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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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영복 님의 저서를 보면 감옥에서 20년을 지낸 분같지 않게 인생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인 즉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그들 개개인의 삶은 어떤 위대한 저서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그를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의 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18C 카톨릭 수도사이다.
17C에서 시작된 '이성의 시대'는 18C에 한층 철저해졌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총결산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카톨릭교회에 대한 권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것에 회의적이게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성경이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당연히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성경을 다양한 세속언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더이상 하나님이 카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말하시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불어 볼테르, 괴테 등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특히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발달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도전을 가져왔다.


종교와 이성은 항상 대립될 수 밖에 없다. 이성의 발달은 종교의 쇠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락으로 추락한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회복의 필요성.
하나님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전부인양 쏟아내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분노.


저자는 "제발 입닥치고 조용히 해! 그냥 이전처럼 내말을 들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맛을 본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소화되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까?


< 보태는 이야기 >


- 침묵은 무조건 좋을까?
침묵시 중요한 것은 평소 이미지다. 평소 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침묵과 작은 긍정의 미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의 침묵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군'하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평소 확신이 있을 때는 한마디씩(?) 던져야 한다.


- 너무 감정적인 글이나 말은 무조건 나쁜 걸까?
청소년기 시절, 깊은 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연애편지를 쓴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밤은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  다음날 아침 혹은 메일을 발송한 이후 다시 본 편지 내용이 너무 낯뜨거워 얼굴을 붉혔던 추억들...


감정적인 글과 말은 칼이 될 수 있다. 그 칼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진솔한 말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날 때 가능한 것.


상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끔은 이성의 고삐를 풀고 그냥 던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 SNS를 통한 소통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최근 SNS를 통한 무분별한 악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혹자는 상대방과 마주보지 않는다는 이점은 얼굴 붉히지 않고 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도망가기 >


폐쇄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는 사이...
너무나 이상적인 사이다.


불편한 침묵은 '어설픈, 설익은 말'을 끄집어 내게 만들고 결국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


간혹 지나친 선입견으로 무작정 어떤 대상에게 야유와 경멸을 보내기도 한다.
정작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침묵,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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