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작품과 말
루스 펠터슨 엮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2월 건축계는 왕슈(王樹)라는 인물의 프리츠커 수상으로 떠들썩했다. 중국 변방출신에 해외활동도 전혀없는 무명 건축가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흔히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연륜있고 지명도 높은 건축가들에게 수여해왔다. 그러나 금번 왕슈(王樹)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수상 당시 페이퍼 아키텍트(건축물의 시공여부에 관계없이 이상적인 설계를 추구하는 건축가들)로 알려진 자하 하디드나 소형 프로젝트를 위주로 작업했던 피터 춤토르의 수상 때와는 또 다른 사건이다. 적어도 이들의 건축은 수상전에도 호평을 받았고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하디드의 경우 학계에서 손꼽는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단이 왕슈를 선정한 이유는 "지역의 건축적 맥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건축에서도 국제화와 거대건축이라는 이슈가 조금은 잠잠해지는 듯하다.

 

프리츠커상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혼재하던 1979년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모더니즘의 거장들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이 수상하는 경우가 많았고 연령대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에는 대형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도시건축에 심혈을 기울이던 건축가들이 수상하는 추세를 보이면서 건축가들의 국제적 활동력과 하이테크, 초고층빌딩의 위용을 자랑했고, 2000년대에 와서는 수상자들의 개성이 더욱 두드러져 선정 기준이 보다 다양하고 과감해진 것을 엿볼 수 있는데, 렘콜하스처럼 거대건축과 도시담론에 기여한 건축가가 있는가하면 피터 춤토르처럼 장인정신이 돗보이는 소규모 건축과 지역건축에 기여한 건축가도 있고, 금번의 왕슈(王樹)처럼 예상을 뒤엎는 신예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수상자들의 평균연령도 훨씬 낮아져서 명예의 전당과도 같아보이던 수상자 명단이 건축계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지표와 거의 흡사해졌다. 이 모든 프리츠커상의 역사가 더 궁금해진다면 바로 이 책 <건축가>를 펼쳐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프리츠커상은 건축계의 혁신적이고 기여도 높은 건축가를 선정한 상이기에 건축의 역사와도 어느정도 일치하므로 건축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보는데도 유용하다. 책의 시간은 2010년부터 1979년까지 거꾸로 흐르지만 제1회부터 현재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구성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아마도 우리에게 친숙한 최신 건축물에서부터 시작해 시각적인 거리감이 없고, 현재에서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순행의 흐름을 타기 때문인 듯하다.

 

<건축가>에는 1회부터 32회까지의 수상자들을 담아 안타깝게도 올해의 주인공 왕슈의 작품을 볼 수는 없지만 건축으로 한 편의 시를 쓰는 듯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 피터 춤토르와 비범한 조형미로 평범한 입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32회 수상자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 팀(이하 SANAA)의 작품이 매혹적인 공간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스위스 팔스(Vals)의 온천을 설계해 주목받기 시작한 피터 춤토르는 이 건물로 현상학적 신비의 극치를 보여주며 마치 얇은 석재층 하나 하나와 교감하듯 돌의 숨결을 살려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은 건물, 그 지역의 지형과 지질구조에 어울리는 건물, 다시 말해서 압착되고 접히고 또 때로는 수천 장의 판으로 갈라지는 팔스 계곡의 돌덩어리들에 걸맞는 건물을 짓는 것-이것이 우리의 설계목적이었다"(p.24)라고 설명한다. 춤토르는 마치 헛간같이 생긴 작은 아틀리에에서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견고히해 나가고 있는데 건축에 관해 '유년시절의 전기傳記)'라고 표현하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어린시절의 아지트같은 모습이다. SANNA는 기본 도형과 입체를 매우 독특한 감각으로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평면이나 단면을 살펴보면 순전한 단순성을 너머 정갈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내는데, 이러한 단순성은 복잡한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내재적인 힘일 것이다. 이런 힘을 SANNA의 말로 표현하면 '투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투명성이란 "...다양한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늘 건물 안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투명성은 또한 명확함을 의미한다. 시각적 명확함뿐만 아니라 개념적 명확함까지 의미한다"(p.15) 춤토르와 SANNA의 수상을 보면 비정형과 하이브리드가 난무하는 건축세계에서 빛과 대지에 충실하는 기본적인 건축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진면목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왕슈와 SANNA의 수상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프리츠커상의 수상경력이 있다. 중국의 경우 루브르 광장 한가운데 유리 피라미드를 세운 I.M. 페이가 먼저 수상을 했고, 일본에서도 우리들이 잘 아는 안도 다다오를 비롯 총 4회에 걸쳐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인으로 제일 먼저 이 상을 받은 사람은 단게 겐조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도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정도에 해당되는 일본의 중요한 건축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건축물들을 보면 기품있고 힘이 넘친다. "전통은 일단 그 과업이 완수되면 사라져버리는 촉매와 같은 것이다"(p.281)라고 말하는 겐조의 생각처럼 전통을 박차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상이
배어있는 듯하다. 안도 다다오도 겐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무명 건투선수에 불과한 그를 유럽으로 날아가게 했던 르 코르뷔지에지만 일본 건축의 거장인 겐조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단순히 일본에서 프리츠커상을 4회나 수상했다는 점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겐조-다다오로 이어지는 건축정신의 계승이 세계 건축사에 길이 남았다는 점이 무척 부럽다. 한편 유럽 여행의 대표 명소인 I.M.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는 실제 건물의 명칭 대신 'I.M 페이'라는 애칭으로 불릴만큼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건축물이다. 처음 루브르 한 가운데 이 '망측한' 건물이 들어섰을 때 전통과 접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았지만 지금은 보면 볼수록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의미심장한 풍경으로 비춰진다. 아마도 이런 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이 아니었나 싶다. 동양 건축가들의 수상소식을 들으면 의례적으로 꼭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건축가들은 언제쯤 수상을 할까'인데, 아직은 낙관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민식, 이은영처럼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건축가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그날이 꼭 먼 미래만은 아닐 것이다.

 

 

 

<건축가>에서 화려한 화보를 자랑하며 눈에 띄는 건축가라면 '스타 건축가'들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스타 건축가'란 건축계에서도 혁신적이고 뛰어난 활동을 보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건축가를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와 프라다(PRADA)매장 설계로 각종 패션 잡지에서도 빈번히 볼 수 있었던 렘 콜하스, 그리고 은빛 구름이 몰아치는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프랭크 게리 등이 있다. 먼저 하디드와 콜하스의 경우 영국의 건축학교 AA School 출신으로 콜하스의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으며 모두 도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실험해 온 학구파(?)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실제로 지어지지도 않을(혹은 못 할) 이상적 건축들을 도면과 모델로만 습작하며 페이퍼 아키텍이라 불리웠던 자하 하디드도, 건축물보다는 기자와 시나리오 작가의 경력을 바탕으로 도시계획에 대한 획기적인 시나리오 <정신착란의 뉴욕>를 저술하며 등장했던 렘 콜하스도, 이제는 세계의 도시건축과 거대도시 담론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며 자신들의 이상건축을 구축해 가는 거장들이 되었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도시 풍경에서 비정형적이고 독특한 건축물들이 주는 유쾌함과 만나기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멋진 건물들이 아니라 '건축은 즐길 수 있는 것'(p.91)이어야 한다는 자하 하디드와 '건축은 원래 혼돈의 모험'(p.135)이라는 렘 콜하스의 소신이 담긴 선물이기도 하다.

 

 

 

한편 프랭크 게리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열정의 화신이다. 지난 24일만해도 그가 페이스북 신사옥을 설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말이다. 해체주의자로 알려지기 시작해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스타일을 확립해 왔던 게리는 건축이라기 보다는 조각에 가까운 작품들로 늘 세상을 놀라게 하곤 했는데, 이는 첨단 컴퓨터 모델링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처럼 오늘날의 건축은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다채로운 공간실험과 실물 구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게리는 이들을 대표해 아날로그적인 건축가의 스케치에서 디지털 컴퓨터의 모델링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 속의 건축물로 구현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 컴퓨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리는 오히려 "내 그림에서 나는 내가 건축에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p.247)고 말한다. 

 

 


프리츠커 수상자들 중에는 구조의 미(美)를 한껏 발휘하는 건축가들도 있다.이들의 작품은 주로 초고층 빌딩이나 공항, 경기장처럼 공학적 측면을 요하는 건
물들이 많은 편인데, 대표적인 예로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둘은 한 때 파트너이기도 했다)를 들 수 있겠다. 리처드 로저스는 2012년 영국 올림픽의 경기장 중 하나였던 그리니치 경기장(밀레니엄 돔)을 설계한 건축가로 이전부터 퐁피두 센터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퐁피두 센터는 내부로 숨겨지는 건축설비들을 밖으로 노출시켜 '인사이드 아웃 롤(inside-out roll, 캘리포니아 롤을 이르는 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공학적으로 까다로운 구조는 아니지만 그당시 하이테크라는 사조를 잘 반영하며 기계미학을 대표했다. 노먼 포스터는 매우 능수능란한 고층·초고층 설계자이다. 그의 건물들은 단순한 기하학으로 이뤄져 있지만 구조적 효율성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구사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뿐만아니라 첨단기술을 도입하면서도 인간과 자연에 친화적인 건물들이라 겉보기에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과는 또다른 면모가 담겨있다. 예를들어 일명 거킨(gherkin,오이지) 빌딩이라 불리는 봉긋한 원통 모양의 초고층 건물은 주변 건물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도도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주변 건물들의 일조권을 최대로 배려하기 위한 형태라고 한다. 또한 구조 자체가 자연적으로 공기를 순환시키는 대표적인 그린빌딩이기도 하다. 이처럼 초고층빌딩이라고 하여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포스터처럼 기술을 통해 자연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의지가 있는 건축가가 있는 한 '지속가능한 건축'은 더욱 오늘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80년대에 이르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박스형의 건물들이 보인다. 바로 건축의 대량생산과 장식의 배제가 시작되었던 모더니즘의 건물들이다
. 지금 보면 그리 특별한 것 같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건축들이었다. 특히 화장실을 제외한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필립 존슨의 '유리집(Glass House)'는 그 시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과감한 도전이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건축은 예술이다.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p.363)라는 필립 존슨의 확신이 전혀 근거없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성행하지 않았지만 모던니즘의 세력이 막강했던 서구에서는 그 반향으로 등장한 이 사조에 대해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수상자들의 건축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건축을 위한 건축가들의 헌신이 지금까지 부단히도 이어져왔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것은 단순히 '발전'이라는 피상적인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부족한, 뜨거운 몸부림과 논쟁과 실험의 결과물들이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 수많은 생각과 제도선들의 자취들을 오롯이 담아낸다.

 

 


이밖에도 <건축가>에는 다 언급하기 힘들정도로 수많은 건축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이밖에도'에 해당하는 건축가들까지 만나보는 것인데, 단지 몇몇 대중적인 건축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난 30여년간의 건축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또한 건축가들의 각 작품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설계 의도와 고민했던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 등이 고스란히 설명되어 있어 건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에도 나타나 있듯 <건축가>가 전달하려 하는 것은 건축가의 '작품과 말'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그 건물을 탄생시킨 의도를 가지는
바, 건축가의 말을 듣는 것은 곧 그들의 작품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다. 혹자는 말로 건물을 짓는다하면 관념만 무성한 현학적 작품이라든지 수다스런 설명이 덧붙은 작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 실린 프리츠커 수상자들의 작품은 그들의 말과 일치한다. 자신의 말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 좁을수록, 더 나아가 건축가로서의 신념과 작품과 일치할수록 이 상을 받을만한 위대한 건축가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어느 신은 말씀으로 엿세만에 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인간에 불과한 건축가들은 건물에 말 한 마디를 더하기 위해 몇 날을 고민하고 갈등하며 밤을 지샌다. 하지만 그들이 신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까닭은 그로인해 건축의 물성보다 더 견고한 말을 정제해 내고 그것이 한 건축가로서의 생애를 우뚝 세우며,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속해있는 이 터전을 살기좋은 환경으로 굳건히 지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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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9-0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프서점에서 한참을 보고 아주 맘에 들어서 온라인 상에 담아놨는데, 정작 주문하려고 하니.. 그동안 사서 모아 놓은 백과사전식 책들을 내가 얼마나 들춰봤는가가 떠오르면서 망설이게 되었어요.
일단 사서 쌓아놓기라고 해야겠네요. ㅋ

탄하 2012-09-09 22:06   좋아요 0 | URL
망설이시던 책에 제가 지름신을 불러 모신게 아닌가 싶네요.
건축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라면 가격에서 주춤하지만 추천할만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글판, 영문판의 내용과 레이아웃이 조금 다르대요(둘 다 소장하신 분의 말씀).
저도 어느정도까지 다른지 모르겠지만 영문판과의 가격차가 크지 않아서
비교해 보고 더 맘에 드시는 것을 고르셔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