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활을 겨누다
김호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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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의 아니게 초원에 몰두했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가 된 까닭은 평소 내 관심사 밖에 있던 그것이 외부의 자극으로 덜컥 침입해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자극은 사진가 김홍희의 <몽골방랑>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내 마음 속에 '몽골=푸른 초원'이라는 공식을 무참히 깨부수고 현대문명이 움터가는 그곳의 현실과 여행자로서의 고독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갑자기 황무지라고 부를 순 없었다. 몽골은 여전히 (나를 포함한) 뭍사람들이 꿈꾸는 드넓은 초원이었고, 인간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이상향이기도 하니까.

 

다음으로는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발견했다. 실크로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이자 이니만큼 상당한 기대를 품고 사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형수의 <조드>를 읽게 되었다. 수분 없는 눈보라와 열 두 가지의 바람소리, 문명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예를 갖춘 사람들, 그리고 시(詩)와 다를 바 없는 글쓴이의 아름다운 언어들이 무척이나 인상 깊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올리니 누군가가 찾아왔다. 초원(몽골)의 언어를 닉네임으로 하는 어느 블로거의 방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고 몽골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그녀 덕분에 우린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함께 읽었다. 읽어보니 역시, 깊고 넓음이 가히 최고 권위자라 할만했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는 그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이다. 몸통을 찢어 벌린 염소 사진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 사진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에 주저 없이 내 책꽂이로 모셔두었다. 이 책은 그간 내가 읽어왔던 몽골지역을 눈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게 했다. 어쩌면 그간 읽었던 3권의 책들 덕분에 더욱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머리부터 다른 책들을 길게 소개한 까닭도 이 책에 앞서, 혹은 이 책 이후에 병행하여 읽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글이 많지 않은 화집이나 사진집을 볼 때면 나는 그저 두서없이 아무데나 펼쳐보곤 한다. 그렇게 내 멋대로 즐기다가 처음으로 돌아가 차곡차곡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궁금해 여기저기 펼쳐보았다. 그런데 참 느낌이 묘하다. 죽은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비참하거나 암울하지 않다. 아이들이나 할머니나 다들 담담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너른 풍경들은 멀리 있다기 보다 바로 곁에 있는 듯 한데 여백이 많음에도 다소 생소한 공간감이다. 도대체 이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때 눈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었다.


적멸(寂滅)

 

그이는 사람이 아닌 듯하다.
숫제 어질디어진 귀신인 듯하다.
그이가 그린 누구의 눈과 귀 팔다리나 허리는
저 세상에 있는 듯하다.


적멸(寂滅)이란 자연히 없어져버림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번뇌가 소멸해 평온해지는 열반의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세상에, 바로 이 단어다. 이 화집을 보고 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단어. 떠오를 듯 말 듯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내게 적멸은 한줄기 빛처럼 내 머리속을 관통했고 그제서야 난 머리가 맑아지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쓰여진 글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그이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고? 대체 누가 적멸이라는 대단한 단어를 쏙 잡아 고른 것도 모자라 서문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문장을 발휘한단 말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적멸과 첫 문장 사이에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고은 시인이다. 고은 시인의 그 맑고 깊은 깨달음도 이곳 몽골의 초원에서 비롯되었나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에는 조드(dzud)가 휩쓸고 간 자리를 다룬 것이 태반이다. 조드란 몽골지역의 기후현상으로 극심한 가뭄과 혹한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한 번 조드가 들이닥치면 이곳은 완전한 폐허가 된다. 어쩌다 한 번 겪는 이상기후가 아니라 해마다 겪는 일이니 여기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조드가 지나가고 나면 마치 잔혹한 무사가 지나간 자리처럼 가축들의 시체가 나뒹군다. 그런데 가축들의 마지막 표정이나 그들이 썩어가는 모습에서 공포나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하고 때론 초연하고 심지어 산 것보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무런 번뇌없이 운명을 탓하지 않고 그저 자연 속에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런 것일까? 솔직히 말해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동물의 사체'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때로 날아드는 나비, 곁에 피어난 꽃들이 슬픔이 아닌 따스함을 더하는 까닭도 이것들이 그저 동물의 사체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곳의 사람들 역시 죽은 가축들과 같은 표정을 지니고 있다. 그저 담담하고 초연한 표정에서는 아무런 탐욕도, 불안도, 그렇다고 깨알같은 기쁨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노인이나 어린이나 매 한가지다. 그러나 유독 날카로운 불안을 보여주는 표정도 있는데, <늑대가 오는 밤>에 그려진 한 노파는 표정이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가에 굳은 결의가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노파와 늑대의 모습을 오버랩한 것 같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이다. 몽골 사람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지난번 읽었던 김홍희의 <몽골방랑>에서 한 컷을 가져다 옆에 대본다. 김호석의 수묵화 속의 소녀와 김홍희의 사진 속의 소녀, 어딘가 참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모습, 그런 표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시차를 둔 두 작가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몽골의 풍경들을 세세히 묘사한 그림은 없다. 그저 독특한 공간감으로 표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광활함이 느껴지고 한없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한국화의 특징이 '여백의 미'라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김호석이 가진 여백의 미는 참 독특하다. 한국화에 대해 잘 모르므로 이것을 여백의 미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가 여백을 가지고 휘두르는 언어는 참 다양한 것같다. 때로는 밀도있고, 때로는 아찔하고, 때로는 광폭한 것이 어떤 감정들을 자극한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이 책을 보기 전에 읽었던 다른 3권을 통해 몽골이 어떤 곳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줄곳 내가 읽어왔던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풍경이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먹이 흰 종이를 적신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먹물이 번져간다. 시간이 흐르고 그림이 다 마르고 나면 번지던 먹물은 그 자리에 멈추고 거기서 자신의 소임을 마감한다. 더이상 번져갈 욕심도, 너무 많이 왔다고 되돌아갈 변명도 없다. 마치 그림 속의 주인공들처럼 담담하게, 물기가 가시면 거기서 멈춘다. 몽골이라는 곳이 수묵화와 잘 어울리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기가 다 할 때까지 번지다가 마르면 거기서부터 그림으로 완성되는 먹물처럼 초원의 생명들도 삶이 다 할때까지 살아가다가 하늘이 부르면 적멸로 완성되어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통로다. 자연에 순응하며 그저 삶으로 열반을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적멸의 고향, 몽골의 초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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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1-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안그래도 여권 만들어야 되는데.
분홍신님 저기요~ (속닥속닥)

탄하 2014-01-04 15:48   좋아요 0 | URL
여권사진 이쁘게 찍으세요.^^

2014-01-03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0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