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작품과 말
루스 펠터슨 엮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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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 2월 건축계는 왕슈(王樹)라는 인물의 프리츠커 수상으로 떠들썩했다. 중국 변방출신에 해외활동도 전혀없는 무명 건축가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흔히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연륜있고 지명도 높은 건축가들에게 수여해왔다. 그러나 금번 왕슈(王樹)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수상 당시 페이퍼 아키텍트(건축물의 시공여부에 관계없이 이상적인 설계를 추구하는 건축가들)로 알려진 자하 하디드나 소형 프로젝트를 위주로 작업했던 피터 춤토르의 수상 때와는 또 다른 사건이다. 적어도 이들의 건축은 수상전에도 호평을 받았고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하디드의 경우 학계에서 손꼽는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단이 왕슈를 선정한 이유는 "지역의 건축적 맥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건축에서도 국제화와 거대건축이라는 이슈가 조금은 잠잠해지는 듯하다.

 

프리츠커상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혼재하던 1979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모더니즘의 거장들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이 수상하는 경우가 많았고 연령대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에는 대형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도시건축에 심혈을 기울이던 건축가들이 수상하는 추세를 보이면서 건축가들의 국제적 활동력과 하이테크, 초고층빌딩의 위용을 자랑했고, 2000년대에 와서는 수상자들의 개성이 더욱 두드러져 선정 기준이 보다 다양하고 과감해진 것을 엿볼 수 있는데, 렘콜하스처럼 거대건축과 도시담론에 기여한 건축가가 있는가하면 피터 춤토르처럼 장인정신이 돗보이는 소규모 건축과 지역건축에 기여한 건축가도 있고, 금번의 왕슈(王樹)처럼 예상을 뒤엎는 신예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수상자들의 평균연령도 훨씬 낮아져서 명예의 전당과도 같아보이던 수상자 명단이 건축계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지표와 거의 흡사해졌다. 이 모든 프리츠커상의 역사가 더 궁금해진다면 바로 이 책 <건축가>를 펼쳐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프리츠커상은 건축계의 혁신적이고 기여도 높은 건축가를 선정한 상이기에 건축의 역사와도 어느정도 일치하므로 건축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보는데도 유용하다. 책의 시간은 2010년부터 1979년까지 거꾸로 흐르지만 제1회부터 현재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구성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아마도 우리에게 친숙한 최신 건축물에서부터 시작해 시각적인 거리감이 없고, 현재에서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순행의 흐름을 타기 때문인 듯하다.

 

<건축가>에는 1회부터 32회까지의 수상자들을 담아 안타깝게도 올해의 주인공 왕슈의 작품을 볼 수는 없지만 건축으로 한 편의 시를 쓰는 듯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 피터 춤토르와 비범한 조형미로 평범한 입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32회 수상자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 팀(이하 SANAA)의 작품이 매혹적인 공간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스위스 팔스(Vals)의 온천을 설계해 주목받기 시작한 피터 춤토르는 이 건물로 현상학적 신비의 극치를 보여주며 마치 얇은 석재층 하나 하나와 교감하듯 돌의 숨결을 살려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은 건물, 그 지역의 지형과 지질구조에 어울리는 건물, 다시 말해서 압착되고 접히고 또 때로는 수천 장의 판으로 갈라지는 팔스 계곡의 돌덩어리들에 걸맞는 건물을 짓는 것-이것이 우리의 설계목적이었다"(p.24)라고 설명한다. 춤토르는 마치 헛간같이 생긴 작은 아틀리에에서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견고히해 나가고 있는데 건축에 관해 '유년시절의 전기傳記)'라고 표현하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어린시절의 아지트같은 모습이다. SANNA는 기본 도형과 입체를 매우 독특한 감각으로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평면이나 단면을 살펴보면 순전한 단순성을 너머 정갈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내는데, 이러한 단순성은 복잡한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내재적인 힘일 것이다. 이런 힘을 SANNA의 말로 표현하면 '투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투명성이란 "...다양한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늘 건물 안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투명성은 또한 명확함을 의미한다. 시각적 명확함뿐만 아니라 개념적 명확함까지 의미한다"(p.15) 춤토르와 SANNA의 수상을 보면 비정형과 하이브리드가 난무하는 건축세계에서 빛과 대지에 충실하는 기본적인 건축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진면목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왕슈와 SANNA의 수상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프리츠커상의 수상경력이 있다. 중국의 경우 루브르 광장 한가운데 유리 피라미드를 세운 I.M. 페이가 먼저 수상을 했고, 일본에서도 우리들이 잘 아는 안도 다다오를 비롯 총 4회에 걸쳐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인으로 제일 먼저 이 상을 받은 사람은 단게 겐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도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정도에 해당되는 일본의 중요한 건축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건축물들을 보면 기품있고 힘이 넘친다. "전통은 일단 그 과업이 완수되면 사라져버리는 촉매와 같은 것이다"(p.281)라고 말하는 겐조의 생각처럼 전통을 박차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상이
배어있는 듯하다. 안도 다다오도 겐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무명 건투선수에 불과한 그를 유럽으로 날아가게 했던 르 코르뷔지에지만 일본 건축의 거장인 겐조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단순히 일본에서 프리츠커상을 4회나 수상했다는 점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겐조-다다오로 이어지는 건축정신의 계승이 세계 건축사에 길이 남았다는 점이 무척 부럽다. 한편 유럽 여행의 대표 명소인 I.M.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는 실제 건물의 명칭 대신 'I.M 페이'라는 애칭으로 불릴만큼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건축물이다. 처음 루브르 한 가운데 이 '망측한' 건물이 들어섰을 때 전통과 접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았지만 지금은 보면 볼수록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의미심장한 풍경으로 비춰진다. 아마도 이런 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이 아니었나 싶다. 동양 건축가들의 수상소식을 들으면 의례적으로 꼭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건축가들은 언제쯤 수상을 할까'인데, 아직은 낙관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민식, 이은영처럼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건축가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그날이 꼭 먼 미래만은 아닐 것이다.

 

 

 

<건축가>에서 화려한 화보를 자랑하며 눈에 띄는 건축가라면 '스타 건축가'들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스타 건축가'란 건축계에서도 혁신적이고 뛰어난 활동을 보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건축가를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와 프라다(PRADA)매장 설계로 각종 패션 잡지에서도 빈번히 볼 수 있었던 렘 콜하스, 그리고 은빛 구름이 몰아치는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프랭크 게리 등이 있다. 먼저 하디드와 콜하스의 경우 영국의 건축학교 AA School 출신으로 콜하스의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으며 모두 도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실험해 온 학구파(?)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실제로 지어지지도 않을(혹은 못 할) 이상적 건축들을 도면과 모델로만 습작하며 페이퍼 아키텍이라 불리웠던 자하 하디드도, 건축물보다는 기자와 시나리오 작가의 경력을 바탕으로 도시계획에 대한 획기적인 시나리오 <정신착란의 뉴욕>를 저술하며 등장했던 렘 콜하스도, 이제는 세계의 도시건축과 거대도시 담론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며 자신들의 이상건축을 구축해 가는 거장들이 되었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도시 풍경에서 비정형적이고 독특한 건축물들이 주는 유쾌함과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멋진 건물들이 아니라 '건축은 즐길 수 있는 것'(p.91)이어야 한다는 자하 하디드와 '건축은 원래 혼돈의 모험'(p.135)이라는 렘 콜하스의 소신이 담긴 선물이기도 하다.

 

 

 

한편 프랭크 게리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열정의 화신이다. 지난 24일만해도 그가 페이스북 신사옥을 설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말이다. 해체주의자로 알려지기 시작해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스타일을 확립해 왔던 게리는 건축이라기 보다는 조각에 가까운 작품들로 늘 세상을 놀라게 하곤 했는데, 이는 첨단 컴퓨터 모델링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처럼 오늘날의 건축은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다채로운 공간실험과 실물 구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게리는 이들을 대표해 아날로그적인 건축가의 스케치에서 디지털 컴퓨터의 모델링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 속의 건축물로 구현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 컴퓨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리는 오히려 "내 그림에서 나는 내가 건축에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p.247)고 말한다. 

 

 


프리츠커 수상자들 중에는 구조의 미(美)를 한껏 발휘하는 건축가들도 있다.이들의 작품은 주로 초고층 빌딩이나 공항, 경기장처럼 공학적 측면을 요하는 건
물들이 많은 편인데, 대표적인 예로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둘은 한 때 파트너이기도 했다)를 들 수 있겠다. 리처드 로저스는 2012년 영국 올림픽의 경기장 중 하나였던 그리니치 경기장(밀레니엄 돔)을 설계한 건축가로 이전부터 퐁피두 센터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퐁피두 센터는 내부로 숨겨지는 건축설비들을 밖으로 노출시켜 '인사이드 아웃 롤(inside-out roll, 캘리포니아 롤을 이르는 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공학적으로 까다로운 구조는 아니지만 그당시 하이테크라는 사조를 잘 반영하며 기계미학을 대표했다. 노먼 포스터는 매우 능수능란한 고층·초고층 설계자이다. 그의 건물들은 단순한 기하학으로 이뤄져 있지만 구조적 효율성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구사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뿐만아니라 첨단기술을 도입하면서도 인간과 자연에 친화적인 건물들이라 겉보기에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과는 또다른 면모가 담겨있다. 예를들어 일명 거킨(gherkin,오이지) 빌딩이라 불리는 봉긋한 원통 모양의 초고층 건물은 주변 건물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도도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주변 건물들의 일조권을 최대로 배려하기 위한 형태라고 한다. 또한 구조 자체가 자연적으로 공기를 순환시키는 대표적인 그린빌딩이기도 하다. 이처럼 초고층빌딩이라고 하여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포스터처럼 기술을 통해 자연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의지가 있는 건축가가 있는 한 '지속가능한 건축'은 더욱 오늘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80년대에 이르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박스형의 건물들이 보인다. 바로 건축의 대량생산과 장식의 배제가 시작되었던 모더니즘의 건물들이다
. 지금 보면 그리 특별한 것 같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건축들이었다. 특히 화장실을 제외한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필립 존슨의 '유리집(Glass House)'는 그 시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과감한 도전이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건축은 예술이다.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p.363)라는 필립 존슨의 확신이 전혀 근거없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성행하지 않았지만 모던니즘의 세력이 막강했던 서구에서는 그 반향으로 등장한 이 사조에 대해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수상자들의 건축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건축을 위한 건축가들의 헌신이 지금까지 부단히도 이어져왔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것은 단순히 '발전'이라는 피상적인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부족한, 뜨거운 몸부림과 논쟁과 실험의 결과물들이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 수많은 생각과 제도선들의 자취들을 오롯이 담아낸다.

 

 


이밖에도 <건축가>에는 다 언급하기 힘들정도로 수많은 건축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이밖에도'에 해당하는 건축가들까지 만나보는 것인데, 단지 몇몇 대중적인 건축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난 30여년간의 건축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또한 건축가들의 각 작품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설계 의도와 고민했던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 등이 고스란히 설명되어 있어 건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에도 나타나 있듯 <건축가>가 전달하려 하는 것은 건축가의 '작품과 말'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그 건물을 탄생시킨 의도를 가지는
바, 건축가의 말을 듣는 것은 곧 그들의 작품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다. 혹자는 말로 건물을 짓는다하면 관념만 무성한 현학적 작품이라든지 수다스런 설명이 덧붙은 작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 실린 프리츠커 수상자들의 작품은 그들의 말과 일치한다. 자신의 말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 좁을수록, 더 나아가 건축가로서의 신념과 작품과 일치할수록 이 상을 받을만한 위대한 건축가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어느 신은 말씀으로 엿세만에 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인간에 불과한 건축가들은 건물에 말 한 마디를 더하기 위해 몇 날을 고민하고 갈등하며 밤을 지샌다. 하지만 그들이 신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까닭은 그로인해 건축의 물성보다 더 견고한 말을 정제해 내고 그것이 한 건축가로서의 생애를 우뚝 세우며,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속해있는 이 터전을 살기좋은 환경으로 굳건히 지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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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9-0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프서점에서 한참을 보고 아주 맘에 들어서 온라인 상에 담아놨는데, 정작 주문하려고 하니.. 그동안 사서 모아 놓은 백과사전식 책들을 내가 얼마나 들춰봤는가가 떠오르면서 망설이게 되었어요.
일단 사서 쌓아놓기라고 해야겠네요. ㅋ

탄하 2012-09-09 22:06   좋아요 0 | URL
망설이시던 책에 제가 지름신을 불러 모신게 아닌가 싶네요.
건축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라면 가격에서 주춤하지만 추천할만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글판, 영문판의 내용과 레이아웃이 조금 다르대요(둘 다 소장하신 분의 말씀).
저도 어느정도까지 다른지 모르겠지만 영문판과의 가격차가 크지 않아서
비교해 보고 더 맘에 드시는 것을 고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나는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집을 지으며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어떤 집을 만들까 고민하고 실용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모형 만들기에 스케치, 도면작업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쏟아부은 밤이 곧 집을 보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모든 작업의 관심사는 독창성에 쏠려있었고, 실무에서의 수익성과 저울질해가며 어느덧 참다운 집의 의미를 구하는 일에서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하면 부동산을 떠올리고 집이 부(富)의 상징이 된 것을 한탄할 때, 집에 부(富)를 더해 예(藝)까지 입히는 나의 경우 그 한탄도 두배로 늘어났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조용헌의 백가기행>은 ’집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가내구원’의 가르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건축가들의 고민과 담론에서 벗어나 동양철학자에게 색다른 답을 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더욱이 그가 소개한 집들은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한옥이기에 왠지 옛 선현의 지혜가 발견될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갔다.
 
작은 오두막부터 거부의 명가까지 모두 22채의 집을 순례하는 사색의 시간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맑음’이다. 저자 조용헌이 찬찬히 들려주는 집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집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가치관과 애정, 그리고 안목이 어찌나 올곧고 섬세한지 그동안 흐려졌던 집에 대한 의미들이 하나 둘씩 선명하게 살아나는 것 같다. 뿐만아니라 "한 집을 20년동안 살펴보며 한옥 보는 안목을 틔웠다"는 저자나 "사람이 자식도 만드는데 어찌 집 하나 못 짓겠소"라던 방외한옥 송일근씨의 말은 맑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들려오는 풍경소리처럼 청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는 집짓는 사람으로서 되새겨야 할 교훈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조용헌의 백가기행>에는 집에 대한 가치관을 되돌아보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성찰적 요소들이 가득 담겨있으며, 공간과 사람, 땅과 볕과 바람이 어우러져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평온의 정취를 회복시켜주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 집들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저자가 감탄하며 꼽았던 장성 축령산 도공의 집이다. 단지 2만 8천원으로 손수 집을 지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인간과 자연을 살펴 그 규모에 담은 철학이 예사롭지 않다. 집주인은 산중의 넓디 넓은 터에 자신이 기거할 딱 그만큼만 차지하고 더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넓은 자연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어주고도 얻는 지혜...이러한 마음을 도시의 집에서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이 작은 집에 나있는 작고도 나즈막한 창(窓)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집주인이 도공인지라 자신이 아끼는 도자기에게 각별한 사랑을 표현한 창문 같기도 하고, 앉은 자세에서 빛을 받는데 가장 적합한 위치를 선택한듯도 한데,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든 모양새가 자연스럽고도 이색적이다.
 

 

 
축령산 도공의 집은 충격에 의한 충격이었지만 담담하고 소박한 진주 석가헌은 평범한 가운데 깃든 기품이 있어 다시 돌아보게 된다. 첫눈에는 이 집의 아름다움을 쉽게 알아볼 수 없지만 내부로 흘러드는 은은한 볕과 차(茶)를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밥처럼 질리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맛에 이 집에는 항상 차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좋은 집이란 역시 사람을 불러모으는 재주가 있나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주 효주 허만정 고택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전통적인 멋이 있다. 이 집은 돈이 모이는 풍수명당에 지어져 대대손손 부유했으며 동시에 의부(義富)집안으로 알려졌는데, 독립운동, 신분해방 운동, 장학금 등에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아 오늘날 집으로 부를 과시하는이들에게 진정한 부의 의미를 일깨운다.
 

  


이 책에는 전통 한옥뿐만 아니라 건축이나 실내디자인에 현대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집들도 다수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땅 집’이라 불리는 건축가 조병수의 집인데, 이름처럼 땅을 파 집을 앉히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대지의 품에 안겨 산다. 내면으로 침잠하여 가내구원에 이르는 이 집은 고요함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평선 아래에 거하면서도 햇살로 충만하고, 하늘이 땅인듯 땅이 하늘인 듯한 풍경을 누리는 것은 오히려 강한 시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집을 짓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서구 근대건축의 정신을 지상명령으로 강요받는다. 대량생산 가능성, 효율적인 공간계획, 간편한 시공...이에 따라 모든 것이 획일적으로 계획되는 가운데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마저 생기없고 단조롭게 변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가내구원은 현대인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소중한 우리의 개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값비싼 저택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편일률적으로 솟아나 있는 아파트라해서 이루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대손손 명가든 소박한 한옥이든 인간에게 안식이 되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공간은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조용헌의 백가기행>을 통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더 큰 혜안을 엿보며 집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새롭게 정비했다. 더불어 잘 알지 못했던 한옥의 깊은 멋과 자연을 공간에 어우러지게 하는 독특한 안목들도 인상깊게 눈여겨 보았다. 이젠 그들이 가르쳐 준 교훈을 바탕으로 집에서 부(富)와 예(藝)를 벗겨내고 사람살이로 가득 채우려 한다. 부(富)와 예(藝)를 입힌 집에는 항상 사람살이가 깃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살이로 가득 찬 집에서는 부(富)와 예(藝)가 절로 우러나옴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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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8-3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헌. 이라서 전통적인 옛 한옥만 나오나 싶어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관심이 가네요.

탄하 2012-08-31 23:36   좋아요 0 | URL
전통적인 한옥도 있지만 한옥 내부를 현실에 맞게 레노베이션한 것들도 있고,
한옥의 정취를 살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들도 있고, 다양한 집들이 있답니다.
운치있는 실내공간을 좋아하신다면 맘에 드실거예요.^^
 
유랑극단 사계절 1318 문고 77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시간은 소멸과 함께 생성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시간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 반대인 시간의 부재(不在)가 이에 더 적합한 설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한대로 이어진 시간의 어느 시점에 삽입돼 일정구간을 점유하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소멸(죽음)로 출발하는 탄생을 통해 부재 상태였던 시간을 생성시키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을 사용하다 떠나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왔기 때문이며 낮과 밤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나뉘어진 시간체계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의 존재는 생명의 살아감으로 가능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소멸해간다는 것의 동어반복이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이란 이러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 분량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끝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대체적으로 스스로 정지시키지 않고 잘 진행시키려 애쓰며 주어진 시간을 감당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고 해서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도 같을 내일을 연명하며 일상적인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살아가고, 누군가는 삶의 중대한 의미를 만나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매 순간 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연령 80세의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가 될만한 사건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시간의 부재(不在)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무생물이나 매한가지다.

 

여기 하네스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주어진 형량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갑갑하고 지루한 감옥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도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탈옥을 시도해 보지만 번번이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네스의 사정을 듣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 비록 담장 밖에 살고 있지만 크로노스의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네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형량을 받고 감옥에 던져진 하네스처럼 우리도 인생의 분량을 선고 받고 이 세상에 던져진 가련한 존재들이다. 신체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죄수들보다 조금 나은 면이 있겠지만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책 속에서 유랑극단이 공연했던 연극의 제목을 빌자면 하나는 자유분방한 판타지가 펼쳐진 <미로>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냉혹한 기다림이 가득한 <고도를 기다리며>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네스와 탈옥수 일행이 첫 번째 방법을 택했을 때 그들은 호수에서 서로 뒤엉겨 물놀이를 하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합창단으로 대중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그뤼나우라는 한 도시의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켜 감옥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명예로운 찬사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의 쾌감과 아름다움은 진실을 만남과 동시에 붕괴된다. 이것이 허무한 판타지 세계의 법칙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치명적인 이유다. 탈옥여행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사람은 자기 능력대로 사는 법'이라며 우쭐해 하던 하네스도 어쩌면 죄수에 불과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일종의 주문을 외운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하고 판타지의 일탈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무게를 잊을 수 있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의 방어기제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빠져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하네스가 두 번째 방법을 택했을 때 그는 앙상한 나무 아래 서 있었고, 늘 '교수양반'이라는 부르던 감방 동료 클라멘스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함께'와 '견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드디어 그가 감옥이라는 견고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소, 클라멘스."(p.127)


"여러 번 생각했소. 견딘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기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p.127)

 
온통 탈옥에 대한 생각으로 현실을 외면했던 하네스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견딤의 미학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했음을 의미한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비루하고 보잘것 없는 죄수에 불과하지만 그의 내면은 갈등을 겪는 사이 건장하게 성장한 한 남자로 변한 것이다. 한때 환상과 허무 사이에서 방황했던 나약한 내면은 이제 용기로 바닥을 다져 참다운 자아가 자리를 잡았으며 친구에 대한 우정과 신뢰까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감옥에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하네스의 손에는 클레멘스의 저서, 『슈투름 운트 드랑』이 들려있다. 클레멘스에게 있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클레멘스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하네스의 제스쳐가 무척이나 갸륵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수많은 고통과 번민이 따르는 힘겨운 방법이지만 일단 현실 세계의 맨얼굴을 대면하고 나면 견딤의 미학이 조력해주고 친구까지 생기는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다.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첫번째 방법을 택했다면 유랑극단 가수처럼 <안녕, 너무 오래 떠나 있지는 마!>라는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유랑극단>을 덮고 나니 눈 앞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떠오른다.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세트였던 볼품없고 앙상한 가짜 나무이다. 이 나무는 하네스가 몰래 자신의 감방으로 가져오면서부터 정체되어 있던 그의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흐르게 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일탈과 자살의 충동을 뛰어넘어 견딤이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다. 만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비참하게 느껴진다면 마음 속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도록 하자. 나무는 하네스의 나무처럼 목공품에 앙상한 모습이어도 좋다. 그저 꼿꼿한 자세로 땅을 딛고 서서 온전히 감당하는 자의 의지를 표상할 수만 있다면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며 당신을 새로운 삶으로 초청할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보듬고 의지할 수 있는 당신의 클레멘스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유랑극단>이 제안하는 살아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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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있고 또 없다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이 여행에서
문득 이 시구(詩句)를 떠올린 까닭은 무엇일까?

 

 

 

 

 

 

 

 

 

 

 

 

 

여행의 시작. 실크로드란 푸른 초원이 펼쳐진 낭만의 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탄탄한 대로와 표지판을 맨 먼저 만나는 순간 갑자기 세월이 무상해졌다. 한반도로 이어진 초원로의 어귀라는 션양.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역사의 발걸음들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일까?

 

- 랴오허 대교

 

 

 

 

 

 

 

 

 

션양을 지나 '세계 4대 문명'을 저만치 앞질렀다는 '훙산문화'로 향한 길도 마찬가지였다.훙산문화의 심장 츠펑으로 들어서는 톨게이트며, 츠펑시 입구의 길이며, 어느 것 하나 실크로드를 떠올리게 하는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 청난 톨게이트

 

 

 

 

 

도대체 나는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실크로드가 가로지르던 그곳이 현대화되지 않고 남아있길 기대했을까? 아니, 사실 무언가를 바랬다기 보다는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들이 사라졌음이,하여 길이 그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서구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만일 이 길을 개척해 걸어왔던 이들이 지금까지 이 길을 지키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풍경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 츠펑시 입구

 

 

나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기필코 '초양노옥(草洋撈玉, 풀바다에서 문명의 옥석을 가려 주옥을 건져내다)'하겠다는 정수일 선생 일행은 훙산에서 칭기즈칸이 묻힌 곳을 지나 대흥안령 정상의 흙먼지길을 쉬지않고 달려간다. 정성이 이러할진대 관광객의 일원으로라도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한 내가 무슨 할말이 있으랴. 그저 그들 일행이 찾아내는 고대 역사의 흔적과 교과서 밖의 이야기들에 얌전히 감탄할 수 밖에. 하지만 대흥안령부터는 흔히 볼 수 없는 유목민의 삶과 너른 벌판이 간간이 비춰진다. 그리고 순수하고 유서깊은 풍경들은 몽골초원로에 다가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 대흥안령 정상


 

 

대흥안령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어진 풍경 중 유독 눈에 띄는 거리들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야쓰타이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린하오터 거리이다. 우리야쓰타이 거리의 경우 고구려 서경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데 사진은 아마도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곳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쨋든, 내가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사진 오른쪽의 서양식 건물들이다.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면 훨씬 고풍스럽고 풍부한 건축적 디테일로 장식되어 있었겠지만 이 건물들은 심플하면서도 서양건축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조금은 유럽스런 어색한 풍경. 이런 건축요소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 우리야쓰타이 거리

 

 

 

 

 

 

 

시린하오터 거리는 중세 유럽풍의 가로등(이것 역시 현대화된 형태)에 루미나리에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러시아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몰라 이것이 러시아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유독 이곳에서 유럽적인 거리 풍경이 두 컷이나 잡혔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다.

 

- 시린하오터 거리

 

 

 

아! 고대의 마역로로 추정되는, 그러나 이젠 207번 국도가 되어버린 이 길. 마역로는 북방 기마문화의 남북통로로 실크로드의 일익을 담당해왔던 길이며 베이징으로 이어진다. 초원 실크로드는 동서축을 따라 이어져 있지만 단순히 동서만으로 난 길이 아니라 남북으로 가지를 뻗기도 했는데 마역로가 바로 이런 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길도 역시 여느 아시아국가의 평범한 도로와 별반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207번 국도라니...마역로일지도 모를 이 길에 아스팔트를 깔고 번호를 붙이면서 마음이 편했을까?

 

- 마역로(207번 국도)

 

 

 

 

 

 

 

 

 

그래도 안타까움은 마역로가 끝이었던 것 같다. 여행이 깊어갈수록 아직 현대문명의 획일화에 물들지 않은, 앞으로의 여지가 더 남아있는 길과 영역들이 종종 눈에 띈다.

 

- 차오자잉쯔 마을 흙길

 

 

 

 

 

 

 

 

 

 

 

 

그리고 때론 초원로의 샛길이 아직 저렇게 남아있다는 것에 흥분되기도 했다.

 

 

- 대흥안령 무수꺼우의 초원로 샛길

 

 

 

 

 

 

 

 

 

 

 

이젠 칭기스칸의 서정로(서쪽정벌의 루트)를 살피고 사막으로 향하는 길. 물이 귀한 곳이라 원 없이 물을 보고 가라고 강이 인사하는 것 같다.

 

- 남타미르강 계곡 돌길

 

드디어 고비사막. 황량하고 너른 공간을 달리는 긴긴 시간동안 일행은 가끔씩 하차해 기지개를 편다. 펼쳐지는 것은 팍팍한 풍경뿐일 텐데 저리 강행군을 했으니 무척 피로했겠다 싶다. 하지만 이후에 만나는 것은 진귀한 보물과 다를 바 없는 암각화와 고분, 얼음공주,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옛 우정(?)이 담긴 증거들이니 상기된 마음에 피로할 여유도 없을 듯하다. 고비사막 이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의외로 흉노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물론 기원전 인물인 얼음공주의 살갗에 새겨진 문신을 바라보는 것도 충격이긴 했지만 장장 600~700년 간이나 유럽 고대사를 바꿔놓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흉노족의 역사는 내게 있어 무척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고비사막


 

 

 

 

 

 

 

 

 

 

거리의 풍경이 바뀐다. 그저 도로와 차들인데 180도 바뀌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색다른 풍경이다. 이곳은 블라지보스또끄(블라디보스톡). 초원 실크로드는 아시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까지 이어져있다.

 

- 블라지보스또끄 거리

 

 

 

 

 


그리고 시베리아 초원로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달린다. 이곳은 우리나라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스키타이족의 동물의장은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반도로 전해져 왔고,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가 이곳에 묻혀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냉전시대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러시아와 훨씬 더 가까이 지내며 교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는 하지만.

 

- 시베리아 철도

 

 


 

 

다시,
여행의 끝에서...


길은 있고 또 없다
를 되뇌어 본다.

 


흔적으로서의 초원로는 있었으나 역사로서의 초원로는 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길을 있도록 한다는 것은 다시 길을 따라 교역을 하고 그 길이 번성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길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길이 간직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 바로 저자가 꿈꾸는 일이며 이번 답사의 화두인 '초양노옥'이 대변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밖에 몇가지 것들

 

#1. 저자 정수일은 중국 연변에서 출생했다. 한국사람인데 그곳에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곳 출신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어지는 경력 또한 특이하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평양 국제관계대학, 평양 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는 점이고, 카이로, 모로코, 말레이 등에서도 활동했으며 이슬람에 대한 학식도 풍부하다. 마치 실크로드를 연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중국과 북방과 이슬람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어쩌면 출생을 제외하고는 본인의 계획과 의지에 의한 것일지도..). 뿐만아니라 중세의 대탐험가인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세계에서 두번째로, 그것도 옥중에서 완역해 내기도 했다(참고로 <이븐 바투타의 오디세이>는 정수일 역은 아니지만 해설서에 준하는 도우미가 될 듯하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고, 올곧은 신념이다. 선생은 이전에 출간된 <실크로드 문명기행>(오아시스로 편)을 비롯 앞으로 바닷길까지 총 3권으로 실크로드를 완결한다고 하시는데, 이 시리즈의 완성이 기대된다.

 

 

 

 

 

 

 

 

 

 

 

 

 

 

 

 

#2.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숨겨진 선물의 발견!
사실 이 책은 지도없이 볼 수 없는 책이므로 3부로 나뉜 각 장 앞에는 그 지역의 지도와 지명, 이동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를 따로 떼어 놓고 나면 세계지리에 밝지 않는 이상 그 부분이 어디즈음인지 큰 그림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땐 책날개를 살짝 펴고 그 밑에 숨어있는 전도를 찾아보면 된다. 어쩜, 이렇게 숨겨놓았는지 정수일 선생의 약력을 읽다가 우연히 책날개가 젖혀지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모를 뻔 했다.

 

 

 

#3. 이 글은 <초원 실크로드>에서 길이 나오는 부분만 발췌하여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이다. 책 속에는 그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으로 분분한 이야기들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한번 모아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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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7-27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날개 밑에 있는 지도 발견했지요!^^
세심함이 느껴지는 편집이랄까 그랬어요.
그나저나 분홍신님의 퍼스나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작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정말 대단한!!!

탄하 2012-07-27 22:59   좋아요 0 | URL
앗! 이 책을 알고 계시군요.
정말 대단한 답사기임에도 많이 주목받지 못해 아쉬웠는데 독자가 또 계셨네요.
지도는 정말 감쪽같죠? 책을 꼼꼼히 살피시나봐요. 이거 발견하기 힘든데...

음, 퍼스나콘의 주인공은 아쉽지만 누군지 잘 몰라요.
사실 무용수가 유명해서 간직한 사진이 아니라 어느 사진작가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몇 장 건진 것 중 하나거든요. 그나마 거의 10년전엔 그 사진작가의 웹사이트를 즐찾해 놨었는데
컴터 몇 번 포맷하고 하면서 삭제해 버렸어요. 저도 그걸 후회하고 있답니다.ㅠ.ㅠ
 

 

 

아, 얄미운 반값도서의 법칙.
맘먹고 찾아보면 살 것 없고
책 안 사야겠다 싶으면 눈에 콕 찝힌다.

 

 

 

<축의 시대> 역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반값도서. 지난 6월 29일, 월말까지 설마 또 책을 사랴 안심하고 있었더니만 우연히 '이달만 반값'을 클릭하는 바람에 즉시 사버렸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알라딘 13주년을 맞아 7월 내내 반값도서로 등극...ㅠ.ㅠ 사실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는 진작부터 <신을 위한 변론>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vs종교 논쟁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보류하고 있다가 <축의 시대>를 발견, 이 책이 오히려 주저서라고 할만큼 탄탄한 내용을 갖추고 있어 사려고 별렀었다. <축의 시대>는 동서양의 고대종교가 집약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방대하고도 대단한 책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7년이나 수녀였다가 무신론자가된 종교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이다. 나는 단순한 무신론자나 유신론자의 책보다는 이렇게 변화를 겪은 이들의 책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양편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모두 갖췄다는 면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기대할 수 있고 양편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축의 시대>가 유신론대 무신론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저자의 독특한 이력은 책 속에 내재하리라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교와 철학의 접점에서 인류의 사유혁명이 진행되었던 과정을 지켜볼 수있을 것이기에 기대된다.

 

 

 

반값도서의 맛을 짭짤하게 보고 나니 <내면기행>이라는 책도 반값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물론 읽고 싶은 책들이 모두 반값이라면 좋겠지만 실현될 리는 만무하고, (나 홀로지만) 소박하게 이 한 권에 가능성을 걸어본다. <내면기행>은 우리나라 선인들의 '자찬묘비명'을 고증해 총망라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책인데, 제목은 전혀 다르지만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가 좋았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왕이나 선비뿐만 아니라 중인, 예술가, 승려 등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자서전(문학양식도 제각기다)을 엿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위인전과는 또 다른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게다가 이들의 대부분은 '위인'도 아니다) 것이 장점이었다. 묘비명과 자서전...이 콤비라면 삶을 돌아보기에 충분한 자극제가 되어주지 않을까?

 

 

 

 

 

6월에 샀던 책들을 잠시 살펴보니 특이하게도 과학분야의 책이 3권이나 된다.

뒤늦게 혼자만 과학의 달을 맞이한 듯.^^;


<기하학과 상상력>은 중고샵에서 건진 월척이다. 세상에나 고마워라, 누가 이런 책을 중고샵에 팔았을까? 기하학에 관한 책은 정말 드문 편인데 여기에 '상상력'까지 보태졌으니 정말 홀깃하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도형의 상징성을 떠올리고 확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각적 상상의 도움을 받아 개념과 계산에 얽매이지 않고도 연구를 위한 기하학적 윤곽을 집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이상, 작은 따옴표 부분은 책의 내용을 축약한 것). 물론 책 속에는 수학공식들이 도처에 등장하지만 이것은 계산 없이 상상력으로만 해석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니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하지만 새삼 수학의 정석을 복습할 필요는 없을 듯.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는 현대물리학의 난제 중 하나인 '시간의 화살'을 다룬다고 하여 잠시 의아했다. 사실 이 용어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을 통해 접하게 된지라 지질학 분야의 개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번지수를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다 빅뱅이 우주의 시작은 아니라는 주장, 그리고 상대성이론, 입자물리학, 다양한 현대우주론 등 융합과학의 향연이라는 면에서 분명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우주의 풍경>은 끈 이론 창시자의 한 사람이라는 레너드 서스킨드의 저서이다. 끈이론과 메가버스라는 개념으로 우주의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하는데, 이 이론이 등장하던 무렵부터 과학에 관한 새 정보를 제대로 업데이트하지 못한 까닭에 작심하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들었다. 게다가 <우주의 풍경>을 구입한 직후 힉스입자(일명 신의 입자라고도 하는)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뜬 것을 읽고 나니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을 빨리 쫓아가야겠다는 조바심(?)마저 든다.

 

 

6월의 충격탓일까? 그래도 7월에는 <신의 뇌>, <미적분 다이어리>와 같은 과학/수학분야의 책들을 읽었다. 물론 우주, 물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그동안 읽은 책들과는 전혀 다른 분야라 신선했다(비록 아쉬운 점도 있지만...). 먼저 <신의 뇌>는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였다. '신의 뇌'라고 하기에 신의 말을 듣고 영적인 체험을 가능케하는 뇌의 부분을 다루는 줄 알았더니 심리학과 진화론에 관한 내용이 태반이고 뇌와 호르몬에 관한 부분만 조금 '과학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뇌과학의 중요 연구결과를 정리하면 100페이지도 채 안된다는 사실..@.@ 아직 한참 미개척분야가 아닌가 싶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영(靈)'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까지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은 영장류인 침팬지를 통한 관찰과 임상실험을 위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내가 기대했던 것과 가장 유사한 정보는 '신의 뇌'라는 것이 세로토닌과 관련돼 있다는 정도였다. 아무래도 인간의 뇌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한다는 것엔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인 듯하다. <미적분 다이어리>는 정말 읽으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의 재치와 유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런 내용을 직접 강의로 듣는다면 웃다가 꼬꾸라질 것 같다. 머리아픈 공식이나 계산같은 것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쉽게 '그 어마어마한 미적분'을 잘 설명해 준다. 미적분을 가지고 일상에서 뭘할까, 싶겠지만 이 책을 열어보면 도로주행, 카지노, 다이어트 등 다양한 측면에 활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저자의 입담이 너무 좋은 탓에 전체 페이지의 1/3은 수다에 할애되고 있음이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미적분과 관련된 학자들의 생애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 한편으로는 쉽게 읽히며 재미있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핵심에 도달하기까지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쨋든 골치아프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

 

 

 

 

 

 

 

 

 

 

 

 

 

 

 

 

이밖에도 7월엔 심리학에 관한 책 2권, 교양심리학과 자기계발을 모두 포괄하는 책 2권을, 매우, 빠르게, 단숨에 읽어버렸다. 먼저 심리학 분야는 <내가 말하는 진심, 내가 모르는 본심>과 <나는 왜 상처받는 관계만 되풀이하는가>. 심리학에 관한 책은 3년전에 꽤 많이 읽어서 작년 이맘때 쯤 <마음 작동법>(심리학의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책이라더라..)을 끝으로 그만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새록새록 등장하는 심리학 책들을 보니 요즘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괜스레 궁금해졌다. 이 중 <내가 말하는...>은 방어기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은 자신이 어떤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바람직하게 다룬(방어막을 제거한) 사례와 함께 읽어가며 자신을 비춰보게 한다. 이렇게 질문(혹은 체크리스트)과 사례를 병행하며 스스로를 확인해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요즘 대중적인 심리학 도서의 경향인 것 같은데, 실상 이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의문이다. 심리상담사도 오랫동안 교육을 받고, 실습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심리상담을 받아 어느정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만 타인을 왜곡없이 볼 수 있다고 한다(그래서 어떤 학교의 경우 심리상담 '받기'가 필수코스 중 하나다). 물론 자기 자신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전적으로 자가진단이 옳다면 심리상담소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너무 자가진단 테스트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음으로 <나는 왜 상처받는...>는 보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의 예이다. 일상에서 관계가 껄끄럽다든지, 성격이 모났다든지 하는 문제와는 좀 다르다. 예를들어 어릴 적 성폭력을 당해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경우,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년 남자 등 어느정도 '심각한' 관계상에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다룬다. 대체적으로 B형 트라우마(여기서 B는 Brutal의 약자였던 것으로 기억...가물가물한 기억...ㅠ.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대인관계를 예상하고 읽는다면 조금 실망할 듯하다.

 

별로 기대 안하고 읽었는데 의외로 좋았던 책은 <왜 나는 항상 결심만 할까>였다. 자기계발서란 속된 말로 '영양가 없는 책'이라는 취급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 책은 심리학, 생리학, 뇌과학, 진화론의 관점에서 상세하게 '의지력'의 실체를 더듬어 가며 말 그대로 '의지력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째서 충동적으로 쇼핑을 하는지, 그 때 뇌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국 무엇과 닮았는지 알게된다(무엇과 닮았을까? 만족감을 얻기 위해 발이 상처입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전기충격 버튼을 눌러대는 쥐와 닮았다). 뿐만아니라 의지력의 수준이 높은 생활을 유지하게 되면 그것이 다른 부분에서의 의지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과 '식욕'에 관한 의지력 만큼은 다른 의지력과 상당히 다르다는 다소 안심스러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사실 '자기절제와 인내심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의지력의 재발견>보다는 <왜 나는 항상...>에 더 어울릴 것 같다. <의지력의 재발견>의 경우 보다 풍부한 과학적 실험과 연구결과들을 보여주는데, 너무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다 보니 솔루션부분이 좀 약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두 책 모두 자기계발서라기 보다는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가 종횡무진하는 인문교양서에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용도 거의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있는 책은 <일반의지 2.0>과 <대목장 신응수의 목조건축 기법>이다. 의지력에 관한 책을 읽고 책 사기를 덜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이 중 <대목장 신응수의 목조건축 기법>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당장 사지 않고 올해 안에 사자고, 충동을 뒤로 미루는 수법을 잘 활용하고 있을 뿐.^^

 

 

 

 

 


<일반의지 2.0>은 또다시 의지력에 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으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의 정치사상서로 '소통없는 민주주의'에 대해 논한다. 헉, '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이것을 없애다니...일단 책을 쓴 의도부터 독특했다. 그런데 '데이터베이스'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정보화 시대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될 듯하다. 책 소개에 목차가 전혀 없어 답답하지만 '정보환경에 새겨진 행위와 욕망의 집적, 사람들의 집합적 무의식=일반의지에 충실해야만 할 것이다'만 봐도 이를 통해 어떻게 민주주의를 펼치자는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대목장 신응수의 목조건축 기법>은 책을 본 순간 감탄부터 했다. 이전에도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이나 <한옥 짓는 법>을 보면서 한국건축이 선전하는 모습에 무척 반가웠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이신 신응수옹께서 이런 책을 내셨다는 자체가 기적같이만 느껴졌다. 이 책은 그가 '수원 화성, 창덕궁, 경복궁, 숭례문 등 중요한 문화유산을 복원.보수하면서 연구하고 배운 옛 장인들의 기법과 50여 년의 목수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개발한 건축술을 총망라한 책'이라는 설명인데, 축조과정까지 잘 정리된 사진으로 실려있어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2주 전부터 쓰기 시작했던 페이퍼를 미적거리는 동안 <안철수의 생각>이 출간되어 지금 급! 읽고 싶은 책으로 떠올랐다.
대선후보로서의 안철수. 반갑고도 기대되는 인물이지만 일단 그의 출마 여부를 떠나 우리 사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고 싶다.

 

그간 바빠서 뜸한 사이, 책의 세상에는 또 이렇게 대단한 일이 벌어졌구나...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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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7-2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된 책 모두 마음에 드네요.

탄하 2012-07-26 00:41   좋아요 0 | URL
앗! 마립간님이시닷! 오랜만이네요.^^
이번엔 수학/과학분야의 책들도 꽤 많은 편이죠?
아마도 마립간님 서재에 드나들었던 여파이지 싶은데요.

라로 2012-07-2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의 시대]라는 책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인생의 책 5권 중 한 권이라고 고르셨더라고요.
그 기사보고 저도 [축의 시대] 사서 읽으려고 결심했는데 반값이군요!!!
금방 주문했지만 7월까지니 얼른 주문해야겠어요!! 힛

탄하 2012-07-27 00: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뤼야켈레벡님.
책을 산 것이 아주 뿌듯해지는 소식이네요.^^
제가 책 지름신쪽에 깃털 하나를 얹은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요.
하지만 13주년 행사까지만 반값이라니 이 기회를 그냥 보내기가 참..아깝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