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달한
마쉬멜로우를 먹고있다. 맙소사, 평소 그 흔한 껌도 잘 안 씹는 내가 마쉬멜로우를, 봉지째 먹고 있단 말이다.ㅠ.ㅠ 사실 이건 내가 먹으려고 산 것이 아니다. 지난 달 조카네집에 갈 때, 고녀석에게 폭신폭신하고 하얀 오리지널 마쉬멜로우를 주려 했는데 한 봉지가 거의 포대자루 수준이다보니 분량이 적은 이걸 사게 됐다. 게다가 색소가 들어간 음식은 절.대. 안된다는 동생의 엄포에 때문에 때아닌 공작놀이까지 하면서. 여기서 공작놀이란, 꽈배기처럼 꼬인 마쉬멜로우에서 흰색 부분만 발라내는 섬세한 수작업을 의미하는데, 그냥 칼로 쑹덩 써는 게 아니라 가위(식가위)로 일단 반을 자른 다음 꽈배기 사선을 따라 가위 끝으로 쵹쵹 따내는 성가신 작업이었다(이래야 색깔 부분이 뭍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쥐뜯어먹다 남긴 것 같은 초췌한 모양새...ㅠ.ㅠ 다행히도 조카는 먹거리의 모양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으나 쬐끄만 조각을 깔짝깔짝 먹는 것이 감질났는지(조카는 늘 '크게 먹자'를 주장한다) 반쯤 먹다가 남은 것을 다른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이거 요즘 드문 일인데). 여하간 싹뚝거렸던 7~8개 가량의 마쉬엘로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모의 몫. 덕분에 3월 초반부터 성실히 달달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 끝이 보인다. 조금만 더 힘내자!(라고, 지난 4월 말 여기까지 쓴 후 지금은 다 먹었다. 야호!)
#2. 씁쓸한
내가 어릴 적에 케**이라는 파스가 새로 나왔다. 그게 어찌나 인기가 있던지 애들은 입을 모아 '우리 할머니도', '우리 할아버지도', 하며 무척 효과가 좋다고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파스를 가지고 떠들어댔다는 것이 참 우습지만 당시 나는 아이들의 입심에 힘입어 할머니께도 그걸 사드리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할머니는 류머티스 관절염은 커녕 튼튼한 두 다리로 여행만 쌩생이 잘 다니셨고 파스를 선물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때 맺힌 한(?)을 원없이 풀라는 뜻일까? 지금 내 손목에는 그 파스가 붙어있다. 할머니 나이도 아닌, 아직 창창한 내가...할머니께 사드려했던 그 파스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ㅠ.ㅠ 3주전쯤 하루 종일 책꽂이 정리를 했더니 밤중에 갑자기 팔힘이 탁 풀리면서 뼛속부터 쑤시는 통증이 시작됐다. 다음날 아침 통증은 사라졌지만 좀 꺼림칙해 병원에 가봤더니 인대가 늘어난 상태로 손목을 너무 많이 써 그렇단다. 의사는 내가 좋아하는 엑스레이 사진(나는 엑스레이 보는 것을 작품사진 보는 것만큼 좋아한다)을 보여주며 내 손목뼈가 어떻게 글러먹었는지 역학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고, 덧붙이길, 나이가 들면 근육의 탄력이 떨어져서 뼈의 구조가 취약한 경우 금방 무리가 간다며 앞으로 주의하라고 했다. 푸쉬업같은 것도 하지 말라면서. 하여, 의사가 처방해 준 케** 포장을 뜯는데 왜 그리 씁쓸한 것인지...
#3. 다시, 달달한
책을 읽을 때 나는, 한 권을 다 읽고 그 다음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너무너무 궁금한 책이 생길 경우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다른 책을 잡기도 한다. 근데, 몰래하는 사랑이 더 달콤하다고...흘깃거리는 책도 못지않게 달달했다. 이렇게 해서 읽은 것이 <너 없는 그 자리>와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너 없는 그 자리>는 '이혜경이 6년만에 낸 신작'이라는 문구에 끌려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혜경? 처음 보는 작가다. 하지만 저력이 든든한 작가 같아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6년만'이라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다작하는 작가보다는 더디더라도 많은 시간과 할 말이 모여 책을 낸 작가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작가도 6년동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리라. 그런 결실이니 독자는 반가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에 책을 챙겨뒀지만 좀처럼 읽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재 이웃분의 글에서 이 책을 맛보기로 보고 먼저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당장 그 글에 언급된 <금빛 날개>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빛 날개>를 읽고 내친김에 표제작인 <너 없는 그 자리>를 이어 읽었다. 달랑 단편 두 개만 읽고 이 책은 이렇더라,고 결론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읽은 범위 내에서 인간들은 일그러진 몽상을 쫓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가족을 떠나 부단히 계층사다리를 오르려는 남자(<금빛 날개>)나 짝사랑임을 외면하고 집요하게 상대방의 애인인 척하는 여자(<너 없는 그 자리>)는 아슬아슬한 꿈결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다가 섬찟한 반전, 혹은 사건의 등장. 더불어 이어지는 결말. 그들이 현실로 돌아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은 독자들은 몽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는 유독 이름만 익숙하고 작품은 접해보지 못한 작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황정은을 제외한 이장욱, 김미월, 손보미, 박솔뫼가 그런 작가들이었고, 정용준과 김종옥은 생소했다. 그런데 대상을 수상한 작가가 바로 '생소한' 그룹에 속하는 김종옥이었으므로 역시 궁금함에 못이겨 흘깃 맛보기를 시도했다. 주제는 '왕따'. 솔직히 식상하다. 청소년 이야기, 하면 너나할 것 없이 '왕따', '학교폭력', '결손가정'을 들고 나오는 것에 질렸다. 그런데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는 그 식상한 주제를 정말 대단하게 풀어냈다. 진정 작가가 마술사 같았다. 이 이야기는 왕따의 문제를 너머 한 사람의 존재감이라는 것,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회에서 순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깊이있게 포착하며 여기에 '마술'이 열어놓는 가능성이 얽혀 신비롭게 희망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관심이 가는 작품은 특이한 형식을 가진 손보미의 <과학자의 사랑>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황정은의 <上行>인데, 앞으로 틈틈이, 책읽기의 달달한 외도에 빠지고 싶을 때 들춰봐야겠다.
#4. 그리고 또 씁쓸한
지금까지 세 개의 페이퍼를, 앞머리만 쓰다가 말았다. 그 중 하나를 보면 "3월말까지 27권의 책을 읽었다. 평소 나의 독서량에 비하면 두 배나 많은 결과이다.(...)그리고 내 손에는 28번째 책이 들려있다."라고 적혀 있는데, 문제는 28번째 책 한 권을 읽는데 거의 한달 가량 걸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책은 펼치기만 하면 어찌나 잠이 오던지...범인인 책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저자는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10년간이나 소장직을 맡았던 사람으로, 내용을 어렵거나 재미없게 쓰진 않았는데 자꾸 반신반의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다. 내 경우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맥락을 놓쳐 읽었던 부분을 또 읽다가 결국엔 잠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그런 악순환 가운데, 그래도 완독해낸 책이다.
하지만 시작은 좋았다. 발췌문으로 이뤄진 서문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낭만파의 전통을 회복시키고 싶다는 저자의 결의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유전자와 환경이라는 명제를 이용해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무언가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한다면, 아마 이 무언가는 확실히 자기를 드러내겠지만, 노력만으로는 눈에 보이도록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자나 환경 안에 없는 어떤 힘이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려 할 때마다 물리적 실재를 벗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 로버트 라이트, <도덕적 동물>
나는 진화하지 않는다. 그냥 나로 존재한다. - 파블로 피카소
...이상, 서문에서
고양된 상상력을 육화한 이 화신은 영혼 속에서 곧장 불타오른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장 잘 알려주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형태는 영웅과 영웅 숭배뿐 아니라 비극적 인물, 희극적 인물, 미녀와 마녀, 잘생긴 지도자 등 다양하다. 비범한 사람들이 보이는 인물의 특성이 연극처럼 과장된 낭만파의 전통은 평등주의로 말미암아 축소되고, 학계의 냉소주의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혹은 정신분석적 진단으로 말미암아 허풍스러운 과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그러자 이후 [낭만주의]문화 속의 빈 공간에 팝스타, 가짜 귀족, 배트맨 등 인조 영웅들이 들어오면서 [낭만파의 함의가 빠져버린 채] 겉만 번지르르한 유명인들이 문화를 구성하는 얄팍한 문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심리학을 200년 전 낭만파의 열정이 이성의 시대를 무너뜨렸던 시절로 되돌려놓고 싶다. 개인적 입장에서 심리학이 그 기반을 통계수치와 진단 처방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두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시적 상상력을 개인사 연구에 적용시켜서 개인사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길 바란다. 즉 개인사[개인병력]를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현태적 형태의 소설로 읽어내길 원한다는 뜻이다.(p.65)
여기서 '이 화신'이란 바로 도토리. 이 책의 핵심도 '도토리 이론'이다. 도토리는 다이몬, 게니우스라는 명칭으로도 많이 불리며 다른 말로 하면 수호천사, 운명 등등이 될 수 있고,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인도하는 '비-인간적 안내자'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도토리도 좋고, 다이몬도 좋다. '평등주의와 이성에 의해 축소된 낭만파의 전통'에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도토리란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유명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 카뮈, 아인슈타인처럼 대대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은 아닐지라도 바이올린을 보자마자 푹 빠지는 음악신동, 작가, 디자이너의 일대기란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저자는 도토리란 어떤 재능이라기보다는 성격이라고, 몇몇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의 이야기에 비해 그리 밀도있지 않았다. 비록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평범과 비범의 차이를 '성공' 여부로 가르는 것이 계몽주의의 폐단이라 지적하는 몇 문장이 있다해도, 문학이라면 일종의 반전으로 여길 수 있겠으나 인문학에선 미흡한 근거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운명의 은밀한 윙크를 포착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성찰적인 행동이다. 즉 일종의 사유하는 행위다. 반면 운명론은일종의 감정상태로 깊이 있는 사고, 관련 세부사항, 신중한 추론을 포기하는 태도다. 즉 사물을 꿰뚫어보고 생각하는 대신 운명의 필연성이라는 더 큰 의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p.339)
운명론(fatalism)은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막연히 머나먼 목적을 위해 의도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무언가가 나를 위해 '이미 예정되었다'는 느낌 말이다. (p.342)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작용하는 운명의 힘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운명'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의도대로만 진행되게 할 순 없다. 애초부터 재능, 기질, 환경 등이 주어지는 것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기서부터가 운명의 시작이다. 어떤 이는 교육에서의 환경을 강조하며 빌 게이츠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컴퓨터 회사 영업사원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 했지만 나는 그가 우리나라에 태어났도 여전히 걸출한 인물로 성장했을거라 생각한다. 교육이 모든 걸 좌우한다면 그 옛날 정주영은 어떻게 국졸로 오늘날의 신화를 남길 수 있었을까? 이건, 그의 운명이다. 한편, 운명은 운명론과 구분해야 한다. 예정된 미래에 막연히 의지하는 '운명론'은 도토리의 안내를 받아 자기성찰적인 삶을 사는 태도가 아니다. 이 책은 그 점을 분명히 해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작고도 얇고 빨간 책, <자유의지는 없다>를 두 번이나 읽었다. 저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그가 말하는 '자유의지'의 정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고 하자. 목이 마른 상태와 목이 마르다는 생각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요구로부터 생겨나 내 머릿속에 떠올랐으며 난 물을 마신거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느냐고. 저자의 반론을 듣고 있으면 그럴법도 하다.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내 의식에 그저 떠오른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마치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춥다', '덥다', '갈증이 난다'와 같은 자각들을 '자유의지가 없음'의 사례로 내세우는 것이 마땅할까? 심지어 저자는 심장이 뛰는 것을 우리 스스로 멈출 수 없다고 하여 자유의지가 없단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좀 더 격앙되어 따지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하자. 저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며 그렇게 규정한 것에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 먼저 밝혔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빨간색을 앞에 두고 적록색맹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된다. 위에서 '운명'을 언급할 때도 말했지만 인간에게 전적으로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라고 부를만한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내가 반박하고 싶은 내용은 더 있지만, 그것은 리뷰를 통해 말하기로 하고 씁쓸한 이야기는 여기서 맺는다.
#5. 씁쓸한 뒷맛을 가시게 하는
처음부터 씁쓸한 얘기를 꺼내기 싫어 달달한 얘기부터 썼더니 씁쓸한 얘기로 맺는 꼴이 되어버렸다(그것도 아주 길게). 그래서 이번엔 좀 신나는 이야기를 해보자. 예를 들면 책 사기 같은...^^
<구관조 씻기기>는 정말, 이런말 하기 쑥스럽지만, 작가의 얼굴을 보고 샀다. 작가가 너무 잘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젊어서, 진짜 젊어서 샀다. 한달 전 쯤이었나?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는데, 거기 실린 시인의 사진이 새파랗다도 부족할 정도로 젊디 젊었다. 도대체 이 고등학생같이 생긴 남자가 어떤 시를 썼을까? <구관조 씻기기>의 첫 시를 읽어본다. '있'과 '다' 사이에서 줄바꿈이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읽을 때 운율을 위한 것이 아닐까, 라는 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나중에 다시 보니 이건 그냥 마진상의 문제로, '다'가 줄바꿈을 할 수 밖에 없는 문장길이였다. 우연히 '다'가 연이어 다음줄로 바뀌었을 뿐...괜히 설레발쳤네. ㅎㅎㅎ)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
다 책상 아래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
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 '건조과' 中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오래 전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를 산 후 로쟈님의 서재에서 이와 최종 경합을 벌였다던 한 시집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하니 제목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 거다. 그렇다고 한 주만 지나도 페이퍼가 수두룩하게 쌓이는 로쟈님의 서재를 막무가내로 탐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포기한 채로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누군가 구원의 페이퍼를 올려주었다. 그 글에서 이 책을 소개해준 것이다. 확인사살을 위해 알라딘 검색창에서 <에듀케이션>을 치고 로쟈님의 페이퍼(사실 리스트였다)가 있는지 찾아봤다. 맞다! 이 책이다..이렇게 기쁠수가!
세 권의 시집이 모두 기대받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라면 다음 두 권은 관록있는 노장들의 시집이다.
<래여애반다라>.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래(來), 여(如)까지는 확실한 것 같은데 '애'는 '愛'인지, '哀'인지 애매하기만 하다. 그래서 책 소개를 찾아봤더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 삶임을,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누구나 예외 없이 생(生)-사(死)-성(性)-식(食)의 기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하여 우리는 절망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생(詩/言語/文學)의 '불가능성'을 거듭 되씹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노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고 또 허허롭다.
마치, 우리의 삶을 위한 염불처럼 들린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승효상의 에세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서시(서문대신 쓰인 시)로 실린 박노해 시인의 시를 보고 순식간에 반해 찾게 되었다(원래 이 책에 수록된 시다). 박노해 시인하면 민주화항쟁이 떠오르기에 적어도 90년대에 출간된 시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2010년도 출간. 헉, 12년만에 낸 시집이라고 한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날잡아 책을 사야겠다 벼르던 어느 날, 이 책이 중고샵에 떳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얼른 장바구니에 챙겨넣고 약 30분가량 함께 주문할 책들을 물색. 모든 것을 마치고 장바구니에 가 본 순간, 이게 웬일이냐..그새 누군가가 사가고 없다. 옛 시인이고 구간 도서인데 누가 탐낼까 싶었지만 내 예상은 기대를 비껴갔다.ㅠ.ㅠ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다지 아쉽지 않다. 아직도 이분께서 시를 쓰고 계시다는 것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여전하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흐믓하니까. 책이야 뭐, 제값주고 사면 그만이지..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겨가며/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나가는 사람/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中에서(<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소개하고픈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포기해야겠다.
그래도 자랑하고픈 것 한 가지..^^
작년 언젠가 페이퍼에 <내면기행>이 반값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이게 이 달의 반값도서에 올랐다.
알라딘에는 진정 지니가 살고 있는 것일까? 비록 '즉각'은 아니지만 내 소원이 이뤄졌다. 신기하다.
이 책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읽고 좋아서 이 책과 짝이되는 <내면기행>까지 챙겨읽고 싶어쓴데 정말 잘 됐다.
마지막으로 지금 읽고 있는 책.
<하버드 교양강의>는 단순히 궁금했다. 그 학교 애들은 교양으로 뭘 배우나..하는. 그런데 책의 구성을 보니 자연/과학분야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물론 우수한 강의를 선별해 엮은 것이지만 한 분야로 좀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현재 2번째 강의를 읽는 중이고 지금까지는 무리없이 잘 나가고 있는데, 단 한가지...'사진1'을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는 것. 스티븐 핑커의 강의를 보면 '사진1'을 참조하라고 했는데 '그림1'밖에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1'의 설명이 '그림1'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참 책을 뒤적여가며 책의 앞, 뒤를 꼼꼼히 찾아봤고, 핑커의 강의와 참고문헌 사이를 방황해봐도 절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제본할 때 빼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날잡아 출판사에 문의해볼까 했는데 다다음날 책의 한 가운데에서 '사진1'을 비롯한 모든 사진목록이 발견되었다. 달랑 두 페이지짜리 사진목록을 이렇게 가운데 끼어 넣으면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이 책은 간지가 회색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에휴, 앞에 좀 실어주지..참 독득한 친절을 발휘하는구나..
개인적으론 <하버드 교양강의>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한 평생의 지식>이 더 마음에 든다. 이 책은 대학생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물론 단편적인 지식은 아니고, 하버드 강의처럼 강의와 비슷한 짧은 에세이들인데, 살아가는데 밀접하지만 잘 느끼지 못하는 과학, 첨단기술에서부터 늘 접하는 일, 돈, 문학, 죽음 등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하지만 산만하지 않고, 글쓴이들의 정성도 상당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각 분야에 대해 이미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날 지식의 현주소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꽤 쏠쏠한 책이다.
글을 다 쓰고 문득 책이 쌓여있는 벤치로 시선이 간다.
여기서 다 읽은 책은 단 한 권이라지?
저게 언제 다 사라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