 사회전반적으로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이 없어지고 있다.
사회는 시스템화되어지고 우리는 시스템 속에서 이미 결정되어진 일에 충실하면 된다.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일과 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공개한다.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이것이 신뢰성을 강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신뢰가 필요없다. 신뢰는 상대방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성은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됨으로써 더이상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이 공간은 쉼과 재충전의 공간이다. 하지만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이런 공간은 없다.


만약 24시간 대중에게 공개된 투명유리 속에서 생활한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도로 피로하게 될 것이다.
투명유리 속의 우리는 보여지는 부분으로 대중과 관계해야 하고 이 보여지는 부분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쉼없는 관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투명사회에서는 더이상 내면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보이는 부분이 중요하다.
헬스장, 다이어트, 그리고 성형수술 등 우리는 외적인 부분을 가꾸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외적인 관리는 곧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고 이를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신만의 사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미지의 세계는 평생 탐험할지라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와도 같다.
내가 책을 읽은 이유는 사유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이다.
가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읽은 책의 수를 하나 더 체크하기 위해 강박관념에 휩쌓이기도 한다.


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시대의 방향에 맞는 사유의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도 한다.
모두가 지나간 길을 간다는 것은 편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내도 역시 '구글서비스'와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문화의 틀에 갇혀야만 하고 일탈은 불가능한가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2014년 5월 조니 뎁 주연의 영화 '트랜센던스'가 개봉하였다.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니라 모바일에서 구입해서 봤다. 역시 흥행이 안된 만큼 큰 재미는 없었다.
대중적인 재미를 주지는 못해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영화들이 많이 있다.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트랜센던스는 '슈퍼 컴'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슈퍼 컴이 아니라 사망한 천재과학자(조니 뎁)의 뇌의 모든 기억을 컴퓨터에 업로드해서 만들어진 지능을 가진 컴퓨터였다.
영화는 과연 트랜센던스가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계속 우리에게 질문한다.
영화의 말미에 트랜센던스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통해 스스로를 죽임으로 인류를 구하던지, 아니면 세계를 지배하던지 결정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의 결론은 만약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는 인간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컴퓨터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준다.
그리고 트랜센던스는 생전의 부인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그리고 트랜센던스는 조니 뎁이었다고 결말이 났지만 여전히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트랜센던스가 죽음을 결정했던 것은 그 인공지능이 너무나도 인간과 유사했기 때문에 마치 감정을 가진 것처럼 인간적인 결정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인간적인 컴퓨터이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스스로 기계임을 자각하고 죽음을 선택해서라도 인간이고 싶어한 것을 아니었을까?

이 책은 지구를 정복한 인간종의 하나인 호모 사피엔스의 개괄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7만 년 전,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던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순간임을 암시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함께 두려움도 일어나게 한다.
근 2백년 사이 과학발전을 통해 인간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지만 인간의 욕구불만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공지능, 유전공학, 나노기술 등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고 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책의 결론이다.
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결론을 쏟아내고 있다.
기계들의 지배를 받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극단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인공지능 등 기계의 도움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다가도 결국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종족과의 갈등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내용들이다.

과학자들과 지배자들은 장애나 죽음이라는 한계의 극복을 통해 인류 모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슬로건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관용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초인을 만드는 그 기술의 수혜자로서 자신들 스스로를 지목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한 불평등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권력자나 일반 서민이나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달라질 수도 있다. 죽음은 우리같은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의 몫일 수도 있다.

미래에 새롭게 창조되어질 그들은 사피엔스일까? 기계일까? 

신체의 일부만 로봇인 종.
로보캅처럼 뇌는 사피엔스이지만 신체는 로봇인 종.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죽지않는 사피엔스.
컴퓨터와 같은 지능을 가진 사피엔스.
헐크같은 강한 육체를 가진 사피엔스.

이들은 사피엔스일까? 아님 다른 새로운 종족일까?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어울려 산다면 그 때도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일까?

수십 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 중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기는 겨우 7만 년 전이었고 실제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로 등극한 것은 더 짧은 기간이었다. 이전 지구의 지배자들은 사피엔스가 아니었다.

사피엔스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면서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인간 종의 멸종시켰으며, 더불어 가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의 동물들을 거의 멸종에 이르게 했다.

새로운 종족들은 우리 사피엔스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