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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평점 :
얼마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산업혁명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우리 별에서 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지 고발한 책이다.
우리는 잘 포장되고 개작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풍요로운 시대,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 최첨단기술로 미래를 지배하는 시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많은 미사어구들을 배우며 자랐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사람들이 프로그램된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들도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으로 잘 프로그램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대단한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초라한 나’를 느낄 때 ‘난 실패자인가?’ 하고 조바심을 가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이상을 살고 있는 이 순간에는 그 조바심조차도 사치로 느껴진다. 바로 눈 앞에 닦친 삶에 대한 도전들('그들'에게는 우스운 것들이겠지만)을 해결하기에도 바쁜 나는..., 현재 이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라고 다독거린다. 위를 보지 말고 밑을 보며 살아라... 하면서.
멧 데이먼 주연의 영화 ‘엘리시움’. 가난, 전쟁, 질병으로 가득한 버려진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선택받은 1% 세상 엘리시움에 사는 사람들간의 갈등을 영화로 그린 것이다. 영화 속의 극심한 빈곤과 극심한 부의 대립은 우리 시대의 숨겨진 모습이다. 얼마전 '강남구'를 서울시에서 독립시켜달라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강남구는 우리시대 엘리시움인듯하다. 빈곤의 바다 한 가운데 부를 누리고 있는 우리와 구별된 1%의 도시이다.
어릴적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카우보이들과 인디언들의 전투씬이었다. 잔인한 인디언들이 연약한 개척민들을 괴롭힐 때 카우보이 영웅들이 나타나 무찌르는 스토리의 영화들.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인디언들은 야만인의 표본, 악의 표본이었다.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파헤치면서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트린다.
쇠고기를 먹는 문화는 기원전 유라시아 스텝평원에서 시작되었다. 스텝평원의 유목민들이 유럽과 인도에서 정착하면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도 함께 정착하게 되었고 차츰 유럽 귀족층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산업혁명 등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 폭발하는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소를 사육할 목초지와 곡물이 점점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프리카 등으로 목초지는 넓혀져 갔고 결국 버팔로와 인디언의 대륙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에 미국에는 소가 없었다. 다만 버펄로와 인디언만 있었다. 지금 북미와 남미의 소들은 다 유럽에서 개척자들과 함께 건너간 것이다.
미국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평야에서 수천년동안 살고 있는 버펄로와 인디언을 몰아내야만 했다. 미국 군인들과 개척자들은 인디언들의 양식인 400만마리의 버팔로를 단 몇년만에 멸종시킴으로서 굶주린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 넣는다. 즉 영화 속의 난폭했던 그들은 자기들의 영토와 양식을 지키기 위한, 즉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실제 야만인은 인디언들이 아니라 미군과 개척자들이었다.
만약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 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상의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프리카는 원래 자급자족하던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화되면서 이들의 농지에는 사람이 먹을 곡식이 아닌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고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로 개발되었다. 정작 사람이 먹을 곡식은 유럽 등에서 고가에 수입하게 되는데 이 조차도 독재자들이 독식 한다. 결국 이러한 실태의 쓴 열매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이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수백만 인구가 최소한의 일일권장 칼로리를 섭취하지 못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특권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쇠고기를 소비하는 현상이다.
10억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과욕으로 비만과 풍요성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또다른 10억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멜더스 같은 제1세계의 지적 엘리트들이 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에서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아주 모순된 모습이다. 사실상 그들은 부유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고기를 꾸준히 소비할 수 있도록 빈곤층의 생계를 박탈하고 있는 과도한 소의 개체수와 먹이사슬의 현실을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TV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아이들에 대한 구제기구의 활동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너무나도 무심하다. 거리의 상처받은 짐승들의 구제에는 열광하면서 그들에게는 왜 무감각한 것일까? 그들이 태어난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배고픔의 벌을 받고 있다.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내 몸속에 쌓이는 지방덩어리를 떼어내려고 고민하고 있다. 이 지방덩어리 일부가 배고픈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면 그들 중 몇몇은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들의 죽음을 먹고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