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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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시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나를 가장 달뜨게 만들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거친 바다에서 펼쳐지는 초인적인 의지력의 극치라니! 열정으로 가득했던 십대에게 그것은 스릴과 모험담이 넘치는 인간승리의 이야기로 비춰졌으며, 제멋대로 ‘마초’ 노인과 ‘폭풍의’ 바다를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넘겨보니 그게 아니었다. 노인은 너무도 온화했고, 바다는 잔잔하고 망망했으며, 도대체 어떤 일도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조용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채 사분의 일도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물고기? 우습지만 물고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후 20년 가량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노인과 바다>를 펼쳤다. 그런데 처음부터 십 대 때와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간결한 문장들은 온화하지만 강인한 노인처럼 은밀한 장력(張力)을 발휘했고, 그 팽팽함 가운데 섬세하고도 치밀한 은유와 묘사들이 절로 호흡을 멈추게 했다. 누가 봐도 난해하지 않고, 가지런한 가운데 하나의 완성품으로 정육면체 같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이 작품을 그때는 어찌 몰라봤을까?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p.10)

 

아마도 그것은 표현형에만 현혹되곤 했던 어린 시절의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내게 이 이야기는 모두 ‘늙거나 낡은’ 것처럼 보였고, 그 안에 빛나고 있는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처럼 생기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늙거나 낡은’ 이야기 속에서, 노인의 배는 한없이 초라할 뿐이었고 텅 빈 채로 출항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물고기를 잡아 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생계형 어부’의 모습처럼. 그러나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눈’을 가진 형형한 기상의 노인은 ‘생계형 어부’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더 크고, 더 많고, 더 값비싼 물고기들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생존형 어부’라 구별해야 했다. ‘생존형 어부’의 배는 그의 온 삶이 실려있기에 물고기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만선으로 출항한다. 그리고 나는 바다처럼 파란 노인의 두 눈을 떠올리며 출항부터 가득한 그의 배를 만끽했다.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p.33)

 

노인의 배는 수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정확하게 드리워졌을 낚싯줄에 미끼를 다는 순간 성실함과 집중력으로 만선이 된다. 노인은 종종 운을 말하지만 줄을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운을 줄에 맡긴다는 자세이기에 팽팽하고 정확한 낚싯줄에선 엄숙함 마저 흐른다. 이후 아주 커다란 물고기와 벌이는 사투도 감동이지만 다른 어부들과는 다르게 정석을 고집하며 최상의 줄을 드리우는 모습 역시 끝까지 각인될 만큼 묵직한 감동이었다. 팽팽한 줄 하나가 이리도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여기에 노인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바로 그’ 물고기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대응하는 물고기의 생명력이 왕성하게 전달돼 오는 통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인은 혼신을 다 해 이 줄을 당김으로써 존재의 의미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버티는 시간은 곧 본연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한 노인의 거친 여정을 다루고 있지만 그가 탄 배에 항상 긴장감만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노인이 친구와도 같은 소년과 야구를 떠올릴 때면 배는 순수함으로 가득 찼고, 그가 바다 동물들의 본성과 맵시를 중얼거릴 때면 경험과 지혜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어찌보면 스스로에 대한 재 다짐인 듯, 배 위에 앉은 작은 새에게 말을 건넸을 땐 위로와 격려로 따뜻한 만선이 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p.57)

 

노인의 배는 이처럼 물고기 한 마리 싣지 않았어도 이미 풍요로움이 넘쳤다. 그의 배에서 온화한 풍요로움 마저 넘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기본적으로 바다를 여성인 ‘라 마르(la mar)’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타 생계형 어부들과는 달리 바다를 전투장인 남성으로 보지 않고 다정한 여성으로 생각한 그는 바다를 닮아 내면이 온화했고, 어부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부로서의 성장을 추구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에 몰입하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 책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어부로서의 성장은 커다란 물고기를 기어이 획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건장한 어깨와 굵은 팔뚝을 지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어부로서의 삶이 스러져 갈 때, 그 모습마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진정 성장을 이룬 어부일 것이다.

 

…폐허가 될지라도, 기초와 1층만 덩그러니 남는다고 해도,

뭔가 이야기를 남길 정도로 에너지를 지닌 건축을,

나는, 지금도 만들고 싶다.

ㅡ 안도 다다오

 

커다란 물고기를 위해 사투를 벌였던 노인의 모습에서 폐허가 됐을지라도 위용을 잃지 않는 파르테논 신전이 떠오른다. 분명 노인이라면 ‘건축’ 대신 ‘고기잡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겼을 법하다. 그래서 폐허처럼 낡은 노구(老軀)지만 끝까지 물고기를 지키려 버텼던 어부와 그 정신의 현신인 듯 갈갈이 찢겨졌음에도 대어(大漁)의 기품을 잃지 않았던 물고기의 에너지는 이토록 뜨거운 이야기를 남겼고, 그 이야기는 폐허마저도 아름다운 생(生)을 살기 위해 팽팽한 줄을 놓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마음에 또다시 커다란 용기로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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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2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6월이 헤밍웨이의 달이라고 하더니! 분홍신님은 십대 때 이미 이 책을 한 번 보셨군요. 역시..문학소녀였어. ^^ (4분의 1이라도 말이지요. 힛)


탄하 2012-06-21 00:09   좋아요 0 | URL
네, 저는 대체적으로 <노인과 바다>를 포함, 세계명작들을 1/4가량 읽다 만 1/4문학소녀였습니다.^^
오히려 달사르님께서 차분하게 책을 잘 소화하셨을 것 같네요. 아닌가? 그땐 음악이었을까요?

달사르 2012-06-23 11:42   좋아요 0 | URL
그땐..친구들과 뛰어노는 천진난만한 소년같은 소녀였슴돠. 매일같이 말타기 놀이와 숨바꼭질, 뒷동산에 가서 아카시아잎 따서 놀기, 강가에서 물놀이, 개구리 가지고 놀기, 지렁이 만지기, 두꺼비에게 돌 던지기 등등.. 지금 생각해보니 집은 그저 숙소였던 시절이었군요. ^^;

탄하 2012-06-24 13:25   좋아요 0 | URL
흡! 큰일날 뻔 했습니다. 달사르님 두 번째 댓글 옆에 '삭제'버튼이 있는데 저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댓글달기'버튼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순간 찔끔! 아직 익숙치 못해서 그런가봐요.^^;

달사르님은,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셨군요.ㅎㅎ
부럽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때 학교 교정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처음 봤거든요.
어릴 때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하는 노래를 듣고 아카시아꽃을 참 보고싶었지만
저희 동네에는 아카시아 나무 심은 아파트가 없어서...ㅠ.ㅠ
갑자기 천진난만하게 푹~ 빠져 놀 수 있는 계곡이 그리워지네요.

달사르 2012-06-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소설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란 표현에서 저 많은 걸 느끼셨군요. 분홍신님 글을 보면서 고기잡는 저 노인처럼 나도 내 직업에서 정확하게 줄을 드리워야지. 생계형 직업을 넘어서는, 최상의 줄을 드리우는 자세로 직업에 임해야지. 란 생각을 했어요.

햇볕에 번쩍거리는 바다, 고요하거나 광풍이 부는 바다에, 작은 고깃배 위에 최상의 줄을 드리우고 묵묵히 기다리는 한 노인..상상하는 것은 흐뭇한데 실지로는 무척 고독스럽겠다..생각도 들어요.

탄하 2012-06-21 00:25   좋아요 0 | URL
이미 잔주문 아줌마 사건과 정수기, 파우더 사건에서 달사르님의 정확한 줄을 엿보았는걸요.
(경영자 마인드 100점!)

네, 어릴적 기대했던 격렬한 풍랑은 없었지만 오히려 고독이 그것보다 작품의 깊이를 더해줬어요.그러니까, 고독을 대하는 노인의 자세가 때론 천진스럽고, 때론 단호했던 것이 물고기를 위한 씨름 이외의 이야기를 가득 채워줬죠.

이거 읽고 나니까 갑자기 전에 읽고 싶었던 세계 명작이 생각나는군요.
에효..언제 읽으려나 아직도 쌓인 책이 한창인데...ㅠ.ㅠ

transient-guest 2012-06-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다른 작품들은 몇 개 본게 기억이 나는데, '노인과 바다'는 정작 책은 읽어보지 않았고, 영화장면, 그것도 마지막에 다 뜯어먹힌 물고기를 배에 끄러맨채로 귀항하는 모습만 남았네요 (정확하지도 않지만요).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에는 뭔가 좀더 깊은 무엇을 저도 느낄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ㅋ

탄하 2012-06-22 00:26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을 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곰곰 생각해보니 재미있네요. 요즘 영화화하는 소설하고는 너무 판이이하게 달라서요. 소년이나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긴 하겠지만 거의 노인 한 사람을 찍는데 집중했을텐데, 연극으로치면 모노드라마 같은 작품이라 오히려 쉽지 않았겠어요.//아마 지금 다시 읽어보신다면 또 다른 느낌일 거예요. 분명히...대개 고전명작들이 그렇더라구요.^^

달사르 2012-06-23 11:44   좋아요 0 | URL
맞지여?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예전과 다른, 숨어있는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애요.

아..나도 헤밍웨이 작품 읽어봐야겠다, 싶어져요. 일단 주문이라도..

탄하 2012-06-2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고전문학을 향해, 화이팅!
하하, 달사르님, '일단 주문이라도'에..ㅎㅎㅎ
 

 

 

 

 

 

여름.
여름이다.
여름이 왔다.

 

드디어 이 책을 읽을 때가 되었나 보다.

 

 

 

 

 

김유진의 단편소설집 『여름』을 한 달 전쯤부터 사놓고 기다렸었다. 단편 <여름>은 이미『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읽었는데, 표지를 보는 순간 그만 ‘아!’하고 반해버린 것이다. 표지에 반해버린 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났을 때 불쑥 떠올랐던 꿈의 색채(내 생애 최초로 멜라토닌을 먹고 자던 날 꿨던 꿈과 같은), 그 강렬했던 꿈의 색채들이 고스란히 책 표지로 환원돼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순간 섬찟했다. 짜릿한 공감이란 이런 것일까? 그래서 그녀의 색채만으로 엮어진 한 권의 단편집을 읽고 싶어졌다. 지금으로선 작가가 특별히 사랑하는 작품, <바다 아래서, Tenuto>를 약간 맛본 정도인데, 매우 만족스럽다.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심리묘사가 두드러지거나 긴박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지독한 담담함과 미세함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드는 느낌이 좋다. 이런 느낌, 이상하게 아늑하다.

 

Tenuto. 지그시 눌러 그 음(音)을 충분하게 내주는 기법이라고 알고 있다. 음악이라곤 아주 어릴 적 피아노를 조금 친 것 밖에 없는데, 내가 어째서 Tenuto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쩐지 김유진의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 (그녀의) 유년에 관한 기억이 침묵하고 있던 나의 유년의 음(音)을 회동시킬 것 같은 예감이다.

 

*                *                *

 

지난 달에는 정말 너무 오랜만에 요리책들을 샀다. 재작년인가 채소요리가 급! 필요한 바람에 서평단 도서를 덜컥 신청한 걸 제외하면 내가 관심있는 책으로 직접 골라 사보기는 어언 10년쯤 된 것 같다.

 

이렇게 간만에 요리책을 사게 된 것은 내가 '주말 요리당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께서 조카를 돌보시느라 너무 지치셔서 나의 서포트가 필요하게 된 것. 그래서 내게 쌓인 객지생활 8년의 연륜을 고스란히 갈고 닦은(?) 요리실력으로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요리는 거의 속도전인 바, 결국 콩나물에는 꼬리가 나타나고, 부엌바닥에선 생쌀이 종종 출몰하며, 세간살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정산해 보니 깨진 접시가 1개, 종지 2개, 컵은…무려 4개다..ㅠ.ㅠ). 하지만 거기서 거기인 반찬거리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는 노력만큼은 가상하다. 그러다 보니 평소 별로 관심없던 웰빙푸드에 드디어 입문한다.^^;

 

 

 

 

 

 

 

 

 

 

 

 

 

 

 

 

이 중 『친정엄마네 레시피』는 웰빙과는 상관 없지만 선물해 주려고 산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가 관심있던 다른 책을 보다가 엄청나게 기발하고 재미있는 100자평을 타고 서재를 방문했다 알게 되었는데, 정말 요리초보를 위해 기초부터 비법까지 차근차근 잘 알려주는 좋은 책이라 행운이었고, 더불어 감사하다(나중에 보니, 알라딘에서 제일 유쾌하신 분 같다^^).

 

『마크로비오틱 밥상』과 『저염식단』은 식재료의 조합이 창의적이거나 건강 위주로 되어있어 도움이 된다(물론, 일상적인 요리들도 있다). 하지만 일단! 오타가 좀 있다는 점이 아쉬웠고(급히 출간된 느낌), 조리순서를 건너 뛰거나 번역(『마크로비오틱 밥상』은 저자가 일본인이다)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짠밥이 있으니, 뭐..그런대로 극복할 만 하다. 강추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요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시피들을 나름대로 소화시켜 보다 유용한 요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                *

 

요리책들과 함께 주문한 책 때문에 ‘풋~!’하고 웃어 버렸다. 살 때는 몰랐는데, 박스를 열어보고야 깨달은 것이다. 하필 요리책들 틈에 섞여있는 책이 르 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이라니…포만과 허기,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라, 이거지.^^

 

 

 

그런데 중고샵에서 구입한 이 책의 표지에서 뭔가가 툭 떨어진다. 주어보니 어느 여자아이의 사진 2장. 하나의 사진에 또렷이 적힌 날짜를 보니 누군가의 어릴 적 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조금은 얼떨떨해진 마음(이 사진을 어떻게 해야하나…)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빨간 줄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해는 가지만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문장.
그러나 소설에겐 진리를 정의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내 의문에 빠져든다.

누굴까? 설마 행복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기억을 떠나 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내 추측이맞을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헌 책 속에 버려진(?) 사진과 밑줄 친 문장은 이리도 오묘하게 엮인다. 암튼, 중고샵에서는 이 사진의 주인을 찾아 줄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내 생각엔 주인장이 사진을 찾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 혹시나 이 글을 볼까..싶어 함께 올려본다(주인은 얼굴 부분을 가렸어도 알아보시겠지?). 언제까지고 보관할 수는 없지만 8월 말까지는 기다려 볼 생각.

 

*                *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구입’을 드디어 끝냈다. ‘읽기’를 끝냈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ㅡ.ㅡ;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총 6권으로 나눠진 분량 때문에 구입할 엄두조차 못냈다가 최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다시 돌아보게 됐는데, 의외의 횡재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가이드 성격의 책이 아니라 페르낭 브로델이 직접 강연에 사용했던 원고를 소책자로 묶은 것에 해제를 더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큰 줄기만 간추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를 맛볼 수 있고, 핵심 용어와 이론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브로델이 중요시 여겼던 ‘장기지속longue durée’이라는 개념도 표와 자세한 설명을 통해 이해 쉽게 풀어 놓았고, 삼층집 모델 또한 간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눈에 띄는 것은 “이 교환 영역을 경제생활이라고 칭하여 물질생활과 ‘대조’하고 또 자본주의와도 ‘구분’하고자 한다”(p.170)는 대목인데, ‘경제생활≒물질생활≒자본주의’라고 막연히 인식하고 있던 나로서는 브로델의 이러한 시각이 놀랍기만 하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지만 장기지속의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말 동안 지금까지 읽고 리뷰를 쓰지 못했던 책들을 모아 한꺼번에 페이퍼로 정리하려 했다가 책장정리를 하는 바람에 계획을 바꿔 특별한 기억이 담긴 구매기를 쓰게 되었다. 몰아쓰기 리뷰 페이퍼는 이달 말에 상반기를 정리하며 완성해야지. 올해는 봄을 심히 타느라 책 읽기에 집중을 못했는데, 이제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왔으니 발랄한 리듬으로 열심히 읽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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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6-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삼매경에 빠질 분홍신님이시로군요, 에헴.
ㅎㅎ 저는 <채소가 맛있다>가 땡기는데요, 어째..요리하신 것들도 좀 올려 주시와요. 군침 흘릴 준비는 진작부터 해놓겠습니닷. >.<

탄하 2012-06-12 23:45   좋아요 0 | URL
실은, 앞치마를 두르지 못해요.
요리만하면 배부분이 다 젖어서 앞치마를 하면 옷을 두 벌 적시는거라.ㅎㅎ
(그래서 집안 일 중 설거지를 제일 안 좋아해요. 싱크대 물이 다 튀어서...)

<채소가 맛있다>는 소개한 책들보다 조금 낫긴 한데, 구하기 힘들거나 제철 아니면 비싼 재료도 있고, 조금 난이도 있는 서양요리가 섞여있어요. 실용적인 일상의 요리, 초간단 요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면 꽤 괜찮구요. 이 책에서 마+오징어 부침개,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우엉고추잡채 등등을 해봤네요.

원래 제가 지난 주 만들었던 '흑미마늘죽'(요건 <저염 밥상>의 레시피)을 올리려다가 이게 갓 지어 담았을 때 윤기있는 사진이 아니고 마지막에 남은 거 덜어놓은 사진이라 식욕 떨어질까봐 안 올렸어요. 가뜩이나 까만색인데 껄쭉하니 뭉테기로 보이니 아무래도 자제하는 편이 나을듯 하더군요. 맛은 좋았지만..^^ 나중에 보기에도 괜찮은 일품요리를 만들면 올려볼께요. 아직은 그저 국과 반찬만 만들거든요. 저장용으로..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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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활동한 시기는 1800년대 중·후반이지만 정작 우리가 아무런 재제 없이, 자유로이 그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군사정권 시대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보통사람'의 시대인 1990년도만 해도 <자본론> 제1권(만)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고 하니, 마르크스는 그 당시에도 여전히 특별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후 김수행 교수 번역의 <자본론>이 제3권까지 완결된 시기가 2004년 즈음이고(1권의 출간은 훨씬 이른 시기였지만), 2006년에는 고등학생들의 논술 학습서에까지 <자본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대략 10여 년 전쯤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힘겹게 이뤄진 마르크스와의 상봉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했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대부분의 관심은 마르크스를 통해 어떻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가에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글을 맺곤 했지만 정작 하루의 끼니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관념의 메아리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학자와 불후의 명저 <자본론>을 조금은 멀찌감치 밀어 놓는다. 그 대신 마르크스의 청년시절로 돌아가 그의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경제학 철학 초고>와 유물론에 열광했던 시절 쓴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문장들을 발췌하고 <헤겔 법철학 비판>,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고타강령비판>을 비롯 엥겔스와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나 <신성가족> 등 (대중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저서들마저 불러내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생각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대표작인 <자본론>을 제외시킨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경제, 정치를 포함한 사회, 그리고 역사에 이르렀다가 다시 개인으로 수렴되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자본론>이 차지하는 부분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로 접근했던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그의 인간애를 출발점으로 접근해 간다면 실존과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에 색다른 조언들이 들려올 것이다.

 

마르크스가 바라 본 인간이란 독립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데카르트의 입장에서는 이의를 제기할만한 정의(definition)겠지만 마르크스는 '생각' 또한 관계로부터 유입되는 바, 사회 속에서 관계 맺지 않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소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소외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소외란 단지 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더 나아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까지 이어지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p.33)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몸도,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노동생산물, 자신들의 생활 활동, 자신들의 유적 본질로부터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귀결은 인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모두는 인간의 본질적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p.52)

 

인간을 무리 속에 살아가는 유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으로 여겼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노동의 소외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의 소외란 쉽게 말해 노동의 수확과 실행과정에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상태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 하에서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모든 노동의 결과물이 종속되므로 노동자는 이것을 직접 소유·처분할 권리를 박탈 당하고 더 나아가 노동은 무의미한 반복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마르크스의 ‘노동’을 <자본론>에서의 의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의 철학적 사유 전반을 통해 지적, 육체적 활동으로 간주할 때,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직장인들이 토로하는 ‘지겨운 밥벌이’와 일맥상통하며, 그 ‘지겨운 밥벌이’가 우리의 삶, 우리의 사고방식까지 규정하는 ‘생산양식’임을 밝힌 마르크스를 통해 현실을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적 생활은 물론 사유 방식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차안(this world)보다는 피안(that world)을 바라보고 현실의 고통을 신(神)에게 의탁하게 하는 종교와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를 빚어내는 물신성(fetishism)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물신성이란 사전적 의미를 너머 인간의 사고로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망각한 채 이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종교 역시 무신론자인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신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세속적’ 방식을 교묘하게 은폐하는데 있다(비록 종교의 경우 자기소외의 ‘신성한’ 형태라고 별도로 칭했지만).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p.67)

 

저자는 물신의 지배 ‘아래’서 주술에 걸린 듯 일하고, 소비하고, 사고하는 우리들을 마르크스의 이론에 태워 ‘위’쪽으로 끌어올리고 마치 조감도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물신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끊임없이 경쟁에 허덕이는 자본가들을 내려다 보고, 소비자로서의 갈등을 겪는 노동자의 마음을 엿보며, 사회가 법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초하는 원리를 알게 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무한 경쟁의 사회풍조, 대형마트의 열풍, 행정수도 위헌소송, 삼성사건 등을 떠올리면서 19세기 한 철학자와 같은 심정으로 21세기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마르크스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어도(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심층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므로) 그의 이론이 비춰낸 자본주의의 전반의 문제점들이 현대 사회의 당면문제들을 예고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철학의 역할은 공허한 관념세계의 구축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을 비판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완성되는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재형성 되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의 묘비명 조차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p.83)

 

현실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지금’, ‘여기’를 위한 고민에 커다란 힘이 된다.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 깨달음 혹은 위로를 제공하는 ‘인생철학’은 이 시대의 부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도전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마르크스의 이상(理想)을 좇아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거나 노동혁명을 위해 투쟁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했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조차도 국유화를 비롯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정책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오히려 ‘현재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주적 운동’(p.248)으로 묘사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산주의는 생산의 국유화라는 형식적인 관점을 너머 자본주의 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개인과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해 보고 이를 변화시켜나갈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동안 일반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통용됐던 그의 이론들을 개인이라는 미시적 영역에까지 적용시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이 참신했다. 이와 관련해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개인이라는 수준에서의 공산주의란 인간의 소외가 없는 상태, 즉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표현을 선호했다는 것과도 잘 어울리는 해석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갈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 혁명이나 투쟁보다는 연합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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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5-03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 가면 일반 촌부들도 작가나 문학작품, 철학 이야기를 일상 대화하듯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부럽든지요. 나도 엄마랑 드라마 이야기 말고 문학, 철학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면 정말 좋을텐데..생각했거든요.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역시 우리나라에선 빨간색 딱지가 여전히 붙어있는 느낌인데, 이런 류의 책은 정말 반갑네요. 인간으로서의 마르크스를 알게 되는 거니까요. 킵해놨다가 다음에 읽어봐야겠어요.

탄하 2012-05-04 23:27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놀랐던게, 우리나라에선 2010년에서야 비로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원전 완역본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이예요. 강신준교수가 꽤 오랫동안 작업했다고 하더군요(이전의 김수행본은 영어 중역본이었대요). 더불어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특히 우리나라 저자만 골라보면 더 적구요. 그런 면에서 이런 책의 출간은 반길만 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관심을 갖다 보면 저희도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일상에서 철학을 이야기하는 날이 오겠죠. 그리고 좀 더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질거구요.^^

transient-guest 2012-06-09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자본론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으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트로츠키를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아는 부분으로는요, 뭔가 비운의 혁명가같기도하고, 공산화혁명 스탈린 대신 정권을 잡았더라면 좀더 사민주의흐름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탄하 2012-06-12 00:50   좋아요 0 | URL
자본론에 대한 지식이 있으시면 좀 쉬울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책에는 청년시절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마르크스에 대한 반론도 조금씩 언급한 점이 있어 전체적인 정보를 두루 섭취(?)하는데 좋을 거예요. 음...트로츠키,하면 제3인터내셔널밖에 모르겠는데, 찾아봐야 겠네요. 대부분 비운의 혁명가들은 당시에는 이루지 못할 거대한 꿈 같은것이 더 순수했었던 것 같은데, 멋진 사람인가봐요.^^

그리고, 늦었지만..반갑습니다.^^

transient-guest 2012-06-12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한국서 들고온 책을 다 읽고나면 알라딘신전의 지름신께 또다시 분향을 올려야겠죠? 그때를 위해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트로츠키에 대한 것은 이미지가 더 강하고 (음모론에 의하면 개구쟁이 스머프에서 똘똘이 스머프가 트로츠키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네요), 저도 조금밖에 몰라요. 레닌과 함께 사실상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이라는 정도? 그에대한 이야기는 조금씩 읽어가고 있습니다. 자주 뵙자구요..ㅋ

탄하 2012-06-12 22:59   좋아요 0 | URL
아..! 똘똘이 스머프 이야기,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에서 읽은 것이 기억나요. 거기서 파파스머프를 마르크스, 똘똘이 스머프를 트로츠키에 비교하고 사진에서 캐리커쳐한 것까지 보여줬었죠. 그게 트로츠키였군요. 이 기억력하곤..^^;

서재에서 잠깐 보니 상당히 많은 책들 쌓아놓으셨던데, 그게 미국에서 구입한게 아니라 들고오신거라 깜짝 놀랐었습니다. 다 읽으신다음 지름신을 영접하신다면야, 굿이죠. 제 문제는 다 읽기도 전에 자꾸 산다는 것이거든요..ㅠ.ㅠ

달사르 2012-06-1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랏? 반가운 사람들이 여기에 다! ㅎㅎ

트란님의 자주 뵙자구요..ㅋ 에 저도 한 표를. ^^

탄하 2012-06-12 23:01   좋아요 0 | URL
네, 모두 자주 뵈요.
저도 서재에 좀 더 자주 와야겠어요.
흠, 달사르님은 트란님이라 부르시는군요.
저는 어쩔까..하다가 트랜게님이라고 (맘대로) 줄여놓고 있었느데,
저보다 한 글자 적으시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01-0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준교수님 자본은 읽어보았고, 김수행교수님은 현재 국부론을 보고있습니다. 트로츠키 하하, 동물농장 가지고 학회논문을 낸 적이 있는데, 나폴레옹이 요새 국내서도 잘 보이니 안타깝군요.
 
마법의 빨간 수레 - 2015 오픈키드 좋은그림책 목록 추천도서, 아침독서신문 선정, 동원 책꾸러기 선정 바람그림책 5
레나타 리우스카 글.그림, 김혜진 옮김 / 천개의바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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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도 따스한 4월의 어느 날, 걸음마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는 조카가 처음으로 걸어서 놀이터엘 갔다. 그런데 요녀석은 희안하게도 놀이터보다는 그 옆 주차장에 더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놀이기구를 만지는 듯 하다가도 흘깃 주차장을 바라보고, 주차장에 차만 들어오면 아예 넋을 잃고 그 쪽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결국 할머니 손을 잡아 끌며 주차장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다.

 

아장아장, 뒤뚱뒤뚱...

주차장에 도착한 조카는 그곳에 정렬되어 있는 수많은 차들, 배달부의 오토바이들, 그리고 한쪽 구석의 자전거 보관소까지 유심히 바라보더니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드디어 어느 차 앞에, 정확히 말해 차 바퀴 앞에 선다. 도대체 바퀴가 뭐 그리 신기한 것인지...차례차례 각종 탈 것들을 순례하며 바퀴를 바라보는 폼이 마치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미술애호가인 듯하다. 엇, 그런데 요녀석이 바퀴를 만지려고 한다! 함께 나간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렸더니 갑자기 내 손을 척 낚아채 바퀴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것의 의미인 즉, 바퀴를 돌려 차를 움직여보라는 지시이다(조카는 늘 바퀴 자체를 돌려 장난감 차를 굴리고 논다). 이런, 이모를 무슨 차력사로 아는 건지, 나는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그 때, 주차장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간다. 조카의 시선도 냉큼 움직이는 차를 쫓는다. 그리고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자기 앞에 정지해 있는 차 바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긴다.

 

조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멈춰있는 바퀴와 움직이는 바퀴 사이에서 수많은 상상을 펼쳤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힘이 센 어른이 되어 주차장에 있는 모든 차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카의 상상 속에 루시의 빨간 수레 이야기를 슬며시 밀어 넣어주고 싶었다. 수레뿐만 아니라 마차, 기차, 우주선까지 총 출동하는 이 모험을 통해 바퀴달린 탈 것들도 실컷 보고, 상상의 세계를 두 다리로 누비며 신나게 달려보라고. 그리고 물론, 앞으로 더 자라서 심부름도 잘 하라고.

 

자, 이제 루시와 수레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표지를 열면 아기 여우 루시가 빨간 수레에 누워 책을 보고 있다. 루시에게 수레란 그저 물건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아니라 침대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친구인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친구라면 가기 싫은 심부름길도 멋진 이야기로 채워갈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엄마도 참...수레를 선물 받자마자 심부름부터 시키시다니!

 

 


루시가 심부름길을 떠나는 순간,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이것은 어쩌면 빨간 수레가 루시를 위해 발휘한 첫 번째 마법일지도 모른다. 빨
간 수레의 마법인지, 아니면 정말 친구들이 따라온 것인지,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어쨋든 이미 수레는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법도 더 가득 실렸다. 마법의 수레가 아니였다면 한 차례의 소나기와 따가운 햇살을 만났을 루시와 친구들은 거센 홍수를 건너 사막을 횡단하는 카우보이가 된다. 씩씩한 보안관 루시가 끌고 가는 것도 더이상 수레가 아니라 늠름한 마차다. 마법의 수레라더니, 정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 같다.

 

 

 

와! 시장이다. 어찌나 즐거운지 서커스 축제의 환상 마저 펼쳐진다. 루시와 친구들은 어느새 서커스 단원이 되어 묘기를 부리고 나팔을 불고 흥겹게 시장을 거닌다. 만일 루시 혼자 시장에 왔더라면 엄마가 주신 목록만 열심히 살피느라 장보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겠지?  이토록 재미난 것이 시장이라면 먼 길을 걸어 심부름을 와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야채를 실어나르니 힘들지 않고 오히려 즐겁기만하다. 루시의 마음을 아는지, 수레도 어느새 기차가 되었다. 이런, 변신로봇보다도 더 굉장한 수레의 마법인걸? 함께 온 친구들과 수레가 정말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이제 야채를 가득 싣고 집으로 가는 길, 그러나 또 한 번의 난관에 부딪히고, 수레는 얼른 마법을 뿅~! 루시와 친구들은 갑자기 야채 행성들이 운행하는 기이한 우주의 세계로 빠져든다. 물론, 우주선은 빨간 수레다.

 


 

단지 시장에 한 번 갔다왔을 뿐인데 탱탱하게 묶여있던 리본은 엉망이 되고 루시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고맙다며 이제 수레를 가지고 놀라고 하셨지만 루시는 그만 수레 안에 쏘옥 들어가 잠이 들고 만다. 하긴, 수레의 마법에 완전히 빠져 엄청난 모험의 세계를 지나왔으니 피곤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하지만 위대한 모험가 루시는 꿈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누비며 수레의 마법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수레가 가진 마법의 비밀은 루시의 상상력에 있다. 가기 싫은 심부름을 즐겁게, 책임감있게 해내는 방법을 루시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의 빨간 수레>는 심부름길을 떠난 아기 여우 루시를 통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바꿔내는 지혜를 보여주고, 아이 다운 모험심을 한껏 펼쳐주며, 수레라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탈 것을 통해 다양한 변신으로 상상력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깜찍한 이야기였다. 요즘 아이들은 학원가기에 바뻐 심부름 갈 기회는 많지 않겠지만 어디를 가든 긍정적인 마음으로 발걸음만은 항상 경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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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5-0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돌쟁이 조카가 있으시군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조카를 보는 이모의 마음은 엄마의 그것과 꼭같다지요. ^^
할머니가 조카를 얼마나 이뻐라 하실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합니다요. 하하.

여우 루시의 모험은 분홍신님에게도 어울려보이는데요? ^^ ㅎㅎ 동화책은 조카에게 읽어주는 맛도 있지만 어른이 그림 보면서 두근거리는 맛도 있잖아요. 동화책 좋아하시는 것도 저와 같으시네요. ^^

수레는 역시 빨간 색이 어울려요. 노란수레..나, 파란수레..보다 말이죠. ^^ (오은 책 지금 보고 있어요. 히)

탄하 2012-05-04 23:00   좋아요 0 | URL
역시, 조카있는 이모들의 마음..^^
첨엔 조카 주려고 하나 둘씩 챙기기 시작했는데 너무 예뻐서 오히려 제가 더 탐이나요.
글구 어떤 그림책들은 어른들 책 못지 않게 깊고 비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새삼 감탄도 하구요.

오옷~! 오은님 책! 빠르시네요. 그새 읽고 계셨어요?
달사르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다 읽으시면 부디 소감 한 마디...!
 
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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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의 색깔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루했을까? 답답했을까? 장엄했을까? 아니면 재밌었을까? 모르긴해도 한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온통 한 가지 색인 세상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나의 색깔에 이렇게 많은 의미와 느낌과 사연을 담을 수 있는데 어떻게 지루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빨강만해도 열정, 사랑, 공포, 혁명, 용기, 관용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사랑-공포 처럼 매우 이질적인 단어들이 하나의 빨강 안에 공존한다. 이것은 빨강뿐만이 아니다. 다른 색에서도 유사한 의미, 이질적인 의미, 문화로 인해 부여된 특별한 의미들이 함께하며 색이 가진 속성들을 만들어간다. 어디 그뿐일까? 만일 세상에 색이 하나뿐이라면 사람들은 색을 요모조모 탐구하며 그 색으로는 불가능한 속성까지 기어이 발명해 내려고 했을 것이다. 파랑인 세상이 너무 춥게 느껴진다면 파랑으로 뜨거움을 느낄 수 있는 형태를 고안해 냈을지도 모르고, 노랑인 세상이 너무 명랑하다면 노랑을 통해 우울함까지 느낄 수 있도록 빛을 더 연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될리는 만무하지만 어쨋든, 하나의 색에 몰두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색에 대한 생각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인은 화가가 부러웠나보다. 사람이란게 때론 나의 재주보다는 타인의 재주가, 나의 도구보다는 타인의 도구가 더 멋져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시인은 색이 되고자 했고 만날 색과 놀았다. 어떤 날은 빨강이 되고, 어떤 날은 초록이 되고, 어떤 날은 칠흑같은 검정이 되면서...시인은 점점 색에 동화되어 버렸다. 색에 동화되고 나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색을 알 수 있었다. 이젠 색의 움직임, 색의 무게, 색의 성깔까지 모두 통달해 감정이입의 최고봉에 이른다. 그러나 여기서 그칠 것인가! 시인은 더 욕심을 부렸다. 그는 그림 속으로 홀연히 스며들어가 그림에 그려진 사물이 되고, 인물이 되었으며, 마침내 화가의 마음에 진입, 그가 가진 삶의 추억과 화가로서의 번민에 자신의 가슴을 가만히 포개본다. 마치 어떤 사물에 다가가면 자신도 그 색과 똑같은 색이 될 수 있는 카멜레온처럼, 시인은 색깔뿐만 아니라 화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너랑 나랑 노랑>은 그렇게, 너와 나와 그것이 하나가 되어가는 가운데 탄생한 이야기이다.

 

처음엔 깜빡 속았다. 슬며시 화가로 위장한(?) 시인 때문에 화가의 속마음, 화가의 부치지 못한 편지, 화가와의 인터뷰가 모두 온전히 화가의 것이거나 미술사료에서 발췌한 것이라 착각했다. 물론 이것은 그림에 눈이 팔려 서문을 읽지 않은 나의 실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문을 읽었다하더라도 카멜레온처럼 숨어있는 시인을 쉽게 발견하진 못했을거다. <너랑 나랑 노랑>은 시인이 색과 그림과 화가의 내면으로 잠입해 그 안에 있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형태로 표출한다. 때론 그것이 편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모노로그처럼 들리는 자서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시로, 때론 메모로, 인터뷰로, 희곡으로, 자유자재로 변하지만 중요한 것은 표출된 형식 자체가 아니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깊어가는 색의 감성에 있다.

 

만일 클림트의 <키스>를 감상하며 시인이 적어 놓은 노랑의 사연을 읽는다면 yellow의 [-ou]발음이 반복되는 동안 진정 천천히 흐르는 노랑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천천히 흐르는 노랑은 다른 그림에서의 노랑이 아니라 오직 클림트의 <키스>에 해당된다.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을 표현한 시를 보면 여백을 가득 메웠다 이내 사라지는 눈송이의 운명을 '눈','물','빛'의 조합으로 이야기한다. 감성은 물론 형태와 과정(눈이 녹는 과정)까지 묘사하고자 했던 이 시는 눈으로 침입하는 빛과 사라지며 반짝하는 눈을 동시에 느낄수 있고, 그 내부의 가장 중앙에 있는 '물'('눈물'로 읽히게 하는)을 통해 풍경의 중심이 되는 애잔한 슬픔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늘 풍경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화가 시슬레의 순수한 마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밖에도 슬며시 미소짓게 하는 시도는 시인이 반 고흐가 되고자 했던 흔적이다. 시인은 감쪽같이 '내 동생 테오'를 부르며 마치 자신이 고흐인 양 편지를 쓰고 있다. 하긴, 스스로의 열정을 견디다 못해 귀를 잘라버린 광적인 천재, 살아 생전 많은 편지를 남겼던 반 고흐이니 글을 쓰는 시인으로서 꼭 한번은 감정을 이입해보고 싶은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시인이 들려주는 색과 그림과 화가의 이야기는 색다르다. 아니, 색같다.

 

 

 

<너랑 나랑 노랑>이라는 제목을 보면 이 책이 무척 따스하고 경쾌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마도 세번이나 혀 끝을 튕겨주는 'o'과 '너랑 나랑'에서 느껴지는 유대감과 노랑이 가진 밝은 색채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정작 글들을 읽다보면 그리 경쾌하지만은 않다. '갈기갈기 ?어지는' 초록이나 '희미한' 하양, '불길한' 빨강처럼 색깔들은 저마다 음(陰)의 요소를 발산한다. 색에 빠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색이 가진 명랑하고 아름다운 속성을 너머 그것의 맨 밑바닥에 숨겨진 슬픔과 추함까지 감싸안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시인은 뭉크의 <키스>로부터 색깔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운 키스가 칠흑같은 검정으로 둘러싸인 그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다른 어떤 색깔보다 검정을 소개해 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다 삼켜버린 잔혹한 검정에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뭉크의 <키스>는 안락한 검정을 말하지만 이것은 죽음의 안식을 갈망하는 화가의 심리를 반영한다. 그리고 시케이로스의 <절규의 메아리>는 고달프고 처절한 혁명을, 로드첸코의 <검은색 위의 검은 색>은 야심찬 단단함(말레비치의 흰색에 대항함)을,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는 엄격한 단정함을 각각 나타내려고 했다. 여기서 <화가의 어머니>는 화가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통해 그 깊은 속내를 묘사하고 있는데, 매우 짧은 모노로그지만 기다림의 시간을 버텨 온 한 여인의 한을 잘 표출해 주었다. 이처럼 <너랑 나랑 노랑>에는 하나의 색끼리 비교해보는 재미과 그것으로부터 뻣어나온 문학적 상상을 음미하는데 즐거움이 함께한다.

 

 

 

색의 내면으로 시작해 그림의 내면으로, 화가의 내면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여섯가지 색깔 각각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어올린 시인은 여느 그림감상이나 그림해설보다 다채롭고 진지한 생각들을 보여주었다. 이제, 세상이 온통 한 가지 색으로 물든다해도 절망할 사람은 없겠지. 그땐 우리 모두 시인이 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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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2-04-2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저는 노랑을 좋아해요. 명랑한 성격은 아닌데? 도 불구하고 말이죠. 노란 개나리를 보면 심장이 두근두근. 우울한 노랑이라면 고흐의 해바라기 정도일까요?

색으로 그림을 분류하는 시도, 멋있습니다. 그 분류된 그림에 따라 '시'가 들어가는게 아니라 화가에게 스며들어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시로, 때론 자서전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로 자유자재로 드러나는 시인의 숨소리라..와..

저는 이 책을 언듯 보고는 지은이를 오윤으로 읽었답니다. 어? 오윤은 화가인데 언제 시인으로? 게다가 이미 고인이신데? 했더랬어요. 헤헤. 이름이 비슷한 두 분이신데 두분 다 예술가시네요. 분홍신 님의 자세한 소개 덕분에 이 책이 무척 탐이 납니다. 시인의 새로운 시도, 여서 더 탐이 납니다. ^^

탄하 2012-04-28 11:23   좋아요 0 | URL
노랑은 확실히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저두 일상에서 노랑때문에 가슴 두근거리는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러고보니 최근 읽은 두 책도 모두 노란 표지가 썩 마음에 들었네요. 봄 탓인가?^^

이 책은 확실히 시인이 본 미술이라 그런지 미술전공자가 쓴 미술 에세이와는 색다른 느낌이더군요. 오은님은 상당히 젊은 시인인데(서른정도), 이력도 참 독특하시고(지식살림총서에서는 로봇에 관한 책을 쓰셨구, KAIST에서 근무도 하셨구..) 여러모로 끼와 열정이 다분하신 분인 것 같았어요. 달사르님도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앞으로 달사르님 글 주목해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