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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탈출 -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
앵거스 디턴 지음, 이현정.최윤희 옮김, 김민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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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피케티 열풍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어 한다.

책의 제목인 '위대한 탈출'은 인간 역사에서 빈곤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대탈출을 성공한 것은 아니다. 즉 여전히 빈곤이라는 거대한 수용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

과학과 경제의 발달로 모든 인류의 빈곤해결이 가능함에도 여전히 세상의 절반은 굶주고 있다.
더불어 빈곤에서 탈출한 인류내에서도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소유를 두고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듯 불평등의 문제는 두가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이고, 둘째는 더 풍요로운 삶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이다.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은 탈출한 그룹과 탈출하지 못한 그룹간의 불평등이다. 이는 이 책의 주제이다.

풍요로운 삶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은 탈출한 그룹내의 불평등으로서 결국 인간의 탐욕에 기인한 불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풍요로운 삶이란 생존을 넘어 조금더 편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남과의 비교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사치를 위한 삶일 것이다. 이것은 가진 자들에 대한 질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질투는 선사시대부터 수십만년동안 형성된 '공평한 분배'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겨우 300년 정도의 근대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엄청난 불평등을 접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핵심은 생존의 기회에 대한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특히 이미 가진 자들의 역할 정립이 중요하다.

이 책의 결론은 가진 자들은 탈출하지 못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말아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가 '원조환상', 즉 부유한 사람 또는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사람 또는 가난한 나라에 돈을 더 주기만 하면 세계의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원조환상은 빈곤을 퇴치할 처방이 아니라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많은 중국과 인도보다는 아프리카 여러나라 등에 대한 원조로 실제적인 원조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조는 대부분 국가 대 국가로 이루어지는데 실제 원조를 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빈곤탈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이러한 원조는 지배층의 독재권력 강화에 사용되어지고 이러한 체제를 더욱 곤고케 한다는 것이다. 권력 유지를 위한 자본이 내부 피지배층이 아닌 외부 원조에서 온다면 굳이 피지배층의 복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급속한 발전과 냉전체제의 붕괴는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하나의 생활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큰 공동체 속에서 거대한 지배층이 등장한다. 이 책은 그들에 대한 합리화 논리다.

빈곤국가의 독재권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원조'가 아니라 그러한 비정상적인 체제를 통해 이익을 얻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속의 거대한 지배층이다. 한정된 물질에서 누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누군가는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치다. 대탈출에 성공하고 거대한 물질을 소유한 그들에게 새롭게 탈출에 성공하여 자신들과 같이 된 누군가를 맞이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 이외 그들은 그냥 수용소에 있어야 한다.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공동체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항상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지배층이 공동체의 현명한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고 실제 태생은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은 항상 부패를 낳는다.

대탈출의 시작은 현명한 리더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지배층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패해 왔다.
자연이 바다가 오염되면 태풍을 통해 정화시키듯 그러한 부패가 극심해질 때면 항상 대혁명이나 전쟁을 통해서 정화되어지는 역사가 반복되어져 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찰나에 지나지 않는 현재를 사는 우리네 인생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현 지배층의 흐름에 편승해서 이 찰나를 편히 지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혁명의 물결은 시대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아닌 시대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왔다.
그 물결은 우리네의 작은 변화의 물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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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협력의 진화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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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전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만큼 중대했다."

1914년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있었던 축구경기에 대한 한 장교의 회고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양국 군인이 전쟁을 잠시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휴전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당시 휴전했던 양측 군인들은 선물을 교환하고 축구 경기를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몇 치의 영토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잠시 전투가 중단된 동안은 물론 전투를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의 800킬로미터에 걸친 여러 전선에서는 적군끼리 서로 상당히 자제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들 참호를 둘러본 한 영국군 참모 장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독일 병사들이 그들 방어선 안의 아군 소총 사정거리 내에서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군 병사들도 그것을 보고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현재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양측 모두 "공존 공영" 정책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시 서부전선의 상황은 극한의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협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이 책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상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팃포탯'을 소개하고 어떻게 협력관계가 형성되어지고 또 진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 팃포탯 전략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맞대응 전략이다. 우선 협력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대응방식에 따라 맞대응하는 단순한 전략)

특히 팃포탯이 상대방을 패배시킴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함께 공존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축구나 체스 등 경쟁사회의 제로섬 게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협력'이라는 삶의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팃포탯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충분한 관계의 지속성과 작은 조직이라도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협력이 형성되어지고 지속적으로 번성하게 된다. 즉, 비록 신자유주의 체제 속의 극도의 성과주의 조직 속에서도 1~2명의 극소수의 협력자만 있어도 공존공영의 협력시스템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팃포탯은 호혜주의에 입각한 전략이다.
(* 호혜주의 : 당사국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혜택을 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주의)
결코 먼저 배반하지 않고 신사적이다. 하지만, 배반에 대해서는 단호히 응징하는 반면 또 용서할 줄도 안다. 그리고 단순한 패턴으로 인해 누구든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정보가 곧 힘이 되었다. 조직마다 개인마다 자신의 숨겨진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경쟁 속에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허를 찌를 수 있는 비수가 되고 자신에게는 큰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팃포탯은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공개해서 협력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2명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꿈의 직장이라는 공직사회에도 성과주의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투신자살한 그들 옆에 함께 협력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사전에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빛이 크고 넓게 펴지는 만큼 그림자도 크고 넓게 펴진다. 현대사회가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만큼 이면에는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들이 늘어만 간다. 우리들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함께 나눌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어제 독서모임 중 "조직에서 우리와 같은 모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직장내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마음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런 모임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라는 의견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이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냥 끝나는 것인지?, 결국 시한부일 수 밖에 없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무엇인지?, 겨울이 왔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나무열매를 보면서 옆에 서있는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늦지 않는다. ...
이전에는 잡념이라고 생각했던 온갖 생각의 파편들이 이제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냥 달리다 보면 너무 삭막한 세대이다. 인간성은 소멸되고 조직이 준 목표, 사회가 강요하는 목표를 향해 달고 달은 인생이다.

차를 몰고 한강변에 나갔다. 항상 앞만보고 속도를 냈다. 하지만 그 날따라 차가 너무 막혔다. 무심코 주위를 돌아보았다. 문득 여기 강변도로가 아닌가? 길을 잘못들었나? 하고 잠깐이지만 놀랐다. 몇년을 지나다닌 길이었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그때까지 도로에 가로수가 있는지... 한강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한번도 생각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직장 속에서 언제나 경쟁자였던 동료들을 새롭게 본다. 밟고 오르지 않으면 뒤처질것만 같았는데... 옆자리 동기의 머리에 흰머리도 보이고, 눈에 주름도 보인다. 그도 어느덧 불혹을 넘어버렸다. 항상 소리치던 팀장님의 얼굴에 삶에 지친 그림자가 보인다. 강인해 보이던 모습 속에 위로받고 싶은 모습이 함께 보인다. 이제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면 어떨까? 조직이 원하는 것은 결국 성과이다. 개인별 경쟁이 아니라 함께 협력해서 성과를 내더라도 좋다.

협력과 공존공영은 200만명의 사상자를 낸 그 참혹한 1차대전 서부전선 참호에서도 싹 텄다.
현 사회는 영화 '메트릭스'를 연상케 한다. 비록 눈에 보이는 거대한 기계는 없지만 사상과 이념 등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통제받으며 하나의 큰 구조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구조물 구석구석에서 작은 부품으로 소모되어지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언젠가 마모되어서 더이상 사용할 수 없으며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되어질 것이다. 소진되어 교체된 부품으로서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차대전 서부전선의 군인들...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이슈이겠지만 참호에서 죽어가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 200만명의 죽음과 바꿀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었고 때문에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 곳에서 공존공영의 발생한 것이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조직이 준 목표를 행해 달려가는 우리들... 바로 눈 앞에 있는 승리의 보상만 보면 서로를 밟고 있지만 우리의 결국은 동일하다. 그냥 함께 가자.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우리다. 조금 빨리 가든, 조금 뒤에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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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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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의 '나쁜 사마리아인' 서문에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언급된다. 장하성씨가 멘토를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제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비록 미국경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미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신문지상에 대기업들이 오르내릴 때마다 새로운 신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 대한민국 속에 또다른 나라같은 '강남'을 생각하면 책 속의 미국과 현재의 우리나라가 거의 같은 상황임을 알수 있다.


미국의 불평등은 대부분 시장 왜곡의 결과물이다. 즉 미국의 시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행위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를 빼앗는 행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다. 즉 상위 1%가 하위 99%의 부를 착취하고 있고 상위계층에게 돌아가는 부는 하위계층을 희생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일부에서는 상위계층에 돈이 몰리면 시장이 가속화되어 모두가 그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낙수효과)하지만 현실은 돈은 상위 1%로 몰리고 사람들은 하위 99%로 몰리는 불평등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학 관계를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은 듯하다. 정보화 사회라고 하지만 대량으로 쏟아지는 정보는 왜곡되기가 쉽다. 상위계층은 여론조작을 통해서 하위 99%가 자신들도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또한 경제적 불평등과 상위계층의 공교육 축소는 균등한 교육기회의 제한을 야기하고 결국 하위 99%의 우민화와 상위계층으로의 진입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의 중요하다. 때문에 모두가 행복한 것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추구가 1차적 목적인 부유층은 강한 정부에 불안감을 느낀다. 강한 정부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유층으로부터 부의 일부를 빼앗아다가 공익을 도모하거나 하위 계층에게 도움이 되는 공공 투자에 투입하여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대규모 경제성장의 뒤에는 항상 정부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지만 부유층은 민간 시장의 실패 사례와 정부의 성공 사례를 무시하는 노력으로 확고히 작은 정부, 정부 서비스의 민관 이관, 민영화, 그리고 규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사회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는 개인과 가구들을 당면한 위험들로부터, 특히 보험을 통해 대비할 수 없는 위험들로부터 보호해야 마땅하다.
기업들을 사업상 실수에서 벌어진 결과로부터 보호하거나, 기업들의 금고를 채워 주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정부의 임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위험에 빠진 개인과 가구들을 왜면한체 각종 보조금 등으로 대기업들의 배를 채워주고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해 본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이런 불평등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정책을 바꾸면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반면에 이런 정책들을 만들어 내는 정치 과정을 바꾸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절망에 빠진다.

2016년이면 4월이면 총선이 있다. 하지만 막상 선거권을 행사하려고 해도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막막하고 결국 선거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정치에 대한 환멸감의 결과이다.


각종 비리로 얼룩진 정치에 대한 환멸감은 하위계층의 정치 참여 위축을 가져오고 이는 실제 상위계층에 유리한 선거권 박탈 효과를 가져 온다.
즉 상위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하위계층의 선거권 축소에 항상 열심이다. 이는 선거권이 축소될수록 자신들의 이권이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거참여자는 상위계층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상위계층에 유리하게 정치적 게임의 규칙 형성이 되는 것이다.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맞는 후보자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고민하고 우리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금방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을 통해서 먼 미래라 할지라도 우리의 자손들이 더이상 이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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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 산촌자본주의, 가능한 대안인가 유토피아인가?
모타니 고스케 & NHK히로시마 취재팀 지음, 김영주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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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자본주의는 머니자본주의 세계에 있어서의 궁극의 보험이다.


일본은 정부주도의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성장이 최근 천재지변(동일본대지진), 저출산 등으로 여러가지 요인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동일본대지진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에너지 수급에 대한 상당한 부담을 가진 듯하다. 저자는 화석에너지로부터 탈출하여 재생가능한 나무를 활용한 에너지공급을 통해 천재지변 등의 이유로 화석에너지 공급이 중단될 경우를 대비하고 외국로 유출되고 있는 에너지비용을 산촌지역으로 돌림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끌어나갈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이러한 산촌 등 지금까지 소외된 낙후지역에 대한 관심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중심의 현 머니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산촌자본주의는 머니자본주의에 의해서 생겨난 뒤틀림을 보완하는 서브시스템, 그리고 비상시에는 머니자본주의를 대신해서 앞에 올 수 있는 백업시스템으로서 일본과 세계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인류가 살아남을 길을 제시해준다.


최근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귀농 붐이 일고 있다. 아직은 젊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귀농은 많은 실패의 리스크가 있는 것이라 상당히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리스크가 없다고 하더라도 도시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
하지만 팽창할대로 팽창해서 이제는 터질 것같은 도심과 지금도 세계각지에서 사라지고 있는 화석에너지를 생각하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돌파구를 새로운 첨단기술에서만 찾으려고 하고 있고 더 나아가 대부분 우리들은 이러한 것은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이 고민할 문제로 생각하고 관심밖에 두는 것이 사실이었다.


산촌자본주의는 향후 우리가 추구해야할 미래상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급성장한 우리 시대는 이제 잠시 달려만 가던 걸음을 늦추고 주위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우리가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돌이킬 수없는 후회를 만들기 전에...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할 일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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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 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 / 갤리온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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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업무게시판에서 공정거래에 대한 홍보 글을 보았다. 회사의 공정거래 정책에 대해 찬성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반발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언젠가 이 씨앗이 자라면 어떠한 형태의 모습을 가질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고 이면에 있는 보고 싶지 않는 부분은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지우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라오스의 자연 속에서 여전히 전통을 유지하며 옛날식으로 살아가는 부족을 보면서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고무제품을 누구보다도 많이 사용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노동집약적 농업으로 생산되는 고무의 생산을 위해서는 라오스부족의 삶의 터전을 훼손해야만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 내용 중에는 임신한 여자가 땅속을 기어서 석탄을 캐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석탄 없이 살 수 없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이를 묵인하는 시대적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 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공정거래’를 외치고 공정거래 마크가 있는 상품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상품이 과연 공정거래의 의미에 부합한 상품인지, 단지 상징적인 마크만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즉, 이것이 진정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얕은 수인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단지, 판매자는 ‘공정거래’ 마크가 있는 상품을 판매한다는데, 소비자는 그것을 소비한다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한 유명 레스토랑의 경우 식당에서 제공되는 랍스타의 유통경로를 확인한 결과 그 랍스터가 식탁위에 오르기 위해 남미 어느 섬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잠수병으로 반신불구가 되어 가고 있음에도 이 식당은 랍스터가 공정거래 상품이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공정거래 마크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기업들은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잠수병으로 반신불구가 되는 젊은이들의 희생의 댓가는 결국 기업의 추가이윤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업은 이 이윤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공정거래인 것이다. 공정거래를 인증해 주는 기관에 일정한 수수료를 내고 공정거래 마크를 제품에 새기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아가 공정거래 마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상품에 대한 최초 원산지에 대한 확인도 겸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랍스터 판매 식당은 남미의 젊은이들까지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정거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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