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6426124(모스크바 기준 시간)에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폭발에 의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 강하물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 등에 떨어져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후 소련 정부의 대응 지연에 따라 피해가 광범위화되어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최악의 원전 사태로 기억되는 체르노빌 원전 사태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고로 인한 전체 피해는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 폭탄 피해의 열 배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사고가 터진 직후 30명 이상의 소방관과 원전 근무자들이 사망했다.

또한 방사능으로 인해 인근 지역의 동식물 생태계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사고가 터진 뒤 10년이 지나도 작물이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유럽도 즉각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 작물들이 오염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노르웨이 북쪽 라플란드 지역의 순록 고기 또한 먹을 수 없을 만큼 오염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유럽 공동체는 일정 기간 동안 동부 유럽의 육류 반입을 금했다.

사고가 터진 후, 일부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6500명에서 45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방사능 노출로 인해 암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2000, 세계보건기구(WHO)"사고 후 14년이 지난 시점에서 방사능이 공중위생에 큰 위협을 주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전체적인 암, 사망률 혹은 인체에 해로운 질병이 증가했다는 과학적인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며 상반된 결과를 내놓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태 이래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된 RMBK라고 불리는 원전 방식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에 대한 보안 및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론이 다양하다

 

후쿠시만 원전사고

2011311일 발생한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과 곧이어 들이닥친 거대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수소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가동 중이던 원자로의 핵분열은 자동으로 긴급 억제됐지만, 전력공급이 중단으로 냉각시스템이 마비돼 핵연료봉이 고열에 노출돼 수소폭발이 일어났고, 방사능 물질이 묻은 수증기가 외부로 유출됐다. 이로 인해 모두 2만여명의 희생자가 양산됐고, 여전히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17만여명에 달한다. 후쿠시마 원전 폐로까지는 40년 가까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 들어가며 >

 

운명은 한 사람의 인생이고, 역사는 우리 모두의 삶이다. 나는 운명을 보존하면서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 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체로노빌의 목소리는 원전사고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 있었던 인생들의 목소리를 모은 것이다.

 

< 그들의 목소리 >

 

프랑스에서 우리 원전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군사적 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것이지만, 평화적 핵은 집집마다 있는 전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이 쌍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범자라는 사실을......

 

갑자기 적의 모습이 달라졌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해도 떴고, 연기도 안 보이고 가스 냄새도 안 나는데...... 총도 안 쏘는구먼. 이게 전쟁이야?

 

버림받은 동물들의 비명...... 자신의 언어로 소리쳤다.

 

하지만 체르노빌 구름이 나흘 만에 아프리카와 중국에 도착했는데, 체르노빌이 발생한 후에 멀고 가까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알고 보니 지구는 정말 작은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거기서 영웅은 못 봤소. 미친 사람은 봤지.

 

과학자들이 헬기를 타고 날아왔소. 고무로 만든 작업복에다 긴 장화, 보호고글까지 완전무장하고. 딱 보면 우주인이었소.

그런데 우리는 어쩌라고?

 

왠지 그가 나를 보던 것처럼 나를 관찰하시는 것 같아요. 구경하시는 거잖아요. 잘 기억해 두려고. 우리를 대상으로 무슨 실험을 하시나 봐요. 다들 재미있어 해요. 그런 느낌을 떨쳐낼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그게 죄가 되는지 아세요? 아이를 낳는 것 말이예요.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잖아요. 행복하고 싶은 게 잘못인가요.

 

우리가 어려울 때 조국은 버리지 않는다”~아무것도 몰랐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방사선 측정기가 어떤 수치를 보여주면, 신문에는 완벽히 다른 이야기가 실렸다.

 

제발...... 우리 좀 건들지 마십시오! 떨어지세요! 당신들은 잠시 와서 이야기만 하고 가지만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은 그것 주위를 빙빙 돌고 있어요.

체르노빌 주위를......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단 하나에요. 체르노빌.

 

체르노빌은 밭에서 감자를 안 캐고 남겨두는 것보다는 안 무서워요.

 

누구 잘못이죠?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아닐 거예요!

 

발전소 소장과 그날 당직을 섰던 기술자들입니다. 과학 잘못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자도 체르노빌의 희생양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과학적 연구 대상인 것 같습니다. 다국적 실험실. 유럽의 중심에서. 우리 벨라루스 인구는 1천만 명인데, 200만명 이상이 오염된 땅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매우 자연스럽게 차려진 실험실이지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미래가 두려워 이곳으로 오는 것입니다.

 

무언가 듣지도 못한 것이 나의 세상을 파괴했다. 그것이 기어오르며, 내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문과 잡지는 더 무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경쟁한다. 특히 여기에 안 와본 사람이 공포를 더 즐긴다.

 

영웅, 영웅. 그들은 오늘날 누구일까? 나에게 있어 영웅은 위에서 뭐라 명령하든 환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의사야. 그리고 그런 기자, 과학자가 영웅이야.

 

우리은 세상을 아이처럼 보았다. 유치원생같이 세상을 살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체르노빌 후에 더 똑똑해졌다. 성숙했다. 나이를 더 먹었다.

 

구역으로의 첫 방문. 거기로 가는 길에, 모든 것이 회색 재로 덮여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까맣게 그을린 채로, 그런데 도착해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

 

집 안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겁을 냈지만 나는 초대에 응했다. 들어갔다. 밥상 앞에 앉았다.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었다.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운명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내와 아이 둘이 있고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10전에는 내가 그랬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으나 지금은 그 사실이 부끄럽다.

그 저주받은 샌드위치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건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먹어야 했다.

 

이만큼 안 아팠을 수도 있었을까? 건강할 수도 있었을까?

아마도, 조금 더 생각을 했더라면 ......’

제대로 된 방호복, 특수안경, 마스크가 필요했어. 그런데 그중에 아무것도 못 받았지. 사실 우리도 안전규정을 따르지 않았어. 생각을 안 했지.’

 

우리 문화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기주의다. 미약한 정신의 표징이다. 나보다, 내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언제나 있었다.

 

질병에 대한 모든 자료가 기밀또는 고급 비밀이라는 도장 아래 감춰졌다고 했다. 의학과 학문을 정치로 끌어들였다고 했다.

 

사람은 영원하지 않지만 고방사능 입자는 죽지 않는다. 사람은 사망 후 1천 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불타는 입자는 계속 살 것이다. 그리고 이 먼지는 또다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민족을 배반한 권력이 침묵할지라도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이성에 대한 믿음이 사람을 떠나면, 그 마음속에 짐승 같은 두려움이 들어가요. 그리고 괴물이 기어 나오죠.

 

젊은 친구들이었소. 그들은 지금 죽어가지만, 자신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잘 아는 친구들이이오. 그들은 뛰어난 문화 의식을 가졌소. 승리의 문화, 희생정신의 문화......

 

이제 이들은 없소. 우리 박물관에 있는 서류만 남았소.

 

우리 마을에는 묘지가 세 개 남아있다. 첫 번째는 사람이 묻힌 오래된 묘지고, 두 번째 묘지에는 우리가 버려 총살당한 개와 고양이, 세 번째 묘지에는 우리 집이 묻혀 있다.

우리는 집까지 장사지냈다.

 

며칠 동안 텔레비전 앞에 앉아 고르바초프의 연설을 기다렸다. 하지만 권력은 침묵했다.

 

알파, 베타, 감마 입자도, 방사선 생물학도, 전리 방사선은 물론, 동위원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에게 이런 주제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대신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성과 군사적 용기의 상징, 서양 정보원의 음모에 대해 설교했다.

 

모든 엄마들이 병실이 아니라 화장실, 목욕실에서 울었다. 병실에 돌아올 때는 발랄하게 들어왔다.

얼굴색이 좋아졌네. 몸이 낫는가 보다.”

엄마, 나 좀 병원에서 데리고 가줘. 여기 있으면 죽을 것 같아. 여기서는 다 죽어.”

어디서 울어야 하지? 화장실에서?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들이 다 거기 있는데......

 

사람이 블랙박스라니......

 

우리는 우리가 평범하게 산다고 생각하지. 일도 하고, 먹고 살고. 사랑에도 빠지고. 그런데 아니더이다! 알고 보니 우리는 미래를 위해 정보를 기록하던 중이었소.

 

눈을 떠요. 다시 잠들어요. 또 조용해요. 죽은 것처럼......

아르톰, 눈 떠......’

아들이 못 죽게 괴롭혀요.

 

처음에는 누구 잘못인가?’가 가장 중요했어요. 누군가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에요.

나중에 더 많이 알게 되자,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1년이나 2년 있다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지속할 거란 사실을 받아들인 지금, 다시 옛일을 떠올리기 시작했어요. 한 장, 한 장 뒤로 넘겨봤어요.

 

베란다로 나가 아이들 들어 올리고는 잘 봐! 기억해 둬!”라고 말했어요. 함께 보던 이들은 바로 원자로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어요.

우리는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우리는 평화적 핵도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그날 밤 온 도시가 잠에서 깨어자니 못할 수도 있다는 걸......

 

< 우리의 이야기 >

 

대한민국2015년도 기준으로 4(고리, 영광, 울진, 월성)의 원자력 발전소와 24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이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세계 6위이며, 회사 단위로는 세계 2위의 원자력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있다. 원전은 한국 내 전체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912일 오후 83254초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8지역에서 규모 5.8의 본진이 일어난 바 있다. 이는 관측사상 역대 최강의 지진이다. 19일 현재까지 374회의 여진이 발생하고 있다.

 

대한민국 원전은 울진 경주 울산 부산을 잇는 동해안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위치할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린 덫에 걸린 것이다. 빠져 나갈 수 없는 진화의 덫에...


신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가장 이상적인 사상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더이상 미국, 유럽 등 서구의 적수가 없어진 시대 상황에서 이들의 사상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냉전시대에는 흑백이 명확히 갈리는 시기였다. 즉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뚜렷이 구분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더이상의 흑백논리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세계를 두 진영으로 묶어주던 이념전쟁이 끝이 나자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나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 등의 논쟁처럼 냉전시대에 숨숙이고 있던 각 지역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가 그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스타워즈' 시리즈를 빠짐없이 보았다. 주요골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과 '반란군'과의 전쟁이다.
제국은 옷과 비행선 등 모든 것에서 획일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란군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복장들, 그리고 다양한 비행선이 등장한다.
로마제국의 정복전쟁영화도 비슷하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주제가 한 때는 정의로운 로마군과 야만인들과의 전쟁이었다면 최근에는 로마군의 무자비함과 핍박받는 종족의 투쟁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자신들과 익숙치 않은 문화를 인정할 수 없었고 이는 야만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국 유럽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의 대학살이 일어난다. 지금 아메리카 대륙은 옛 원주민들의 자취를 찾기가 힘들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의 땅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과 익숙치 않은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배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인류가 이동할 때마다 이동한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가 이루어졌다고 언급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청교도가 북미에 정착한 이후 인디언과 버팔로가 거의 멸종하고 백인과 소 같은 새로운 인종과 가축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이런 일들이 아주 오래전 고대부터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라다크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서구는 자신들과 다른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 시점에서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시점에서 가장 우수한 사상과 문화라고 주장하며,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이것들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는냐를 생존의 문제로 끌고 간다.
획일적인 경제시스템, 획일적인 교육, 획일적인 조직문화 등등으로 세계가 물들어가고 있다.
몇일 전 명동거리에서 많은 외국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흰 피부도, 검은 피부도, 노란 피부도 있었지만 모두가 획일적인 옷과, 획일적인 가방과 등등으로 무장해 있었다.

서구문화의 침략이 시작된 이후 라다크는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획일적으로 서구화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라다크를 부끄러워하며 그들의 문화를 잊어가기 시작했다.
라다크의 전통적인 것이 사라지고 서구화된 획일적인 건물과 교육과 문화 등으로 변해갈 때 그것을 발전이라고 말하며 '서구의 화려한 불빛'을 이상형으로 삼고 달려가고 있다.
물론 그 화려한 불빛에 가리워진 그림자를 그들은 보지 못한다. 그리고 서구도 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 준다고 하라도 라다크에는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라다크에는 '조'라는 라다크의 척박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된 가축이 있다. '조'는 농사일에 사용되어지고, 우유를 공급하고, 고기와 연료를 공급하는 라다크에서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보다 '소'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소'는 라다크 환경에 맞지 않는 가축이다. 다만 서구의 색깔에는 맞겠지만...


라다크의 전통적인 집들은 라다크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진흙'을 이용한다. 하지만 지금은 멀리 다른 지방에서 만들어진 '벽돌'을 수입한다.


라다크의 모든 가족과 이웃들은 자연에서 함께 일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부모와 자녀, 이웃간, 그리고 자연과 융화되어 간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깨어졌다. 서구화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은 가족과 이웃을 떠나 도시로 가야했고 자연은 개발을 위해 파괴되어야 했다.


겉보기에는 라다크는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예전의 행복을 잃고 있다. 그들은 행복하고 여유로웠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자랑스러웠으며 부족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다크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 바쁜 일상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이 자랑스럽지 않다. 도리어 부끄럽다. 저 멀리 서구는 너무도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그 서구와 닮아가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상은 쉽게 오지 않고 결국 다시 좌절하게 된다.
라다크는 더이상 행복하지 않다.


서구에게 라다크는 새로운 정복지이다. 이전에는 물리적인 정복과 정복지의 인종에 대한 청소가 이루어졌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문화적인 정복과 정복지의 전통문화에 대한 청소가 이루어지고 있다.


라다크에는 반개발기구인 '라다크 프로젝트'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라다크 프로젝트'는 서구의 정복전쟁에 대한 반란군이다.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란군들이 활동하고 있다. 포스터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각종 저서에서부터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각종 노력이 반란군인 것이다.
반란군의 최종목표는 무조건적인 서구문화에 대한 배격이 아니다.
다만 각 지역별 전통문화와 서구문화의 우수한 면이 함께 융합되어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라다크 젊은이들이 라다크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라다크를 더욱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토대 위에 서구문화의 우수한 것들이 덧입혀져야 하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깨어난 포스'에서 제국의 '핀'이라는 군인이 제국의 잔인한 행위들에 염증을 느끼고 제국군의 전투복을 벗고 탈출한다.
제국군에게 전투복 헬멧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헬멧을 벗은 제국군을 본 기억이 몇번 없다. 전편의 최고 악당이면서 주인공인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였던 '다스 베이더', 새로이 개봉한 깨어난 포스의 악당 '포 다메론', 그리고 제국군 병사이면서 탈출한 '핀'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헬멧을 벗을 때 모두 '악'한 마음이 잠시 흔들린 시기이다. 그리고 '핀'은 완전히 악한 마음에서 탈출했다.


지금 우리는 획일적인 사각형 건물안에서 획일적인 사각형 컴퓨터와 획일적인 사각형 서류를 들고 조직의 목적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조직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만이 목적이다.
수많은 제국군이 있었다. 그들도 모두 동일할 것이다. 조직내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풍요로워지는 삶은 누구에게 큰 유혹이고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핀'은 헬멧을 벗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났고, 종국에는 '반란군'에 합세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삶의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는 위험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검증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 가장 밑에 있는 우리들이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공존 - 하랄트 뮐러의 反 헌팅턴 구성
하랄트 뮐러 지음, 이영희 옮김 / 푸른숲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7년)'에 대한 반박으로 하랄트 뮐러가 '문명의 공존(2000년)'을 발표한다.


헌팅턴에 따르면, 세계사는 국가간의 대립과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을 마치고 이제 '문명'간 대립 단계에 들어섰다.

서구가 제국주의의 우월감을 즐기는 동안 그 밖의 세계는 회한을 쌓아왔다. 이는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가 붕괴된 현재, 서구 가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문제는 아시아의 경제 성장, 이슬람의 인구 성장 등 세력 관계가 비 서구 세계에 유리하게 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이러한 비판이 더욱 거세지는 현상이다.
비 서구권인 아시아, 이슬람, 일본 등 각각의 문명들은 문명별로 핵심국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이러한 연합된 문명간의 갈등은 제3차 대전의 도화선(특히, 이슬람의 피의 경계선)이 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변화된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서구에 대한 비 서구의 반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헌팅턴은 특별히 이슬람문명을 가장 위험한 문명으로 지적하는데 최근 IS의 테러 등이 빈발하고 있는 시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뮐러는 이런 헌팅턴의 주장을 1)현대사회의 '탈신화화'와 2)국제협력과 교역 활성화를 통한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반박했다.

1)현대사회의 탈신화화

헌팅턴은 문명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종교를 들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탈신화화' 경향은 더이상 종교를 통한 연합을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최근 이슬람국가를 외치며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 테러를 일삼고 있는 이슬람권조차도 종교적 연합은 소수 근본주의자들에 국한된 주장이다.
1991년 제2차 걸프전쟁 당시 이슬람 국가들은 '거대한 사탄' 미국에 저항하는 손가락질 한 번 하지 않았고, 밉살스러운 경쟁자 이라크에 훨씬 힘이 센 서방 군대가 폭격을 퍼붓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했을뿐만 아니라 상당수는 '서방' 동맹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2) 국제협력과 교역 활성화를 통한 '세계화'

얼마전 저녁식사 중 브라질이 1930년대 대공황이후 최악의 경제침체를 맞이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브라질은 세계 9위의 남미 최대 경제 대국이다. 하지만 독재와 억압에 의한 비정상적인 근대화 과정과 이로 인한 부패와 빈곤은 GDP 세계 9위라는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부채가 GDP 대비 66%라는 오명까지 함께 하도록 했다.
최근 국제사회는 영토확장을 통한 국가세력 확장보다는 경제와 복지에 몰두하고 있다. 때문에 국가간의 경제 교류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경계까지도 허물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사회는 더이상 종교 등의 요소가 연합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의 자국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 행사도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문명내에 핵심국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한 국가가 같은 문명내 다른 국가들을 어떤 수단으로든 지배하거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지배받는 국가들의 경제와 복지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한 것이다.
예로서 아시아 보면 중국이 아시아의 전통적인 패권국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구열강과 일본에 의한 쓰라린 경험은 자존심 회복과 확고한 지위 확보를 절실케 할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잠재적 패권 추구는 역내 다른 국가들을 긴장하게 하고 세력 균형을 위한 연맹, 미국과 같은 외부 세력과 연대를 형성하게 하고 있다. 중국의 오랜기간의 거대한 영향력도, 뿌리깊은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도, 아시아권의 연합을 위한 고리가 될 것같지는 않다.

뮐러의 결론은 모든 국가들이 근대화의 과정과 특히 서구와의 접촉 및 교류의 결과 공통된 특징을 가지게 되었고 앞으로도 자국의 경제와 복지를 위해서는 서구와 지속적인 국제적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NGO 등 국제기구의 활성화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뮐러는 서구의 사상이 최상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괜찮은 이념이라고 말한다.
40년대 초부터 서구는 협력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연결망을 만들어왔다. 협력의 원칙은 자유 무역, 공동 경영, 국내 정치 안정과 복지, 성문화된 국제기구를 포괄한다.
뮐러는 이러한 서구의 원칙에서 벗어나 보호주의로 후퇴한다면 복지 효과가 크게 줄어들 것은 물론이며 국제 경제는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뮐러의 서구 중심 사상은 서구의 이기주의적이고 비신사적인 결정들 조차도 쉽게 인정해 버린다. 물론 이를 비판하고, 이러한 행태가 이슬람권 등 제3세계가 서구를 쉽지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서구가 비교적 더 우수하다는 것이 결론이고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한 세계화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로 보았을 때 서구의 형태는 비록 물리적인 침략은 아닐지라도 경제와 사상에 의한 제국주의의 돌연변이라는 생각이 깊게 든다. 현대는 비록 물리적인 영토의 경계는 공식적으로 명확히 그어져 있지만 서구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은 이미 여러 국가들의 국경을 넘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침략 행위는 위에서 언급한 브라질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을 끊임없는 신음을 요구하고 있고 침체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하고 있다.

헌팅턴도 뮐러도 결국 서구 중심의 견해이고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이라는 과제를 논하고 있다.
헌팅턴은 말했다.
비 서구가 부상하고 있다고...
뮐러는 말했다.
비 서구가 살 길은 서구화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서구도, 비 서구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의 미래를 규정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서구가 서구 중심의 세계를 재편하듯 우리는 우리 중심의 세계를 재편할 것이고 그것은 서로가 동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수, 즉 대체로 별다른 의식 없이 사는 백인들의 편의를 위해 언제까지고 대다수가 가난과 절망, 착취, 기아 속에서 신음해야 하는 세상을 거부하는 인간의 이성 속에 희망은 깃들어 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는 도덕적인 요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흔들어 깨우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며,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 탐욕의 시대 중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때문에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아이히만은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목표는 조직내 출세라는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 누구도 죽이라고 지시하거나 죽인 적이 없고, 다만 국가라는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충실한 임무 수행은 수십만명의 유태인의 학살이라는 결과는 낳았고 그 범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형당했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의 행태도 결국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단지 '이윤 극대화'라는 자신들의 목표에 충실했을 뿐이고 이것은 민간기업으로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단지 하나의 기업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파급효과도 엄청나다. 모든 것을 배제한 단순한 이윤 극대화라는 목표지향은 수천만명의 기아와 죽음을 대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대량생산을 통해 어느때보다도 풍요로운 이 지구상에서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현재 세계의 농업 생산력으로는 120억 명을 정상적으로 먹일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지구의 인구는 62억 명 정도로 추산된다.
즉,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편성된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무역장벽 철폐와 세계경제의 통합을 주장한다. 골리앗과 다윗의 말도 안되는 싸움에서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과 극빈국인 제3세계 국가들의 싸움에서도 과연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해야만 할 것인가?

(출생의 우연이라는 수수께끼는 죽음만큼이나 신비롭다. 나는 왜 유럽에서 태어났는가? 어째서 잘 먹고, 가진 권리도 많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고문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백인으로 태어났는가?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데, 어째서 뱃속에 기생충이 우글거리는 콜롬비아의 광부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까? 페르남부쿠의 혼혈인 카보클루는? 염산에 의 해서 얼굴이 일그러진 치타공의 벵갈 여인은?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들 우연의 희생자 한 명 한명은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 나의 친구 혹은 나의 삶을 구성하며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다.

출생의 우연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나와 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다른 요소들이란 전혀 없다. - 탐욕의 시대 중 -)

배고픈 그들이 쓰레기통의 뒤지면서 수치심을 느끼듯 우리들은 그들을 방관하면서 수치심을 느낀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들을 방관하듯 나와 상관없는 일로 돌려버리고 그들의 방관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다국적 기업의 욕심채우기를 지원하고 있는 한 축일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은 누구도 살인하지 않았다. 우리들도 누구도 살인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히만처럼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구조에 순응하고 그 피해자들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윗의 옆에 서서 골리앗과 싸울수는 없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산업혁명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우리 별에서 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지 고발한 책이다.

우리는 잘 포장되고 개작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 풍요로운 시대,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 최첨단기술로 미래를 지배하는 시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많은 미사어구들을 배우며 자랐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사람들이 프로그램된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들도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으로 잘 프로그램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대단한 시대’ 속에서 살고 있는 ‘초라한 나’를 느낄 때 ‘난 실패자인가?’ 하고 조바심을 가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이상을 살고 있는 이 순간에는 그 조바심조차도 사치로 느껴진다. 바로 눈 앞에 닦친 삶에 대한 도전들('그들'에게는 우스운 것들이겠지만)을 해결하기에도 바쁜 나는..., 현재 이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라고 다독거린다. 위를 보지 말고 밑을 보며 살아라... 하면서.

멧 데이먼 주연의 영화 ‘엘리시움’. 가난, 전쟁, 질병으로 가득한 버려진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선택받은 1% 세상 엘리시움에 사는 사람들간의 갈등을 영화로 그린 것이다. 영화 속의 극심한 빈곤과 극심한 부의 대립은 우리 시대의 숨겨진 모습이다. 얼마전 '강남구'를 서울시에서 독립시켜달라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강남구는 우리시대 엘리시움인듯하다. 빈곤의 바다 한 가운데 부를 누리고 있는 우리와 구별된 1%의 도시이다.

어릴적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카우보이들과 인디언들의 전투씬이었다. 잔인한 인디언들이 연약한 개척민들을 괴롭힐 때 카우보이 영웅들이 나타나 무찌르는 스토리의 영화들.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인디언들은 야만인의 표본, 악의 표본이었다.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파헤치면서 이런 잘못된 인식을 깨트린다.

쇠고기를 먹는 문화는 기원전 유라시아 스텝평원에서 시작되었다. 스텝평원의 유목민들이 유럽과 인도에서 정착하면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도 함께 정착하게 되었고 차츰 유럽 귀족층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산업혁명 등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 폭발하는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소를 사육할 목초지와 곡물이 점점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프리카 등으로 목초지는 넓혀져 갔고 결국 버팔로와 인디언의 대륙인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에 미국에는 소가 없었다. 다만 버펄로와 인디언만 있었다. 지금 북미와 남미의 소들은 다 유럽에서 개척자들과 함께 건너간 것이다.

미국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평야에서 수천년동안 살고 있는 버펄로와 인디언을 몰아내야만 했다. 미국 군인들과 개척자들은 인디언들의 양식인 400만마리의 버팔로를 단 몇년만에 멸종시킴으로서 굶주린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 넣는다. 즉 영화 속의 난폭했던 그들은 자기들의 영토와 양식을 지키기 위한, 즉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실제 야만인은 인디언들이 아니라 미군과 개척자들이었다.

만약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 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상의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프리카는 원래 자급자족하던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화되면서 이들의 농지에는 사람이 먹을 곡식이 아닌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고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로 개발되었다. 정작 사람이 먹을 곡식은 유럽 등에서 고가에 수입하게 되는데 이 조차도 독재자들이 독식 한다. 결국 이러한 실태의 쓴 열매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이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수백만 인구가 최소한의 일일권장 칼로리를 섭취하지 못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특권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쇠고기를 소비하는 현상이다.


 

10억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과욕으로 비만과 풍요성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또다른 10억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멜더스 같은 제1세계의 지적 엘리트들이 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국가에서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아주 모순된 모습이다. 사실상 그들은 부유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고기를 꾸준히 소비할 수 있도록 빈곤층의 생계를 박탈하고 있는 과도한 소의 개체수와 먹이사슬의 현실을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TV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아이들에 대한 구제기구의 활동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너무나도 무심하다. 거리의 상처받은 짐승들의 구제에는 열광하면서 그들에게는 왜 무감각한 것일까? 그들이 태어난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배고픔의 벌을 받고 있다.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내 몸속에 쌓이는 지방덩어리를 떼어내려고 고민하고 있다. 이 지방덩어리 일부가 배고픈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면 그들 중 몇몇은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들의 죽음을 먹고 사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1-10-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