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만 볼 수 있다면 - 헬렌 켈러 자서전
헬렌 켈러 지음, 이창식.박에스더 옮김 / 산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헬렌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고 당연히 처음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완전한 어둠과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잠에서 깨었다. 아직 밤이다.
다시 잠들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하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렸을까 다시 눈을 떴지만 여전히 밤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삶에 아침이란 없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내 주위를 오고가는 그들이 있지만 누구도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경계없는 끝없는 어둠과 침묵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숨이 막힌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아마도 스스로 어둠과 침묵을 끝내고 싶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막아 보았다. 단 몇 분도 견디지 못했다.
세상의 색깔과 소리들로 나는 이미 중독되었다.
그것들 없이는 단 몇 분도 견딜수가 없다.

헬렌에게는 육적인 눈과 귀는 없었지만 마음의 눈과 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자연스레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헌신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눈과 귀가 된 것이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 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중략)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본문 중)

여러 책을 읽다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작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부럽다. 질투가 난다. 남성작가면 친구가 되어보고 싶고 여성작가면 사귀어보고 싶다.
그들의 삶에서 묻어나는 체취들을 같이 느껴보고 싶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씨는 많이 볼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책읽기가 그 훈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순히 많은 책읽기나 좋은 구절들을 정리하고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 속의 울림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울림의 훈련이 내 눈, 내 귀, 내 손가락 끝의 떨림이 되어야 한다.

최근 동양적인 시각 즉 세상과 자연과 함께 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많이 있다.
열성적인 서구따라쟁이가 된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주위에 늘 함께 하고 있는 것들을 잊어버렸다.
느림은 삶을 더 풍성히 한다. 서구를 따라 달려만 갈 것이 아니라 이제 조금 천천히 함께 가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본문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체험을 담고 있다.
실제 저자의 수용기간은 1년 조금 더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거기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에서 쉼없는 줄타기를 하게 된다.

세상과의 격리, 인간과의 격리,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그들, 그들은 인간이기 위해 자신들을 격리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눈앞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나머지 생각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나머지 것들을 위한 생각의 여백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는 결코 먼나라 옛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이야기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비록 이미지화된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목격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할지라도 결코 우리는 그것에서 구별되어질 수 없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유태인 학살의 주범 중 한명이 아이히만을 조명하면서 '악의 평범성', 즉 지극히 평범한 사람 속에 내재한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으로도 출간된 '스텐퍼드 교도소 실험'에서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가학적인 교도관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우리네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울림을 들을 수 있다.
우리네 삶 주변에 그리고 우리 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인간삶의 어두운 면인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인간과 동물의 줄타기는 가해자에게서도 피해자에게서도 모두 나타난다.
인간으로서의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 가해자도, 결국 고통에 굴복해 인간의 이성을 무너뜨린 피해자도 모두 줄에서 떨어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현대사회 속에서 눈앞에 있는 내가 가야할 줄을 바라보서면서 레비의 말을 생각해 본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잠언집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무소유' 법정스님의 잠언을 류시화시인이 엮은 책이다.

우리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이 '실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뒷모습보다는 더 멋진 앞모습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네 뒷모습은 지치고 피폐해지고 병든다.

정유정의 <종의 기원>에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도 내 머리 속에는 물질을 향한 허황된 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꿈을 위해서 오늘도 로또를 사기 위해 허황된 발걸음을 든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 허황된 꿈이라도 꾸지 않으며 어쩌랴 하지만 '꿈'은 꿈일뿐. 이제 깰 시간이다.

법정스님은 '물질은 그 소유자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속과 부자유를 주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자신이 소유한 것의 소유가 되어 버리는 인간 삶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한다.'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지금은 물신주의시대이다. 
우리의 한가지 소망은 '돈'이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진다는 내면 깊숙한 확신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이제 비우라고 말씀하신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도 필요이상의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서도 더 채우기 위해 탐욕스러운 걸음을 재촉한다.
마치 오직 먹을 것을 향해 달음질하는 좀비들로 가득한 세상 같다.

아름다운 눈꽃은 나뭇잎이 풍성한 나무가지에 피지 않는다.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가지에 핀다.

우리가 필요 이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을 비운다면 비운만큼의 자리에는 우리가 놓쳐버렸던 행복들로 채워질 것이다.
달음질하면서 보지 못했던 순간순간의 행복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러면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말씀이 내 맘속에 찾아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머리말에 제시된 역자의 이야기다.

독서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책을 통해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사고를 접하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책 읽는 사람'의 사고영역을 확장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이 없는 독서는 자신의 사고영역 둘레에 확고한 요새같은 담을 쌓는다.
자신의 사고에 큰 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관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거나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요새를 만드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한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는 그 친구가 왜 저리 독단적일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벼가 익어야 고개를 숙이듯 아직 익지 않아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벼는 계속 익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요새를 구축하면 자신이 구축한 요새의 강건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리고 도취되어 요새 밖에 것을 볼 수가 없다.
결국 우물한 개구리가 되는 것이고 사고영역은 확장되지 않는다.

러셀의 글은 자신만의 사고의 틀에서 자유롭게 써내려간다. 그러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진 내가 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러셀의 다른 책도 몇권 추가 구매했다.

직원들과 식사중 여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 직원이 여가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가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상의 여가는 무엇을 할 것인지 대상을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또는 활용방안에 대한 컨설팅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체육관에는 트레이너들이, 도서관에는 독서컨설턴트가... 그들이 있다.

현대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시간조차도 이제 무엇인가를 빼곡히 채워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 같다.
어쩌면 성과가 모든 것인 시대에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게으름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러셀은 창의적인 성과는 게으름 속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창의적인 것은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닌 그들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기술은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인 여가를 모든 사람들의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과학의 발달은 과도한 노동력의 투입없이도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생산을 약속해 주었다.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상당부분 빼앗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의도치 않은 게으름으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대체로 일하는 사람들은 장시간 일하면서 과로로 인해 힘들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굶어죽는 아이러니한 근대화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러셀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지속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정부의 일자리 창출 방향은 러셀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예를 들어 시간제근무를 활성화하여 개인당 근무시간를 줄이고 그 빈 자리를 또다른 시간제근무 일자리로 충원하는 것이다.
시간제근무로 여유로워진 시간은 여가를 통한 창의적인 시간을 가지면 된다.
비록 급여수준이 낮아지겠지만 복지사회로의 흐름은 이러한 급여가 낮아지는 공백을 충분히 채워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생산과 성과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생산한 것을 향유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잊어버렸다.
향유하는 즐거움의 망각과 여유로움의 소멸, 그리고 과도한 압박은 단기적인 성과는 기대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를 부서지게 할 것이다.

최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새로운 인간 영역의 구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지금처럼 성과위주의 단순한 전진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지금처럼 기계적인 성과창출 분야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결코 인간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이즘으로 세계적인 획일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통제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인공지능의 등장은 어쩌면 인간역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때문에 창의적 활동을 통한 인간의 새로운 영역 구축은 아직까지는 성과주의의 산물인 인공지능에게 다소 우위에 설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법한 삶 가운데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을 정리해 두었다.
삶 속에서 누구나에게나 순간순간 일어나는 잡스러운 생각들이 저자에게는 상당히 특별했던 가 보다.
그래서인지 보통의 존재인 나에게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공감으로 다가온다. 
보통의 존재들이 그냥 넘어가는 잡스러움을 이렇게 끄집어낸 저자는 보통의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저자의 잡담들에 대해 나의 또다른 잡담들을 더해서 수다를 만들어 본다.

석원 왈 : 내가 정말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느 날 정열이 사라져버린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제대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너무 빨리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종우 왈 : 맞다. 당신은 사랑에 대한 결론을 너무 쉽게 내리고 있다. 사랑은 순간적인 동물적 욕구로만 표현되어져서는 안된다. 동물적 욕구가 사라졌을 때 즉, 당신이 말하는 3개월의 떨림이 없어졌을 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어진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사막이 펼쳐질 때도 분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 속에서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 그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오아시스를 통한 갈증의 해소는 진정 사랑의 진정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만약 끊임없는 동물적인 흥분과 떨림만 지속된다면 결국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두의 육체와 감정을 고갈시킬 것이다.

석원 왈 : 과정이란 그 결과에 비하면 이토록 수고롭고 민망한 장면들이 많이도 연출되는 절차인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삶이 보기에 산뜻하고 간편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추함과 번거러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우 왈 :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청소년들은 화려한 조명 밑에서 모든 이들의 집중된 관심과 사랑속에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들에 열광하고, 성인들은 빌딩과 멋진 차와 옷을 가진 그들을 열망하고, 또는 TV 광고 속에 멋진 몸매들을 열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빛나는 자리에 가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길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쉽게 질투하고 비난한다. 
또 그들과 같이 되기 위해 일하기 보다는 로또를 사고 멋진 몸매를 위해 운동을 하기 보다는 살빼는 약을 먹는다. 물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공하는 이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이룬 것에는 '스스로 흘린 땀'이 없기 때문에 쉽게 잃게 된다.
빛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속에 있은 빛을 밝혀야 한다.

석원 왈 : 완벽한 비공개의 자유란 얼마나 갖기 어렵고 소중한지 공감할 것이다. 일탈이란,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타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의 집,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에서 언제든 가능한 것이다.
종우 왈 :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아무도 없는 나의 집에서의 소소한 일탈, 또는 직장 속에서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혼자만의 공간을 찾다가 결국 뛰어들어간 화장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중압감 가운데 살고 있다. 가정에서는 대출금, 자녀교육, 직장에서는 성과, 승진 등등 어디에서든 모든 것들이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어디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쉼을 얻을 수가 없다. 오직 개인적이고 사적공간이 필요하다. 최근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보는 눈'에서 벗어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성인 PC방이 여전히 유지되는가 보다. 캐캐한 냄새와 연기 속에 숨막힐 것 같지만 밀폐된 개인 공간이 허락되니까.

석원 왈 :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에게 이렇게 긴 역사도, 어떤 시공간의 차원에서는 그저 찰나에 불과한 순간밖에는 되지 않는다면서요. 이 작은 해파리의 운명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이토록 힘찬 움직임도 언젠간 정지하고 존재는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버리겠죠.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실밖에는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종우 왈 : 45억년의 지구나이에 비하면 겨우 100년 남짓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은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그토록 찾아다녔나보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다닌 것은 진시황만이 아니다. 현대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찾아다니고 있고 또 사악한 존재들이 이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현시대의 각종 종교들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어찌보면 100년의 찰나의 순간이후 영원한 사후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망설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이것을 이용하는 사악한 마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약속하지만 실제 그들은 찰나의 100년의 순간조차도 엉망으로 만든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석원 왈 : 고통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대신 이렇듯 사막처럼 고요한 안식처를 갈망하게 하였다.
나는 오늘도 집이 아닌 다른 곳, 이를테면 시내 대형서점의 어는 한 귀퉁이에서야 비로소 안식을 찾곤 한다.
종우 왈 : 혹자는 창의적인 것은 게으름에서 나온다고 한다. 눈앞에 무엇인가 처리해야할 일이 끊임없이 줄을 서 있다면 그것 이외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 너무 게을러져서 잠이 들어버리면 어쩔까? 그리고 깨어나지 않는다면... 지금 거리에 게으름에 빠져 노숙을 선택하지 분들도 있다. 게으름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고통으로 인해 몰아치는 폭풍우는 무엇인가 틀을 깨는 새로운 것이 일어나게 한다. 때로는 다 부서진 폐허를 만들어 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잠들수 있는 게으름을 나는 희망한다. 창조적이지 않으면 어떤가? 그냥 잠들면 어떤가? 다만 100년의 찰나같은 인생이라도 그냥 평안히 지내고 싶다.

석원 왈 :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으로 타인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우 왈 : 당연히 그렇수 밖에... 사람은 자기애로 충만한 존재이다. 아무리 이타적인 감정을 가지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이타적인 감정이 자기애를 극복할 수는 없다. 결국 자기애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고 결국 자기의 입장과 시각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입장도 시각도 결국 자기만의 것이 아닌가?

석원 왈 : 이제 나는 너에게서 완벽히 자유롭다고 말하는 순간, 깨닫는다. 결코 아직도 그럴수 없음을.
종우 왈 :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어떤 문제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졌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는 인간이 무엇인가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타락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완벽히 극복했다고 하는 그 부분에서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석원 왈 : "모든 게 쇼였어."
종우 왈 : 영화 '트루먼 쇼'처럼 고통스러운 내 인생이 그냥 '쇼'로 판명되었으면 좋겠다. 

비슷하다. 생각도 고민하는 것도... 성격도 비슷한 것같다. 나하고.
나도 보통의 존재여서일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그래서 베스트셀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