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있고 또 없다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이 여행에서
문득 이 시구(詩句)를 떠올린 까닭은 무엇일까?

 

 

 

 

 

 

 

 

 

 

 

 

 

여행의 시작. 실크로드란 푸른 초원이 펼쳐진 낭만의 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탄탄한 대로와 표지판을 맨 먼저 만나는 순간 갑자기 세월이 무상해졌다. 한반도로 이어진 초원로의 어귀라는 션양.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역사의 발걸음들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일까?

 

- 랴오허 대교

 

 

 

 

 

 

 

 

 

션양을 지나 '세계 4대 문명'을 저만치 앞질렀다는 '훙산문화'로 향한 길도 마찬가지였다.훙산문화의 심장 츠펑으로 들어서는 톨게이트며, 츠펑시 입구의 길이며, 어느 것 하나 실크로드를 떠올리게 하는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 청난 톨게이트

 

 

 

 

 

도대체 나는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실크로드가 가로지르던 그곳이 현대화되지 않고 남아있길 기대했을까? 아니, 사실 무언가를 바랬다기 보다는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들이 사라졌음이,하여 길이 그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서구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만일 이 길을 개척해 걸어왔던 이들이 지금까지 이 길을 지키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풍경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 츠펑시 입구

 

 

나의 불만과는 상관없이 기필코 '초양노옥(草洋撈玉, 풀바다에서 문명의 옥석을 가려 주옥을 건져내다)'하겠다는 정수일 선생 일행은 훙산에서 칭기즈칸이 묻힌 곳을 지나 대흥안령 정상의 흙먼지길을 쉬지않고 달려간다. 정성이 이러할진대 관광객의 일원으로라도 그 땅을 밟아보지 못한 내가 무슨 할말이 있으랴. 그저 그들 일행이 찾아내는 고대 역사의 흔적과 교과서 밖의 이야기들에 얌전히 감탄할 수 밖에. 하지만 대흥안령부터는 흔히 볼 수 없는 유목민의 삶과 너른 벌판이 간간이 비춰진다. 그리고 순수하고 유서깊은 풍경들은 몽골초원로에 다가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 대흥안령 정상


 

 

대흥안령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어진 풍경 중 유독 눈에 띄는 거리들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야쓰타이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린하오터 거리이다. 우리야쓰타이 거리의 경우 고구려 서경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데 사진은 아마도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곳의 풍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쨋든, 내가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사진 오른쪽의 서양식 건물들이다.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면 훨씬 고풍스럽고 풍부한 건축적 디테일로 장식되어 있었겠지만 이 건물들은 심플하면서도 서양건축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조금은 유럽스런 어색한 풍경. 이런 건축요소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 우리야쓰타이 거리

 

 

 

 

 

 

 

시린하오터 거리는 중세 유럽풍의 가로등(이것 역시 현대화된 형태)에 루미나리에까지 갖추고 있다. 사실 러시아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몰라 이것이 러시아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유독 이곳에서 유럽적인 거리 풍경이 두 컷이나 잡혔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다.

 

- 시린하오터 거리

 

 

 

아! 고대의 마역로로 추정되는, 그러나 이젠 207번 국도가 되어버린 이 길. 마역로는 북방 기마문화의 남북통로로 실크로드의 일익을 담당해왔던 길이며 베이징으로 이어진다. 초원 실크로드는 동서축을 따라 이어져 있지만 단순히 동서만으로 난 길이 아니라 남북으로 가지를 뻗기도 했는데 마역로가 바로 이런 길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길도 역시 여느 아시아국가의 평범한 도로와 별반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207번 국도라니...마역로일지도 모를 이 길에 아스팔트를 깔고 번호를 붙이면서 마음이 편했을까?

 

- 마역로(207번 국도)

 

 

 

 

 

 

 

 

 

그래도 안타까움은 마역로가 끝이었던 것 같다. 여행이 깊어갈수록 아직 현대문명의 획일화에 물들지 않은, 앞으로의 여지가 더 남아있는 길과 영역들이 종종 눈에 띈다.

 

- 차오자잉쯔 마을 흙길

 

 

 

 

 

 

 

 

 

 

 

 

그리고 때론 초원로의 샛길이 아직 저렇게 남아있다는 것에 흥분되기도 했다.

 

 

- 대흥안령 무수꺼우의 초원로 샛길

 

 

 

 

 

 

 

 

 

 

 

이젠 칭기스칸의 서정로(서쪽정벌의 루트)를 살피고 사막으로 향하는 길. 물이 귀한 곳이라 원 없이 물을 보고 가라고 강이 인사하는 것 같다.

 

- 남타미르강 계곡 돌길

 

드디어 고비사막. 황량하고 너른 공간을 달리는 긴긴 시간동안 일행은 가끔씩 하차해 기지개를 편다. 펼쳐지는 것은 팍팍한 풍경뿐일 텐데 저리 강행군을 했으니 무척 피로했겠다 싶다. 하지만 이후에 만나는 것은 진귀한 보물과 다를 바 없는 암각화와 고분, 얼음공주,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옛 우정(?)이 담긴 증거들이니 상기된 마음에 피로할 여유도 없을 듯하다. 고비사막 이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의외로 흉노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물론 기원전 인물인 얼음공주의 살갗에 새겨진 문신을 바라보는 것도 충격이긴 했지만 장장 600~700년 간이나 유럽 고대사를 바꿔놓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흉노족의 역사는 내게 있어 무척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고비사막


 

 

 

 

 

 

 

 

 

 

거리의 풍경이 바뀐다. 그저 도로와 차들인데 180도 바뀌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색다른 풍경이다. 이곳은 블라지보스또끄(블라디보스톡). 초원 실크로드는 아시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까지 이어져있다.

 

- 블라지보스또끄 거리

 

 

 

 

 


그리고 시베리아 초원로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달린다. 이곳은 우리나라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스키타이족의 동물의장은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반도로 전해져 왔고,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가 이곳에 묻혀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냉전시대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러시아와 훨씬 더 가까이 지내며 교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는 하지만.

 

- 시베리아 철도

 

 


 

 

다시,
여행의 끝에서...


길은 있고 또 없다
를 되뇌어 본다.

 


흔적으로서의 초원로는 있었으나 역사로서의 초원로는 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길을 있도록 한다는 것은 다시 길을 따라 교역을 하고 그 길이 번성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길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길이 간직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 바로 저자가 꿈꾸는 일이며 이번 답사의 화두인 '초양노옥'이 대변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밖에 몇가지 것들

 

#1. 저자 정수일은 중국 연변에서 출생했다. 한국사람인데 그곳에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그곳 출신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어지는 경력 또한 특이하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평양 국제관계대학, 평양 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는 점이고, 카이로, 모로코, 말레이 등에서도 활동했으며 이슬람에 대한 학식도 풍부하다. 마치 실크로드를 연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중국과 북방과 이슬람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어쩌면 출생을 제외하고는 본인의 계획과 의지에 의한 것일지도..). 뿐만아니라 중세의 대탐험가인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세계에서 두번째로, 그것도 옥중에서 완역해 내기도 했다(참고로 <이븐 바투타의 오디세이>는 정수일 역은 아니지만 해설서에 준하는 도우미가 될 듯하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고, 올곧은 신념이다. 선생은 이전에 출간된 <실크로드 문명기행>(오아시스로 편)을 비롯 앞으로 바닷길까지 총 3권으로 실크로드를 완결한다고 하시는데, 이 시리즈의 완성이 기대된다.

 

 

 

 

 

 

 

 

 

 

 

 

 

 

 

 

#2.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숨겨진 선물의 발견!
사실 이 책은 지도없이 볼 수 없는 책이므로 3부로 나뉜 각 장 앞에는 그 지역의 지도와 지명, 이동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를 따로 떼어 놓고 나면 세계지리에 밝지 않는 이상 그 부분이 어디즈음인지 큰 그림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땐 책날개를 살짝 펴고 그 밑에 숨어있는 전도를 찾아보면 된다. 어쩜, 이렇게 숨겨놓았는지 정수일 선생의 약력을 읽다가 우연히 책날개가 젖혀지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모를 뻔 했다.

 

 

 

#3. 이 글은 <초원 실크로드>에서 길이 나오는 부분만 발췌하여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이다. 책 속에는 그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으로 분분한 이야기들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한번 모아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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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7-27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날개 밑에 있는 지도 발견했지요!^^
세심함이 느껴지는 편집이랄까 그랬어요.
그나저나 분홍신님의 퍼스나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작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정말 대단한!!!

탄하 2012-07-27 22:59   좋아요 0 | URL
앗! 이 책을 알고 계시군요.
정말 대단한 답사기임에도 많이 주목받지 못해 아쉬웠는데 독자가 또 계셨네요.
지도는 정말 감쪽같죠? 책을 꼼꼼히 살피시나봐요. 이거 발견하기 힘든데...

음, 퍼스나콘의 주인공은 아쉽지만 누군지 잘 몰라요.
사실 무용수가 유명해서 간직한 사진이 아니라 어느 사진작가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몇 장 건진 것 중 하나거든요. 그나마 거의 10년전엔 그 사진작가의 웹사이트를 즐찾해 놨었는데
컴터 몇 번 포맷하고 하면서 삭제해 버렸어요. 저도 그걸 후회하고 있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