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자책]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갑자기 모든 게 다 귀찮아져버렸다. 어떤 곳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창녀와 뚜쟁이의 아들

그리고 그들에게조차 버려진 소년.

정신질환 아버지가 창녀 어머니를 죽이고 버린 이.

아랍인을 혐오하는 유럽에서 자란 아랍인 모하메드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결코 우리들의 리그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그를 저자는 주인공으로 세우고 무시되어져 온 그의 생각과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랬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영화를 보면 허름한 옷의 소매치기 소년들이 자주 등장한다.

술집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소년들.

시장바닥에서 기웃거리는 초점 없는 눈을 가진 주눅 든 아이들.

영화에서는 그들은 배경화면이다.

영화가 현실을 비추어주듯 이들은 우리 삶 가운데서도 이미 들어와 있다.

다만 우리와 리그가 다르기 때문에 알지 못했을 뿐.

 

부산행을 보라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 오로지 피와 육을 향한 욕망만으로 앞으로 달리는 좀비처럼 우리는 우리들 욕망의 먹이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주위에 뒤처지고 넘어진 이들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라보지만 결국 이면엔 먹이 경쟁에서 낙오한 또 다른 좀비를 보듯 혐오와 경멸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산과 바다로 동시에 바캉스를 갈 수 없어서 한군데를 선택해야 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모하메드에게 과 같다.

때문에 스스로 세상과 격리시키고 더욱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는 로자 아줌마에게 집착하게 된다. 세상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만 결코 냄새나는 손을 주지 않는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로자 아줌마는 한때 창녀였고, 지금은 돈을 받고 창녀들의 자녀를 키워주는 일을 하는, 지금은 죽음의 늪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병든 노인네다.

그리고 모하메드의 과거와 현재의 생이다.

 

함께 할 수도, 떠나보낼 수도 없는 생

로자 아줌마의 죽음이 두려워 집에 들어갈 수도 없지만, 반면 안락사를 강하게 주장하는 모하메드.

을 잃어버릴까 두려우면서도 똥 같은 생을 안락사 시켜버리고 싶은 모하메드의 내적 갈등을 말해주는 듯 하다.

 

로자 아줌마와 모하메드의 비밀장소인 지하 대피소에서 조용히 처절하게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생을 맞이하면서 똥 같은 과거와 현재의 인생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죽은 로자 아줌마에게 끊임없이 화장시키고 향수를 뿌리며 생의 끈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 과거와 현재의 생은 그냥 흘러갈 뿐이다.

세상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자기 앞의 생으로 끌어낸다.

이제 과거와 현재의 생을 떠나보낸 그는 자기 앞의 생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생은 똥 같이 않기를 기도한다.

 

어제든 오늘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저 흐르는 시간일 뿐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그런데도 계속했던 건, 상상의 경계를 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사회적 자아가 견고하다고 믿었다. 즐거운 한때와 인생을 맞바꿀 만큼 분별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 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어젯밤 운명의 손에 내 목을 내주게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내재한 악을 약소평가한다. 또는 눈에 보이는 가식적인 모습이 자신의 전부인 양 속고 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밝은 자리에 모인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하며 빛을 내지만 어둔 자리의 '나'는 결코 사랑도 우정도 논할 수 없는 추한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바로 확인할 수 있지 않나?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은가?

유진은 선천성 '파괴자'일까, 후천성 '파괴자'일까?
유진의 살인들은 피할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느 책에서 세상 가운데 어둠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전쟁으로 해소시킨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인간들이 범하는 각종 범죄로도 결국 다 해소하지 못한 악의 기운을 전쟁으로 풀어버리는 것이다. 

"깜부기불처럼 깜박대면 되살아나는 살인의 기억들, 어두운 공사장에서 느낀 충만한 감정과 경이로운 기분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살인 후 유진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

3류 좀비 영화에서 '인육을 먹어보지 못한 좀비는 있어도 인육을 한번 밖에 먹지 않은 좀비는 없다."라는 대사를 본 적이 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사이버상 유선상 떠돌아다니는 타인의 고통의 순간들을 가학적인 쾌락의 눈으로 본다.

악이 주는 쾌감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이다. 의지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인 것이다.
주인공 유진은 악에 중독된 것이다.

세상 가운데 신의 사랑은 치료제이면서 진통제이다.
인간 속의 악을 통제하기도 하고 치료하기도 하니까.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오늘도 나는 내 속의 낯선 그것과 마주한다.
나와 유진이 뭐가 다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영혜처럼 누구나 꿈을 꾼다.
그것은 일탈의 꿈이다. 자아 깊숙한 어둠 속을 향한 꿈이다.
영혜와 그녀의 언니가 다른 것은 단지 무엇인가 그 어둠 속을 향한 여행을 하지 않도록 잡고 있는 이 쪽 세상의 끈이 있는가이다.


예술과 욕망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처제인 영혜와 섹스를 한 그를 우리는 욕한다. 하지만 우리 맘 속 깊숙한 곳에는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한 욕구가 우리 삶을 삼키기 위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그를 욕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것을 그가 이미 정복했다는 것에 대한 질투가 아닐까?
우리 속에 깊고 강렬하고 탁한 냄새와 옅은 어둠 속에 있는 그것들이 화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남역 묻지마 살인으로 우리 시대 속에서 일탈하며 떠들썩하게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는 그들은 결국 그들이 아닌 그 어둠 속 그것들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일탈을 꿈꾼다. 현대 사회의 숨막히는 규제와 질서 속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로움을 내면 깊숙이 그린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이미 만들어놓았고 세뇌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뇌로 인해 우리는 이성이라는 틀을 만들고 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고 있다.


일탈의 범위는 주위 사람이 용납할 수 있는 정도와 용납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있다.


우리는 전자의 일탈을 통해 내면의 그것들을 겨우겨우 통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사회의 과도한 압박은 내면의 그것들을 더이상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게하고 결국 거대한 폭발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고 가고 있다.


어쩌면 영혜는 그것들을 완전히 내면에 묶어버림으로, 그녀를 범한 그는 그것들에게 집어 삼켜져 더이상 자기가 아닌 그것들이 되어버렸는지도.
다만 영혜의 언니만이 6살난 아들 지우라는 세상의 끈에 연결되어 끊어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가운데도 끊임없는 일탈의 욕구가 나를 압박하고 있다.
마음 속 깊숙한 그것들이 마치 진정한 나인양 주장할 때마다 나는 더욱 또다른 만들어진 나로 겹겹히 둘러쌓고 방어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진정한 나는 사라져 찾을 수가 없고 결국 나 아닌 나들로 내 삶은 피로해져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결말로 나를 이끌어간다.


결국 모든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누군가를 배려하거나 누군가를 위하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폭발을 우리는 모두 욕망하고 있다.
'자기애'는 모든 사람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의 중심에 있고 그것이 진정한 나이면서 또 내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다가 보면 세상과 잠시 이별하고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러다가 그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라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본문중)


만물의 창조주나 수천만년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면서 겨우 100년남짓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 것이지......
왓치맨이란 영화를 본 적있다.
이 영화에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수퍼영웅이 된 사람들과 사고에 의해 실제 신과 같은 존재가 된 닥터 맨하튼이라는 반신이 등장한다.
수퍼영웅들은 스스로를 절대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더 나아가 닥터 맨하튼에 도전한다.
닥터 맨하튼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인간 중 가장 똑똑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냥 똑똑한 인간일 뿐이다.'
최근 200~300년 사이 인간의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이제 창조주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하지만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이룩한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증기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 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본문중)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갈 때 그의 참모습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그것을 인지한 우리들은 그만큼만 그를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간다.
물론 우리가 가진 가치관이나 편견이나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통해 가지게 된 사전지식으로 인해 조금더 이해가 빨라질수는 있겠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본문중)


인간의 '자기사랑'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선이면서 또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절대악이다.


좀더 깊숙이 들어가서보면 인간의 삶은 유치하다.
자기사랑의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존재케 하기 위한 결정을 지속하면서도 때로는 덧없는 순간의 쾌락을 위해 유치한 선택을 하게 된다.
욕망충족의 쾌락은 그것이 달성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극에 이른다.
실제 그 쾌락을 경험할 때는 이미 쾌락의 덧없음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의 절정은 마치 마약과도 같다.


'이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화해한다. 모든 곳에서 그는 영접받고 축복받을 것이다. 저를 맞아들이는 장소의 형태와 결합하여 차츰차츰 그 형태와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다. 완강한 저항이 철저한 복종으로 변했다가 어떤 새로운 생존 속에서 다시 반항으로 소생할 것이니 이 소용돌이와 평화의 교차가 우주적인 삶을 구성한다.'(본문중)


태초에 인간은 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땅에 대한 욕심이 많다. 인간의 역사는 땅싸움의 역사였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도 땅을 좋아하는 인간은 땅을 그냥 두지 않는다. 마치 원수인 것처럼, 땅이 인간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땅을 괴롭힌다.
남산 산책을 갔다. 분명 산에 갔지만 흙을 밟을 수는 없었다. 옆에서 누군가 '그냥 두지' 하고 말한다.
흙을 무척이나 그리워하면서도 인간이 만든 문명은 우리와 흙을 강제 이별시킨다.


우리가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갈수 있는 방법은 '죽음'이다.
'완강한 저항'이 죽음을 통해 흙과 하나되는 '철저한 복종'이 된다.
어쩌면 흙과 하나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흙과 분리되려고 하는건가?


하지만 죽음은 결국 우리를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


흙으로 돌아간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본문중)


인간은 항상 외롭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신의 반쪽만 보여주기 때문에 반쪽짜리 결합만 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인간은 계속 외롭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숨겨진 반쪽이다. 하지만 그 숨겨진 반쪽을 함께 할 누군가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만약 그(그녀)가 있다면 내 생명을 던지리라.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출발할 때면 항상 무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과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여행은 우리에게 피곤함과 금전적 부담과 시간의 낭비를 준다.
그런 것들을 감수하면서도 왜 우리는 얘타게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걸까?


우리는 자신을 찾고 싶어 한다. 큰 기계속에 작은 부속품으로 살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와 만나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본문중)


슬픈 것은 그렇게 어렵게 만난 자신은 존재라는 관점에서 너무도 의미없다는 것이다.
세상가운데 돈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하지만 세상의 존재들 가운데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의 많은 존재들 중 내가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냥 존재들이 흘러가는 데로 같이 흘러갈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서 실패한 여자 세릴 스트레이드, 그녀는 무너진 삶을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걷기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어쩌면 인생은 PCT 걷기와 비슷하다.
정상을 향해 오르다가도 다시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고, 끝없는 평지를 걷다가고 갑자기 숲이나 큰 강 등을 만나기도 한다.
세릴이 PCT의 종점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이런 경험들을 통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본문중)"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라는 끈으로 잘 유지되고 있던 세릴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던 끈이 풀어져 버린다.
완전히 무너진 그녀는 무분별한 섹스와 마약에 빠져서 결혼에도 실패하고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그녀가 전혀 산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그리고 체력도 없는 그녀가 혼자서  PCT 4,285km를 걷기 시작한다.

"다시 배낭을 메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그냥 계속해서 길을 걷는 것뿐.(본문중)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된다.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생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죽음이후의 삶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천국이나 지옥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단지 '무'로 돌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극한 고통의 순간에는 사후의 세계가 무엇이든 그냥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하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결정은 도박이다.
사후에 더 고통의 순간이 나를 기다릴 수 있게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이 그나마 극한 고통 속에서도 자살을 막아주는 공로자들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장 최악의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까.(본문중)"

가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때 이렇게 세릴과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한다.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좋아질 일 밖에 없다.
그러니 기뻐하자.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어. 언제나 누구의 딸, 엄마, 그리고 아내였지. 나는 나 자신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어.(본문중)"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직장동료, 상사 등등 세상에서 연관되어진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교육을 통해서 또는 TV, 신문 등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서 소속된 국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세계 정의 등등 범국가적인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라 무엇인가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요구에 따라 살고 있다.
이 속에서 '나'는 없다.

개인적으로 산 속을 걷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 가고 싶고 힘든 길을 선택할 것이다.
내 속에 깊이 배여있는 지독한 냄새나는 찌꺼기들을 모두 땀과 함께 배출하고 싶다.
마지막 내려오는 길에 계곡물에서 이 찌꺼기들을 남겨 놓고 올 생각이다.
산이 욕하지는 않을 것같다. 
아주 보잘것 없는 나란 존재보다 산은 훨씬 대범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