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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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한 끊임없는 자극들은 현대인의 외부 인지 감각을 무디어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상품의 판매와 소비가 생명인 현대사회의 탐욕자들은 무디어진 감각을 깨워 더 많은 판매와 소비를 촉진코자 좀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진화하며 더욱더 자극적인 괴물들이 되어 왔고 우리네 현대인들은 그 괴물들에게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현대인들이 그 괴물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각종 전투와 대량 학살을 곧바로 필름에 담아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감 넘치는 영화와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화면 속에 담겨진 전쟁과 대량 학살은 새로 개봉한 액션영화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다. 즉 화면 앞의 우리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이 담겨진 그 전투와 대량학살이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연극이나 영화의 웅장하고 화려한 장면) 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가상과 실제의 모호한 경계선은 청소년들이 이슬람 무장단체인 IS의 대원으로 참여하는 비상식적인 결과를 낳았다.
현대사회에 대한 반항과 스트레스를 가상세계에서의 폭력으로 해소하던 청소년들에게 IS에 가담하는 것은 어쩌면 재미난 새로운 가상게임으로의 접속과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지구촌을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하였다. '나비효과' 이론이 이렇듯 삶가운데 충실히 적용하는 시기도 없었다.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의 결정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미지'로만 전달되어지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실제'가 아닌 '스펙터클'로만 인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미지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만 하고 결코 자유로워져서는 안된다.


피로사회라는 별명을 가진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눈 앞이 아닌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기아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면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때로는 진정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디어져만 가는 감각 속에서 결국 그러한 사진도 우리들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자극적인 이미지들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결국 그냥 무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주관적인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사진도 결국 누군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누군가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선택된 이미지는 당시 일어난 어떤 일을 그저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은 깨끗이 처리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이다.


둘째, 사진은 연출되어지고도 한다. 자신들의 고통이 좀 더 커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는 뭔가를 고발하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행동까지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연출을 통해 더 충격적이고 무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셋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 즉 가난한 나라들에서나 빚어지는 비극이라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넷째, 특정한 문제를 광범위한 지역 또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느끼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나 고작 인간 본성이나 시대적인 사악함에 대한 한탄 정도에만 머물게 한다.


다섯째, 사진의 예시 기능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의견, 편견, 환상, 잘못된 정보 등을 조장한다. 사진은 특정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며 다만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더구나 보편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를 특정한 사진을 통해 예시함에 따라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과거 특정 사건을 떠올릴 때 이야기가 아닌 단편적인 사진을 통해 기억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보여지는 것에 대한 단순한 신뢰가 아닌 그 이면의 실제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듯 하다.


우리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인간은 관음적 존재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상은 좀더 폭력적이고, 좀더 음란한 각종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이라는 쉬운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단순히 관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가 곧 시들해진다.


우리는 연민을 느낌으로써 그들의 고통과 우리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무고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통이 없는 현실의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구 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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