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정복의 법칙 - 남의 땅을 빼앗은 자들의 역사 만들기
데이비드 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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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우월적이며 환경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듯하다.
정복해야 할 환경에는 자연 뿐만 아니라  서구에 속하지 않은 타 민족도 포함된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분명 뛰어난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뛰어난 사상이 서구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비서구를 앞서고 나아가서는 정복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서구사회에 적용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도 결국 소수 시민권자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서구는 비서구지역의 전제주의를 지적하며 그 후진성으로 쇠퇴했다고 말하지만 서구도 결국 조금 더 많은 소수에 의한 전제주의나 다름없다.


서구의 발전은 우수한 사상의 덕이라기 보다는 '지배와 정복'이라는 공격적인 성향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같다.
세상을 지배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류가 아닌 기독교를 매개로 한 서구만을 위한 명령이라고 그들은 이해한 듯하다. 더구나 육식 위주의 식사는 서구인들의 공격성을 더욱 커지게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서구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한 공격성이 세계역사 가운데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욕심과 탐욕으로 시작된 대항해시대, 그리고 우연히 발견된 신대륙과 (그들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미개한 원주민, 이러한 조건 속에 서구의 공격성은 폭발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일말의 고귀한 정신(?)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고, 이 부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도 함께 기울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은 원주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미화하고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제식민시기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그러한 것이다.
미개한 사회가 자신들로 인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문명화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세계의 역사는,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이 살고 있는 땅을 침입하고, 다시 밀려나고, 다시 다른 곳으로 침입하고, 또 다시 밀려나는, 끊임없이 파도치는 인구 이동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진화론처럼 약육강식의 시대에 강한 공격성과 힘을 지닌 서구가 주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파도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또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역사의 흐름에 편승해 파도가 될 것인가? 아니면 파도를 맞이 하는 또다른 신대륙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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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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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지하차도에는 노숙자들이 많이 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린다. 특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다. 그들 눈속에서 슬픔을 발견할까봐 걱정이다. 때로는 혹시 내 인생에 저런 모습이 끼어들면 어쩌나하고 걱정도 된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그 길을 지나던 어느날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침울하고 쾌쾌한 노숙자들의 틈 속에 밝은 기운의 젊은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었다. 물론 노숙자를 찍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눈에는 지저분하기만 한 그 지하차도가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마치 멋진 예술작품이라도 발견한 듯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산책할 좋은 장소, 멋진 풍경 등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 중국 관광객들을 보면 좋은 풍경만이 다는 아닌 듯하다.
내 마음의 문이 그것들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면 비록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좋은 장소가 되고 멋진 풍경이 될 것이다.

나는 비를 싫어한다. 나는 대로의 매연냄새를 싫어한다. 특히 나는 내 주위가 사람들로 가득차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내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어느날 남대문 대로 옆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였다.
하지만 그 날은 내 속에 잠자고 있던 감정의 화산이 폭발한 날이다.
끓어 오르는 감정의 흐름은 침울했던 내 감정에 불을 붙인다. 
빗방울 소리와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마치 잘 어울리는 오케스트라처럼 들렸다. 멀리서 큰 경적소리가 들린다. 마치 이제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고 싶다. 괜히 궁금하다. 모든 것이 네모난 세상, 네모난 건물과 네모난 컴퓨터와 네모난 서류뭉치, 네모난 자동차 모든 것이 네모난 세상에서 우리네 마음만은 둥글어야 한다. 우리 마음까지 네모나면 세상가운데 우리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가는 시대... 네모난 건축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찌그러진 이상한 형태의 건물, 꽈배기처럼 꼬인 건물, 동대문에 우주선을 닮은 건물 등등이 세계적인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는가보다.
솔직히 이상한 건물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는 건축을 소주와 포도주에 비교했다.
소주는 화학주이다. 소주는 인간의 가치와 격리된 술이다.
포도주는 자연에서 추출한 술이다. 포도주는 만든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술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아파트처럼 인공적인 소주같은 건축물도 있지만 산속의 정자처럼 자연과 동화되는 건축물도 있다.
물론 어떤 건축물이 더 좋다 혹은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어묵 국물에 소주한잔이 그리운 사람도 있는 반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즐기고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건축물이든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과 실용성 등등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저자는 한옥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고 회색빛의 각진 아파트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축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옛 건축물인 한옥은 그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축물이듯 아파트도 현대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만약 현대 환경 속에서 한옥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아파트에만 있고 한옥에는 없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먼 미래에는 아파트도 지금의 한옥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이야기 중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건축물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욕심이 개입된 건축물은 우리를 아프고 낙심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 속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
사회복지제도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이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시대이다.
요람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와 상품, 삶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대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TV광고 속의 멋진 집에서 멋진 자동차를 몰고 휘트니스로 가꾸어진 멋진 이성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이상향을 바라보며 죽을 것처럼 달려가지만 그런 이상향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이상향을 만들어낸 대기업들 뿐이다. 

저자는 좋은 거리는 많은 이벤트와 상점들이 있는 거리라고 말한다.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의 자기주도적인 선택권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그 거리는 자본주의에서 주장하는 각종 상품들과 상점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들로 가득차 있다.
과연 그 곳에서 주어진 선택권이 자기주도적 선택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 좋은 거리는 지친 우리들에게 조금이나마 쉼을 주는 거리이다.
아무런 끌림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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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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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씨가 태어난 1959년부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까지 55년간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글이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본문중)

유시민씨의 언급처럼 역사는 기록하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책도 다분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보 성향의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된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상당히 보수적인 내 입맛에도 잘 맞다.

유시민씨가 50대 중반을 넘었고 내가 40대 중반임을 감안할 때 10년정도의 차이가 난다.
비록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기록들 중 일부는 내 삶가운데도 함께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시작은 역사공부로 시작했다. 나의 아들, 딸에게 그리고 친우 등과 대화의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책을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다소 묵직한 부담감에 밀려온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대한민국'이라고 치면 'GDP 세계 11위'라고 소개된다.
1959년 우간다와 함께 국가 순위 가장 밑에 위치해 있던 나라, 세상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대한민국의 현재 위치다.

오늘도 나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 중이다. 하지만 한 때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정부 정책을 비난하며 악플을 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 때 대통령의 이름만 잘못 불러도 경찰에 연행되던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세계곳곳의 여행지를 찾아 여행을 계획 중이다. 하지만 한 때 아무도 국외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사회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이 상태였던 것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묻어 있는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지금도 역사는 계속 흘러가고 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개개인들이 적어내려간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다. 마치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큰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가듯이...

그리고 미래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적은 역사를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본문 중)

우리는 과거를 보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어떤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써내려가야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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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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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1)물질에 대한 욕망, 2)근대화, 3)제국주의, 4)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의 갈등, 5)종교다.

유럽에서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아시아의 향신료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유럽 여러 국가들은 대항해시대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신대륙의 금과 은 그리고 식민지는 유럽 근대화의 동력이 된다.
근대화를 통해 얻은 힘은 서구 열강에 제국주의 열풍이 불게 하고 이 열풍의 주류는 자본주의로, 소외된 자들은 사회주의
그리고 극단적으로 파시즘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흐름의 근본 바탕은 인간의 욕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앞세워 욕망을 숨기고 미화시키고 거룩한 대의명분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자기애, 그리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욕망은 인간을 점점 악한 광기에 휩쌓이게 한다.

세계사를 움직인 힘들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 입은 근대화를 넘어선 탈근대화시대의 도래.
신자본주의의 독주와 이를 통한 거대 기업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

지금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터이다. 겉보기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로 발발한 것같지만 그 이면을 보면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 이상 이념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기독교 국가들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더 깊은 내면에는 구시대적인 제국주의의 단맛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기 위한 꼼수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이슬람의 테러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극소수의 원리주의자들이지만 그들의 테러를 미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슬람화된 국가들이 대부분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했던 서구 열강이 물러난 자리에 이슬람이 피어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이제 모두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면서 슈퍼맨에 가까운 힘을 가진 기계인간이 곧 탄생할 것이다. 또는 1980년대 영화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신기술를 스스로의 몸에 장착한 사피엔스이면서 사피엔스가 아닌 초사피엔스가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은 지금 세계를 보이지 않는 곳에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인 그들에게만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흐름이라면 대한민국의 소시민인 '나'의 미래는, 그리고 소시민의 아들, 딸인 내 자녀들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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