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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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한낱 실패한 메시아가, 그것도 수치스럽게 죽은 범죄자가 불과 수년 만에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되었다는 말인가?"(본문중)


저자 아슬란은 15세에 기독청소년캠프 참석하였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울창한 수목,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고요함과 여유로움, 게다가 친절한 상담과 격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가족종교인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였고 종교학 교수로서 기독교를 연구하여 이 책 '젤롯'을 집필하게 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태복음 7장 21절 중)


교회를 출석하면서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 분명 종교인과 신앙인은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신앙인으로서 예배드리는 '성도'는 극소수일수도 있다.
단순히 가족같은 분위기나 여러 사람들과의 교제 또는 영업적인 목적이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스스로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과정인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찬양 중에 혹은 예배 중에 순간적인 감정의 복받침으로 눈물을 흘린다던지,
삶 속에 소소한 죄에 대한 심한 도덕적 죄책감을 느낀다던지,
등등 진정한 구원의 경험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 등에 현혹되어 구원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자주 이러한 개인적인 감정의 경험들은 교만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참회의 눈물이 교만의 눈물로 변질되는 것이다.


아슬란은 하느님의 음성을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들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예수님을 멋진 풍경 속에서 인간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그 죄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어 예수께서 대속하시고 그 대속의 은혜로 인해 믿는 자는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의미는 '죄의 노예'였던 이전의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내가 예수가 부활시 새생명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아슬란은 종교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신앙인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좀더 기독교를 허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참된 신앙인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슬란은 기독교의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나사렛의 인간 예수가 더욱 뛰어난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표현은 그렇지 않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 예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촌부였다. 그러니 그는 분명히 시골 사람처럼 촌스럽게 말했을 것이다."(본문 중)


아슬란의 목적은 기독교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는 글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시골뜨기였을 뿐이다.
예수의 이야기들은 모두 날조된 것이다.


책 전반적으로 이스라엘과 로마의 역사적 배경을 일부 가미하였으나 전반적인 주장은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역사적 근거가 없으니 날조된 것이다.
예수가 그 언어를 읽고 쓸 줄 알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들은 ~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등등의 주장들이 전반적으로 펼쳐진다.
문제는 이러한 추측 혹은 카더라 류의 내용들이 끝으로 가면서 기정사실처럼 내용이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예수는 로마에 대한 유대의 해방을 위한 많은 실패한 정치적 혁명가 중 한명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이 간과한 것이 있다.
만약 예수가 단지 시골뜨기 혁명가였다면 그를 아는 사도들이 왜 순교하였는가이다.
단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면 살수 있는 것이었음도 불구하고 왜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킴으로 순교하였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예수를 아는 자들이 차례로 순교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왜 예수사상이 그러한 결과를 이끌어 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순교를 이야기 하면서도 시골뜨기라는 언급을 함께 하고 있다.


시골뜨기를 위해서 순교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특히 아슬란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유대파와 바울을 중심으로한 헬라파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예수를 직접 만났던 유대파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닌 것처럼 주장한다.
천상의 존재로서 그리스도는 바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대파 사도들도 순교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자신이 만든 신때문에 순교하였는가?


바울의 신앙이 허구라는 이유를 바울이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과 바울이 '십자가'와 '최후의 만찬'이외에 다른 예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아슬란은 이슬람의 '알라'를 직접 육적인 눈으로 만나고 믿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 구원'과 '성만찬'이다.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책이 왜 종교계의 베스트셀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의 목적은 '인간 예수'를 찾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독교가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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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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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지하차도에는 노숙자들이 많이 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린다. 특히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다. 그들 눈속에서 슬픔을 발견할까봐 걱정이다. 때로는 혹시 내 인생에 저런 모습이 끼어들면 어쩌나하고 걱정도 된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그 길을 지나던 어느날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침울하고 쾌쾌한 노숙자들의 틈 속에 밝은 기운의 젊은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었다. 물론 노숙자를 찍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눈에는 지저분하기만 한 그 지하차도가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마치 멋진 예술작품이라도 발견한 듯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산책할 좋은 장소, 멋진 풍경 등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 중국 관광객들을 보면 좋은 풍경만이 다는 아닌 듯하다.
내 마음의 문이 그것들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면 비록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좋은 장소가 되고 멋진 풍경이 될 것이다.

나는 비를 싫어한다. 나는 대로의 매연냄새를 싫어한다. 특히 나는 내 주위가 사람들로 가득차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내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어느날 남대문 대로 옆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였다.
하지만 그 날은 내 속에 잠자고 있던 감정의 화산이 폭발한 날이다.
끓어 오르는 감정의 흐름은 침울했던 내 감정에 불을 붙인다. 
빗방울 소리와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마치 잘 어울리는 오케스트라처럼 들렸다. 멀리서 큰 경적소리가 들린다. 마치 이제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리는 듯하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고 싶다. 괜히 궁금하다. 모든 것이 네모난 세상, 네모난 건물과 네모난 컴퓨터와 네모난 서류뭉치, 네모난 자동차 모든 것이 네모난 세상에서 우리네 마음만은 둥글어야 한다. 우리 마음까지 네모나면 세상가운데 우리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가는 시대... 네모난 건축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찌그러진 이상한 형태의 건물, 꽈배기처럼 꼬인 건물, 동대문에 우주선을 닮은 건물 등등이 세계적인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는가보다.
솔직히 이상한 건물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는 건축을 소주와 포도주에 비교했다.
소주는 화학주이다. 소주는 인간의 가치와 격리된 술이다.
포도주는 자연에서 추출한 술이다. 포도주는 만든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술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아파트처럼 인공적인 소주같은 건축물도 있지만 산속의 정자처럼 자연과 동화되는 건축물도 있다.
물론 어떤 건축물이 더 좋다 혹은 나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어묵 국물에 소주한잔이 그리운 사람도 있는 반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즐기고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어떤 건축물이든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과 실용성 등등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저자는 한옥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고 회색빛의 각진 아파트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축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옛 건축물인 한옥은 그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축물이듯 아파트도 현대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만약 현대 환경 속에서 한옥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아파트에만 있고 한옥에는 없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먼 미래에는 아파트도 지금의 한옥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이야기 중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건축물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욕심이 개입된 건축물은 우리를 아프고 낙심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 속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
사회복지제도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이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시대이다.
요람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와 상품, 삶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대이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TV광고 속의 멋진 집에서 멋진 자동차를 몰고 휘트니스로 가꾸어진 멋진 이성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이상향을 바라보며 죽을 것처럼 달려가지만 그런 이상향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이상향을 만들어낸 대기업들 뿐이다. 

저자는 좋은 거리는 많은 이벤트와 상점들이 있는 거리라고 말한다.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의 자기주도적인 선택권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그 거리는 자본주의에서 주장하는 각종 상품들과 상점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들로 가득차 있다.
과연 그 곳에서 주어진 선택권이 자기주도적 선택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 좋은 거리는 지친 우리들에게 조금이나마 쉼을 주는 거리이다.
아무런 끌림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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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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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머리말에 제시된 역자의 이야기다.

독서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책을 통해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사고를 접하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책 읽는 사람'의 사고영역을 확장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이 없는 독서는 자신의 사고영역 둘레에 확고한 요새같은 담을 쌓는다.
자신의 사고에 큰 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권장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관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거나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요새를 만드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한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는 그 친구가 왜 저리 독단적일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벼가 익어야 고개를 숙이듯 아직 익지 않아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벼는 계속 익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강력한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요새를 구축하면 자신이 구축한 요새의 강건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리고 도취되어 요새 밖에 것을 볼 수가 없다.
결국 우물한 개구리가 되는 것이고 사고영역은 확장되지 않는다.

러셀의 글은 자신만의 사고의 틀에서 자유롭게 써내려간다. 그러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진 내가 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러셀의 다른 책도 몇권 추가 구매했다.

직원들과 식사중 여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 직원이 여가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가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학문상의 여가는 무엇을 할 것인지 대상을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또는 활용방안에 대한 컨설팅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체육관에는 트레이너들이, 도서관에는 독서컨설턴트가... 그들이 있다.

현대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시간조차도 이제 무엇인가를 빼곡히 채워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 같다.
어쩌면 성과가 모든 것인 시대에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게으름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러셀은 창의적인 성과는 게으름 속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창의적인 것은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닌 그들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기술은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인 여가를 모든 사람들의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과학의 발달은 과도한 노동력의 투입없이도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생산을 약속해 주었다.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상당부분 빼앗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의도치 않은 게으름으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대체로 일하는 사람들은 장시간 일하면서 과로로 인해 힘들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굶어죽는 아이러니한 근대화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러셀은 이러한 어리석음을 지속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정부의 일자리 창출 방향은 러셀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예를 들어 시간제근무를 활성화하여 개인당 근무시간를 줄이고 그 빈 자리를 또다른 시간제근무 일자리로 충원하는 것이다.
시간제근무로 여유로워진 시간은 여가를 통한 창의적인 시간을 가지면 된다.
비록 급여수준이 낮아지겠지만 복지사회로의 흐름은 이러한 급여가 낮아지는 공백을 충분히 채워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생산과 성과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생산한 것을 향유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잊어버렸다.
향유하는 즐거움의 망각과 여유로움의 소멸, 그리고 과도한 압박은 단기적인 성과는 기대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를 부서지게 할 것이다.

최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새로운 인간 영역의 구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지금처럼 성과위주의 단순한 전진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지금처럼 기계적인 성과창출 분야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결코 인간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이즘으로 세계적인 획일화를 이루었고 강력한 통제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인공지능의 등장은 어쩌면 인간역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때문에 창의적 활동을 통한 인간의 새로운 영역 구축은 아직까지는 성과주의의 산물인 인공지능에게 다소 우위에 설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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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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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씨가 태어난 1959년부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까지 55년간을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글이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본문중)

유시민씨의 언급처럼 역사는 기록하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책도 다분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보 성향의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된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상당히 보수적인 내 입맛에도 잘 맞다.

유시민씨가 50대 중반을 넘었고 내가 40대 중반임을 감안할 때 10년정도의 차이가 난다.
비록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기록들 중 일부는 내 삶가운데도 함께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시작은 역사공부로 시작했다. 나의 아들, 딸에게 그리고 친우 등과 대화의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책을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다소 묵직한 부담감에 밀려온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대한민국'이라고 치면 'GDP 세계 11위'라고 소개된다.
1959년 우간다와 함께 국가 순위 가장 밑에 위치해 있던 나라, 세상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 대한민국의 현재 위치다.

오늘도 나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 중이다. 하지만 한 때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정부 정책을 비난하며 악플을 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 때 대통령의 이름만 잘못 불러도 경찰에 연행되던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세계곳곳의 여행지를 찾아 여행을 계획 중이다. 하지만 한 때 아무도 국외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사회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이 상태였던 것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묻어 있는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지금도 역사는 계속 흘러가고 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개개인들이 적어내려간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다. 마치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큰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가듯이...

그리고 미래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적은 역사를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본문 중)

우리는 과거를 보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어떤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써내려가야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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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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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맹신하던 시대
철저한 남성위주의 시대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대

이런 환경 불모지 한가운데에서 한 여성이 과학을 비판하고 환경보호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녀가 '레이첼 카슨'이고 그 혁명적인 발걸음이 '침묵에 봄'이다.

책 내용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각종 농약이나 살충제를 통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그 자연의 최고 정점에 있는 우리 인간들에 대한 경고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통한 급속한 과학과 경제의 발전을 이루고 있는 시대, 멈추지 않고 돌진하고 있는 폭주기관차 같은 시대에 그녀는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는 시대의 흐름을 먼저 깨닫는 자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시대의 흐름에 복종함으로 큰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녀도 충분한 역량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복종이 아닌 저항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저항은 혁명이었다.

살충제를 통한 환경오염은 성장만을 고집하는 우리 시대에 한 단면이다.
급속한 과학의 발달은 인간 스스로 '창조주'라고 자고하는 지경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밝은 미래만 있을 것같은 우리의 미래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캄캄한 어둠만이 있다.
어두운 터널 끝에 멋진 판타지가 있을지 천길 낭떠러지가 있을 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리 모두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나 인문학자 등등 선각자들은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우리 길 끝에 있을지도 모르는 낭떠러지에 대해서.

물론 과학의 발전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시대의 환경은 급속도로 파괴되어졌고 더나아가서 이상징후를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환경을 이전처럼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이 와버렸다.
환경보호에 대한 준비없이 급속한 성장만 추구한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미래상태에 대해 정확히 전망하고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주위에 불임으로 고통받는 젊은 부부가 너무도 많다. 암은 우리 시대 대표 질병이 되어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작스런 죽음.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기형아의 출산 등등.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우리가 저질러온 결과물 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무감각하기만 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온 길은 놀라운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나 편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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