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이 시대는 행복의 추구가 보편적인 시대이다. 아니, 그보다는 보편적인 행복의 추구가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는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에서는 상업화된 아름다운 행복상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범람하는 행복 교과서들은 표준화된 몇 가지 요소들을 나열하며 이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이들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이란, 부와 성공같은 외적인 요소를 뛰어 너머 내면의 건강을 중시하고 일상의 사소한 일들과 인간관계에서 기쁨을 얻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향한 손길을 내밀 때 주어진다고 한다. 행복이 유행처럼 통용되는 현상만 제외한다면 사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이 보편적인 행복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느끼는 행복이란 반대로 우리에게 낯설고 기묘한 상황이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p.138)
어째서 사랑이 아닌 분노가 고뇌를 씻어주고 그것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가시게 해 주었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어째서 세계의 정다운 관심이 아니라 무관심에 마음을 열게 되었는데 거기서 형제애를 느끼고 행복하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는 분노를 통과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無常)의 세계로 가 닿은 듯하다. 여기서의 무상이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며 지속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며 '인생무상'에서의 허망함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무상의 가르침은 변화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대상에 전도된 집착을 끊을 수 있으며 그때 나와 나 아닌 것이 비로소 참다운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뫼르소의 경우 삶에 대한 집착을 끊음으로써 세계와의 참다운 관계, 즉 형제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무관심이 정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랜 지속을 너머 영원을 꿈꾸는 우리들에겐 낯선 행복. 뫼르소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행복과 만나게 되었을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p.7)
이야기의 시작은 엄마의 죽음이다. 누군가의 엄마가 죽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에 대한 뫼르소의 반응은 상당히 이상하다. 그는 엄마가 죽은 날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엄마의 나이도 모르며,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것 조차 관심이 없다. 그저 담배를 피우고 밀크커피를 마시며 다른 조문객들을 바라만 볼 뿐. 이정도면 무관심이 정도를 지나쳐 진정 아들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때 뫼르소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행동들이,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들이, 그리고 손에 들려있는 커피잔과 담배가, 나중에 그를 얼마나 큰 곤경으로 몰고갈지. 그의 앞날에 드리운 불행의 그림자인 듯 어머니의 장지로 향하는 영구차의 모습이 육중하고 검기만하다.
* <일러스트 이방인>은 카뮈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특별판이다. 흑백대비가 강렬한 일러스트와 더불어 여백을 달리한 문단들의 배치, 공간의 이동과 뫼르소의 시선, 심경 등에 촛점을 맞춰 부각시킨 짤막한 문장들이 눈에 띈다.
평론가 신형철은 "캐릭터 기념관이라는 게 있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뫼르소는 역대 소설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인물인 것이다. 일상에서의 그는 남들처럼 직장에 다니고, 요리를 하고, 사람들과 어울린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첨예하게 다르다. 먼저 그는 자신의 본능에 상당히 집중한다. 뫼르소의 의식을 서술한 문장들을 보면 먹는 것이나 잠에 초점을 둔 부분들이 상당히 눈에 띄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꺼림칙한 이웃사람이 접근하는 상황에서도 생각보다는 감각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갖는 어떤 신분이나 직업에 대한 편견도 거의 없다. 소문이 안 좋은 이웃 레몽과도 친구가 될 수 없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친구가 되고, 자신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순순히 위험한 부탁마저 수락한다. 이 모든 것은 뫼르소가 외부세계에 대해 길들여져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상당히 단절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있어도 그의 내면 세계는 평범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다.
뫼르소에게 한 가지 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인과의 육체적 관계일 것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지도 않거나,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거나 혹은 자신의 감정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녀와 관계를 맺는 일에는 꽤나 열정적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에도 뫼르소는 마리라는 여인과 수영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녀의 청혼을 매우 쉽게, 아무런 계산 없이 받아들였다.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아니, 사랑한다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으면서, 단지 그녀가 원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가 가진 특유의 쿨함은 여느 바람둥이나 색광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마음의 자세이다. 죽음에도 사랑에도 반응하지 않는 이 남자. 그런 남자가 정욕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감옥 생활에 적응해 간다. 실상 무료함이나 무의미함에서는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에게도 박탈당할 기쁨의 한 조각이 존재하긴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탈을 통해 감옥에 적응해 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뫼르소가 부조리한 세상을 가로지르는데 커다란 힘이 된다.
이 책은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질서와 전통을 부정한다. 판사와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지 않는 뫼르소, 형무소 부속 사제의 면회를 거절하며 구원에의 권유를 끝까지 거부하는 뫼르소는 카뮈가 지향하는 '반항적 인간(l'homme revolte)'의 자세를 확연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카뮈의 철학이 20대의 철없는 주장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항변하고 신의 구원이 아닌 인간 의지의 탈출구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당시 극도로 도발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지금도 역시 그러하지만). 권위에 복종하라는 경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감옥같은 세상, 그곳에서 무의미와 무목적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우리의 현실과도 다를 바 없는 이 세 가지 모습은 거칠고 건조한 흑백의 일러스트에서도 그대로 반영돼 문득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주인공 뫼르소의 모습은 카뮈와 무척 닮았다. 아니, 그를 카뮈라 불러도 좋을 만큼 카뮈의 초상 그 자체다. 이는 분명 카뮈탄생 100주년을 맞아 뫼르소의 모습에 카뮈를 담으려는 일러스트레이터 호세 무뇨스의 특별한 의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러스트 이방인>은 카뮈가 읽어주는 자신의 철학 책 같다. 작가로 숨어있던 카뮈가 뫼르소로 나타나 그의 고뇌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인물들의 표정이 매우 강렬하게 나타난 것이 이 책의 특징이지만 그 중에서도 죽음 앞둔 뫼르소의 표정 변화는 그의 갈등에서 깨달음의 순간까지 상당히 섬세하고 다채롭게 펼쳐진다. 자신의 방에서 뜬눈으로 새벽녘을 기다리며 심장의 소리를 듣고 또 들리지 않는 순간을 상상해보려던 초조한 모습, 뜻하지 않은 부속사제의 방문에 은근히 겁이 난 모습, 그리고 부속사제에게 화를 내다가 순간 뭔가 '툭 터지는 느낌'을 받았던 깨달음의 모습. 마지막으로 결단의 순간,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게 된 뫼르소의 모습이자 카뮈의 모습. 이 모든 얼굴 하나하나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한 인간이 거쳐야 했던 고뇌와 갈등의 여정을 오롯이 담아낸다.
뫼르소는 살인을 했다. 우연이었지만 이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정 역시 공정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기에 살인이 쉬울 만큼 냉혈한이라는 논리는 살인자였지만 억울한 누명이었다. 만일 그가 세상의 권위와 질서 순응하는 보편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면 이처럼 극심한 판결을 받았을까? 여론몰이를 위해 형평성을 저버리고 그를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 이 세상이라면 그것이 구축해 온 보편적인 정의, 행복, 사랑이라는 가치들이 과연 순순히 신뢰할만한 진리인가? 뫼르소의 살인과 세상의 판결을 통해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은 어쩌면 당의정에 씌워진 달콤한 사탕표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쓰디 쓴 당의정의 진실을 알고 있는 뫼르소는 사랑도 행복도 정의도 그리 의미있는 것들이 아니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은 한 아랍인을 쏘기 직전 더위와 땀과 눈물과 긴장감으로 얼룩진 뫼르소의 얼굴이다. 처절하지만 살아있음이 진하게 전달돼 오는 얼굴. 무심하고 담담한 평소의 뫼르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부조리한 세상의 가치를 저버리고 반항적 인간으로 들어서는 선전포고의 시작이기도 하다. 강렬함이 살아있는 뫼르소의 얼굴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대는 이 씁쓸한 세상의 본질에 대항해 이방인이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