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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ㅣ 사계절 1318 문고 77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시간은 소멸과 함께 생성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한대의 시간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 반대인 시간의 부재(不在)가 이에 더 적합한 설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한대로 이어진 시간의 어느 시점에 삽입돼 일정구간을 점유하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소멸(죽음)로 출발하는 탄생을 통해 부재 상태였던 시간을 생성시키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을 사용하다 떠나는 것이다. 다만 시간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왔기 때문이며 낮과 밤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나뉘어진 시간체계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의 존재는 생명의 살아감으로 가능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소멸해간다는 것의 동어반복이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이란 이러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 분량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끝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대체적으로 스스로 정지시키지 않고 잘 진행시키려 애쓰며 주어진 시간을 감당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고 해서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도 같을 내일을 연명하며 일상적인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살아가고, 누군가는 삶의 중대한 의미를 만나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매 순간 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연령 80세의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가 될만한 사건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시간의 부재(不在)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무생물이나 매한가지다.
여기 하네스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주어진 형량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갑갑하고 지루한 감옥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도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탈옥을 시도해 보지만 번번이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네스의 사정을 듣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 비록 담장 밖에 살고 있지만 크로노스의 시간을 감당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네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형량을 받고 감옥에 던져진 하네스처럼 우리도 인생의 분량을 선고 받고 이 세상에 던져진 가련한 존재들이다. 신체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죄수들보다 조금 나은 면이 있겠지만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책 속에서 유랑극단이 공연했던 연극의 제목을 빌자면 하나는 자유분방한 판타지가 펼쳐진 <미로>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냉혹한 기다림이 가득한 <고도를 기다리며>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네스와 탈옥수 일행이 첫 번째 방법을 택했을 때 그들은 호수에서 서로 뒤엉겨 물놀이를 하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고, 합창단으로 대중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그뤼나우라는 한 도시의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켜 감옥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명예로운 찬사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의 쾌감과 아름다움은 진실을 만남과 동시에 붕괴된다. 이것이 허무한 판타지 세계의 법칙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치명적인 이유다. 탈옥여행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사람은 자기 능력대로 사는 법'이라며 우쭐해 하던 하네스도 어쩌면 죄수에 불과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일종의 주문을 외운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하고 판타지의 일탈을 추구하는 것은 삶의 무게를 잊을 수 있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의 방어기제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빠져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하네스가 두 번째 방법을 택했을 때 그는 앙상한 나무 아래 서 있었고, 늘 '교수양반'이라는 부르던 감방 동료 클라멘스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함께'와 '견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드디어 그가 감옥이라는 견고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소, 클라멘스."(p.127)
"여러 번 생각했소. 견딘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기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p.127)
온통 탈옥에 대한 생각으로 현실을 외면했던 하네스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견딤의 미학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했음을 의미한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비루하고 보잘것 없는 죄수에 불과하지만 그의 내면은 갈등을 겪는 사이 건장하게 성장한 한 남자로 변한 것이다. 한때 환상과 허무 사이에서 방황했던 나약한 내면은 이제 용기로 바닥을 다져 참다운 자아가 자리를 잡았으며 친구에 대한 우정과 신뢰까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감옥에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하네스의 손에는 클레멘스의 저서, 『슈투름 운트 드랑』이 들려있다. 클레멘스에게 있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있을까! 클레멘스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하네스의 제스쳐가 무척이나 갸륵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수많은 고통과 번민이 따르는 힘겨운 방법이지만 일단 현실 세계의 맨얼굴을 대면하고 나면 견딤의 미학이 조력해주고 친구까지 생기는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다.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첫번째 방법을 택했다면 유랑극단 가수처럼 <안녕, 너무 오래 떠나 있지는 마!>라는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유랑극단>을 덮고 나니 눈 앞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떠오른다.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세트였던 볼품없고 앙상한 가짜 나무이다. 이 나무는 하네스가 몰래 자신의 감방으로 가져오면서부터 정체되어 있던 그의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흐르게 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일탈과 자살의 충동을 뛰어넘어 견딤이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다. 만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비참하게 느껴진다면 마음 속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도록 하자. 나무는 하네스의 나무처럼 목공품에 앙상한 모습이어도 좋다. 그저 꼿꼿한 자세로 땅을 딛고 서서 온전히 감당하는 자의 의지를 표상할 수만 있다면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며 당신을 새로운 삶으로 초청할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보듬고 의지할 수 있는 당신의 클레멘스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유랑극단>이 제안하는 살아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