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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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쩌다가 한낱 실패한 메시아가, 그것도 수치스럽게 죽은 범죄자가 불과 수년 만에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되었다는 말인가?"(본문중)


저자 아슬란은 15세에 기독청소년캠프 참석하였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울창한 수목,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고요함과 여유로움, 게다가 친절한 상담과 격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가족종교인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였고 종교학 교수로서 기독교를 연구하여 이 책 '젤롯'을 집필하게 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태복음 7장 21절 중)


교회를 출석하면서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 분명 종교인과 신앙인은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신앙인으로서 예배드리는 '성도'는 극소수일수도 있다.
단순히 가족같은 분위기나 여러 사람들과의 교제 또는 영업적인 목적이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스스로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과정인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찬양 중에 혹은 예배 중에 순간적인 감정의 복받침으로 눈물을 흘린다던지,
삶 속에 소소한 죄에 대한 심한 도덕적 죄책감을 느낀다던지,
등등 진정한 구원의 경험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 등에 현혹되어 구원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자주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의 경험들은 교만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참회의 눈물이 교만의 눈물로 변질되는 것이다.


아슬란은 하느님의 음성을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들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예수님을 멋진 풍경 속에서 인간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그 죄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어 예수께서 대속하시고 그 대속의 은혜로 인해 믿는 자는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의미는 '죄의 노예'였던 이전의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내가 예수가 부활시 새생명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아슬란은 종교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신앙인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좀더 기독교를 허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참된 신앙인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슬란은 기독교의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나사렛의 인간 예수가 더욱 뛰어난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표현은 그렇지 않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 예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촌부였다. 그러니 그는 분명히 시골 사람처럼 촌스럽게 말했을 것이다."(본문 중)


아슬란의 목적은 기독교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는 글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시골뜨기였을 뿐이다.
예수의 이야기들은 모두 날조된 것이다.


책 전반적으로 이스라엘과 로마의 역사적 배경을 일부 가미하였으나 전반적인 주장은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역사적 근거가 없으니 날조된 것이다.
예수가 그 언어를 읽고 쓸 줄 알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등등의 주장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진다.
문제는 이러한 추측 혹은 카더라 류의 내용들이 끝으로 가면서 기정사실처럼 내용이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예수는 로마에 대한 유대의 해방을 위한 많은 실패한 정치적 혁명가 중 한명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이 간과한 것이 있다.
만약 예수가 단지 시골뜨기 혁명가였다면 그를 아는 사도들이 왜 순교하였는가이다.
단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면 살수 있는 것이었음도 불구하고 왜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킴으로 순교하였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예수를 아는 자들이 차례로 순교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왜 예수사상이 그러한 결과를 이끌어 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순교를 이야기 하면서도 시골뜨기라는 언급을 함께 하고 있다.


시골뜨기를 위해서 순교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특히 아슬란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유대파와 바울을 중심으로한 헬라파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예수를 직접 만났던 유대파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닌 것처럼 주장한다.
천상의 존재로서 그리스도는 바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대파 사도들도 순교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자신이 만든 신때문에 순교하였는가?


바울의 신앙이 허구라는 이유를 바울이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과 바울이 '십자가'와 '최후의 만찬'이외에 다른 예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아슬란은 이슬람의 '알라'를 직접 육적인 눈으로 만나고 믿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 구원'과 '성만찬'이다.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이 왜 종교계의 베스트셀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의 목적은 '인간 예수'를 찾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독교가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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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결정적 논고 -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 049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9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 책세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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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의 대립에 대한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르는 이슬람 철학자이다.

처음부터 철학이 신학과 대립한 것은 아니다. 대립이 없었다기 보다는 신학의 힘에 억눌려 지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같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철학이 신학과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해 주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신학을 비합리적인 분야로 전락된 반면 철학은 이성에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로 과학의 발달로 인한 시대적 부흥에 함께 편승한다.

이제 철학은 신학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함부로 무너트릴 수 없는 범주의 것이다.
과학도 철학도 인간의 이성으로 여전히 해답을 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을 신학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과학의 발달하면 할 수록 인간의 이성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던 부분들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서 신학이 도리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저자 아베로에스는 1126~1198년에 활동하던 이슬람 철학자로서 당시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철학은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해 한창 미움을 받고 있었다.

저자는 이슬람의 <꾸란>이 철학을 금하지 않았고 도리어 철학을 활용해 신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할 수 있으며, 나아가 <꾸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오직 논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지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사유는 결국 사유 당시의 철학자의 지식과 인성, 그리고 시대적 환경과 분위기 등 개인적, 시대적, 지역적 환경의 범주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이해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믿지 못하던 당시 중세의 시대적 분위기는 (물론 현대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지만) 신학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중세 암흑기를 깨트리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근대화를 이끌게 되지만......

45억년의 지구 역사 중 현대의 과학이 확립된 것은 불과 200~300년 상간이고 지금도 계속 발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지고 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천동설을 주장하였다.
세상은 언제든 개벽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도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는 관념들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우리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관념들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인지한 상태' 또는 '그렇게 하기로 정한 규칙'에 가깝다.

창조주가 하늘과 땅과 인간과 동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누가 온전히 긍정하거나 온전히 부정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사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보이지 않는 것,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지구가 탄생한 것은 약 45억년 전이다. 
지구상 생명체가 나타난 것은 약 38억년 전이다.
지구상 호모사피엔스나 나타난 것은 약 20만년 전이다.
지구상 호모사피엔스가 과학적 성과를 거둔 것은 약 300년 전부터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전 44억 9,980만년 동안 이 지구에 무슨 일 있었는지 누가 알수 있을까?
겨우 300년의 성과로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는 인간들은 어쩌면 또다시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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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 믿음의 시험
알렉 모티어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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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론적으로 천국에서 만나는 자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증거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이냐, 행위냐,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 등등 각종 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칼빈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성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웨슬레는 구원은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믿음을 지킬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구원은 취소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나 심판대에 설 때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설까지 나왔다.
이는 신앙인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현 시대에 대한 외침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한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찬양과 봉사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은 행위의 공로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 중에도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으며 이는 심판대에서 갈릴 것이다.
예배 중에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다면 누구는 천국에 올라갈지라도 옆에 있던 누구는 남겨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올바른 믿음으로 구원받았는지 여부(자신이 이단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는 스스로 항상 점검해야 하며 많은 인간적인 논란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구원받은 자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믿음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만약 믿는 자의 겉모양을 가졌던 자가 그 모양을 잃었다고 해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던 자가 믿음을 잃어 그 구원이 취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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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양장)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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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이야기는 현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경건한 이야기다. 다시말해 현세/인간의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해 온 다윗에게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자의 포효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만 말씀하시는 하나님, 교회 속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때문에 성경을 덮거나, 교회를 나오면 모두가 세상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단절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잘 해 나갈 수 있는 삶의 분야는 단 한가지도 없다.

다윗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삶을 살았다. 다윗이야기에는 단 한 번의 기적도 없지만 그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모든 세세한 사건 속에서 언제나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야기 내부에서 조용하고 꾸준하게 숨어서 작용하는 소재는 바로 다윗의 인간됨이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다윗일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더욱 인간됨이 뚜렷해 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하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살피고 거기에 반응하는 삶이다. 즉 삶의 출발점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다.

어떤 직분, 직업, 업적이 있더라고 특권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는 길을 발견한 감격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해 놓고는 점차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일을 대신 떠맡아,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자리에 서서 으스대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교회가 도덕적, 사회적 부랑자 모임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의 기대에 전혀 맞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교회일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들어온 한 줄기 빛나는 아름다움이 그들 위에 비칠 때면, 우리는 그 동안 죄로 어두워진 내 눈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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