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박물관 - 상상의 힘으로 서양미술사를 재구성하다
필리페 다베리오 지음, 윤병언 옮김 / 휴먼아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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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맘에 드는 이미지를 발견하면 나는 캡쳐를 해서 어느 폴더 속에 저장해 둔다. 이미지의 종류는 다양해서 기발한 광고, 사진, 회화, 디자인 작품들, 건축물, 일러스트레이션 등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은 이미지들은 내 블로그에 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일도 없이 그저 간직해 두었다가 가끔 시간을 내어 천천히 감상해 본다. 그런 시간을 몇 번 갖고난 다음 필요없어진 이미지들은 그냥 삭제한다. 무슨 악취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내 머릿속을 비우고, 채우고, 업그레이드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내가 모은 이미지들을 어떤 주제로 분류한다든지, 그 안에서 연관성을 찾아 분류해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적어도 <상상박물관>을 읽기 전까지는.

 

<상상박물관>의 저자 필리페 다베리오는 상당한 경력을 가진 예술평론가이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지적 유희를 위한 상상박물관을 만들었다니 관람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관람을 하다보면(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180도 바뀐다. 나만의 상상박물관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도, 그리 고고한 지적수준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베리오가 어린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맘에 드는 작품들을 제멋대로 전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작품을 보는 심미안과 지적인 사려깊음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예술가만의 영역인 것처럼 담이 높거나 난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술과 큐레이팅에 전무한 많은 사람들에게 나만의 박물관을 만들어 보는 기쁨을 체험케 한다. 이런 다베리오라면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 명화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비록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상상박물관의 소장품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박물관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박물관이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그림을 상상만하는 실체없는 허공은 아니다. 건축가의 이력을 가진 사람답게 다베리오는 먼저 손수 박물관을 설계한다. 이렇게 실제로 박물관을 설계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술작품을 모아 전시를 하건 감상을 하건 공간적인 요소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의 박물관을 구체화하는데도 도움이 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관람하는 느낌도 한껏 즐길 수 있다(실제로 박물관을 지어 그곳에 작품을 소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베리오는 박물관 설계에서부터 치밀했다. 그저 공간 구획만 한 것이 아니라 공간 사이의 이동, 공간으로 흐르는 빛, 건물의 외관까지 자신의 취향과 소장품들에 어울릴만한 건물 전체를 섬세하게 디자인한 것이다. 그리고 공간의 용도 혹은 명칭과 자신이 소장하고픈 작품들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니 그림들을 먼저 선별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건물을 구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베리오의 친절함 덕분에 우리는 미지의 허공으로 인도되는 대신 품위있고 고전적인 미가 물씬 풍기는 건물의 입구로 안내받는다. Welcome. 상상의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물의 층별 설계도를 보니 안티카메라와 같이 현대에는 생소한 이름도 눈에 뜨이고, 생각하는 방, 점심식사 방도 흥미로웠다(그냥 식당이 아니라 유독 '점심식사'여야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림이 걸리는 곳으로 소개된 방은 아니지만 연인의 방, 요리사의 방도 이색적이었고 문서보관실, 악기보관실, 주차장에 다용도실까지 완비한 것을 보니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예술애호가의 갤러리겸 대저택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박물관의 중앙홀에 해당하는 안티카메라부터 생각하는 방, 도서관, 그랑 살롱 등을 거쳐 12개의 방을 관람하는 동안 느낀것은 여러 사람들과 그림을 나누고자하는 소유자의 애틋하고 친절한 마음씨였다. 어느 방 하나 의아함을 자아내는 그림이 걸려있는 법이 없고, 쉽게 이해하고 그 방의 그림으로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예를들어 안티카메라에는 손님들이 서로 어울리며 그 방의 그림을 통해 다양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고, 부엌에는 음식과 식사에 관한 그림들이, 도서관에는 책과 학문에 관한 그림들이, 놀이방에는 진귀한 풍경들과 물건들이 담긴 그림들이 걸려있다. 초상화가 잔뜩 걸려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던 그랑 갤러리에서는 소유자 다베리오의 뜻깊은 의도가 설명되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랑 갤러리가 따르는 관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배치하는 기준은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기준은 이해하기 쉽고 직접적입니다. 그건 회화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강렬한 힘입니다. 조금 복잡한 또 하나의 기준은 유럽에 흩어져 있는 우리 선조들을 분류해서 계보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안내해 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궁금증인 셈입니다.(P.244-245)

 

<상상박물관>이 좋은 것은 하나의 방이 끝날 때마다 그 방의 어느 위치에 어떤 그림이 걸렸는지를 평면도와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렇게 그림을 전체로(혹은 한 묶음으로) 보면 개별적으로 감상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유자가 그 그림들을 통해 그 방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재미있게 들린다. 도서관의 경우 단정한 이상도시의 풍경이나 시인, 책벌레 등의 그림으로 차분한 느낌을 곳곳에 숨겨두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전쟁이나 광폭한 장면, 그리스도의 처형, 지옥에 관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도록 고요한 도서관, 고상하고 지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도서관에 이렇게 끔찍한 그림들이라니! 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일수록 탐욕과 부정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늘 상기하고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키우라는 독려의 메시지인 듯하다. 한편 하나의 방에 대한 주제 자체를 독특하게 잡은 것 외에도 그림들 사이에서의 파격의 미가 돋보이는 예도 있다. 생각하는 방에서의 도살당한 토끼 그림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여기에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에 대한 다베리오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또다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동시에 학구적인 성격의 영국식 잔인함과 반대로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베네치아식 잔인함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료입니다.(p.68)

 

* 좌에서 우로) 생각의 방에 걸린 그림 - 평면도와 그림 배치 - 도서관에 걸린 그림

 

이토록 섬세하고 사려깊은 상상의 박물관을 관람하며 나만의 박물관이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소장품들, 값비싸거나 유명세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허영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떠올려 본다. 다베리오의 박물관에는 소장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세상을 향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작품을 고른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박물관이 내 소장품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상상의 박물관을 꾸미고 멋진 미술작품들을 걸어놓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전에 관람객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박물관 주인의 자격을 얻는 첫 번째 관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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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 수업 - 친절하고 재미있는 강의실 밖 건축 이야기 썬 시리즈 1
권선영 글.그림 / 컬처그라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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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엥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파리가 싫다. 파리는 내 일생에 유일하게 소매치기를 당한 곳이자 단 시간에 가장 많은 사기꾼들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때문만은 아니다. 파리는 도시로서도 정말이지 정이 붙지 않는 곳이다. 고흐와 같은 열정의 화가를 기대하고 몽마르뜨 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관광객들의 초상화로 돈을 버는 화가들만 즐비하고,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퐁피두센터, 개선문과 같은 명소들의 이름값이 너무 커 파리 자체의 고유성과 특성이 기를 펴지 못한다.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모를까 도시를 감상하기 위해 들른 사람들에겐 참 아쉬운 모습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은 유럽 여느 도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파리는 자신의 참 모습을 쉽게 드러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을 읽다보니 파리에서의 좋은 기억 하나가 생각났다. 나도 썬처럼 파리를 헤메며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의 라 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을 가로질러 그 주변을 2시간 가량 걸었던 기억이다. 어쩌면 그 2시간이 명소로서의 파리에서 생활의 장(場)인 파리로 교차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던 단기 여행자의 유일한 행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파리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건축물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썬을 보아서였을까? 책을 읽다보니 나도 파리에 대해 조금 더 관용적이 된 듯하다. 그리고 어느새 썬이 소개하는 건축물과 내가 가본 곳이 겹칠때면 추억을 더듬듯 설레기까지 했다.

 

위대한 건축물을 찾아 팍팍한 다리를 이끌고 순례하는 책들은 이미 많이 보아왔다. 모두 알만한 건축가들이 쓴 건축여행기라 생각도 아름다웠고 사진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발걸음과 함께 손걸음이 더해진 책이라 더욱 인상깊다. 발걸음이 열정이 향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의지라면 손걸음(스케치)은 열정을 내 것으로 담아내는 또하나의 의지다. 이렇게 눈으로 본 건축물을 순간의 셔터에 맞기지 않고 공들여 그려나감으로서 보는 이들도 건축물을 천천히 음미하고 마음으로 소화하도록 이끌어준다.


<썬과 함께한 열한 번의 건축수업> 오늘의 건축세계에 모태가 되는 근대건축물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초행자의 설렘과 호기심이 한껏 뭍어나서 좋다. 분명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건축에 대해 조금은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터이고 아직은 생소한 점이 많아 썬의 입장에 많은 공감을 하며 페이지를 넘겨갈 것이다. 그녀의 손걸음이 구석구석 가 닿은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보며 마치 자신도 스케치를 하듯 더 유심히 건물들을 바라볼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건축순례에 자그마한 이야기를 붙여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데,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는 설정도 그렇고, 그의 조언으로 건축물을 탐색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에서도 다양한 건축물을 아우르는 과정에 어울리게 잘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보면 건축을 이루는 여러가지 요소뿐만 아니라 짧게나마 아르누보로부터 지금까지의 건축사를 둘러볼 기회도 얻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의 가르침과 자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건축의 공간과 빛, 재료 등을 살펴가는 썬의 스케치는 건축물의 특징과 주요 요점을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그녀의 스케치만 봐도 건물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위주로 반영했기에 실물 사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정성이 담뿍 담긴 스케치와 함께 파리의 건축물들을 살펴보는 즐거움은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몇 가지 불만스러운 점도 있다. 바로 중간중간 삽입된 파리의 명소 이야기이다.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진 이름들이 설명을 덧붙여 등장하는 순간 건축여행기로서 가진 이 책의 장점이 퇴색되는 듯하다. 여행 가이드북에서도 볼 수 있는 상세설명과 같은 이야기는 굳이 담지 않아도 이 책의 텍스트는 충분했다. 또한 건축의 색채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 점도 의아하다. 건축에서의 색채는 빛과 함께 황홀감을 주고 보다 친숙하게 다다갈 수 있는 요소는 될 수 있어도 건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에는 꼽힌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빛에 관해 좀 더 의미있는 건축물들을 선택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건축과 소통하는 법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책이었고, 파리에도 정붙일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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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에 활을 겨누다
김호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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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의 아니게 초원에 몰두했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가 된 까닭은 평소 내 관심사 밖에 있던 그것이 외부의 자극으로 덜컥 침입해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자극은 사진가 김홍희의 <몽골방랑>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내 마음 속에 '몽골=푸른 초원'이라는 공식을 무참히 깨부수고 현대문명이 움터가는 그곳의 현실과 여행자로서의 고독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갑자기 황무지라고 부를 순 없었다. 몽골은 여전히 (나를 포함한) 뭍사람들이 꿈꾸는 드넓은 초원이었고, 인간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이상향이기도 하니까.

 

다음으로는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발견했다. 실크로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이자 이니만큼 상당한 기대를 품고 사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형수의 <조드>를 읽게 되었다. 수분 없는 눈보라와 열 두 가지의 바람소리, 문명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예를 갖춘 사람들, 그리고 시(詩)와 다를 바 없는 글쓴이의 아름다운 언어들이 무척이나 인상 깊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올리니 누군가가 찾아왔다. 초원(몽골)의 언어를 닉네임으로 하는 어느 블로거의 방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고 몽골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 그녀 덕분에 우린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함께 읽었다. 읽어보니 역시, 깊고 넓음이 가히 최고 권위자라 할만했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는 그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이다. 몸통을 찢어 벌린 염소 사진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 사진의 출처가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에 주저 없이 내 책꽂이로 모셔두었다. 이 책은 그간 내가 읽어왔던 몽골지역을 눈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게 했다. 어쩌면 그간 읽었던 3권의 책들 덕분에 더욱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머리부터 다른 책들을 길게 소개한 까닭도 이 책에 앞서, 혹은 이 책 이후에 병행하여 읽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글이 많지 않은 화집이나 사진집을 볼 때면 나는 그저 두서없이 아무데나 펼쳐보곤 한다. 그렇게 내 멋대로 즐기다가 처음으로 돌아가 차곡차곡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궁금해 여기저기 펼쳐보았다. 그런데 참 느낌이 묘하다. 죽은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비참하거나 암울하지 않다. 아이들이나 할머니나 다들 담담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너른 풍경들은 멀리 있다기 보다 바로 곁에 있는 듯 한데 여백이 많음에도 다소 생소한 공간감이다. 도대체 이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때 눈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었다.


적멸(寂滅)

 

그이는 사람이 아닌 듯하다.
숫제 어질디어진 귀신인 듯하다.
그이가 그린 누구의 눈과 귀 팔다리나 허리는
저 세상에 있는 듯하다.


적멸(寂滅)이란 자연히 없어져버림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번뇌가 소멸해 평온해지는 열반의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세상에, 바로 이 단어다. 이 화집을 보고 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단어. 떠오를 듯 말 듯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내게 적멸은 한줄기 빛처럼 내 머리속을 관통했고 그제서야 난 머리가 맑아지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쓰여진 글에 다시 가슴이 철렁한다. 그이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고? 대체 누가 적멸이라는 대단한 단어를 쏙 잡아 고른 것도 모자라 서문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문장을 발휘한단 말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적멸과 첫 문장 사이에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고은 시인이다. 고은 시인의 그 맑고 깊은 깨달음도 이곳 몽골의 초원에서 비롯되었나보다.

 

<문명에 활을 겨누다>에는 조드(dzud)가 휩쓸고 간 자리를 다룬 것이 태반이다. 조드란 몽골지역의 기후현상으로 극심한 가뭄과 혹한이 지속되는 현상이다. 한 번 조드가 들이닥치면 이곳은 완전한 폐허가 된다. 어쩌다 한 번 겪는 이상기후가 아니라 해마다 겪는 일이니 여기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조드가 지나가고 나면 마치 잔혹한 무사가 지나간 자리처럼 가축들의 시체가 나뒹군다. 그런데 가축들의 마지막 표정이나 그들이 썩어가는 모습에서 공포나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하고 때론 초연하고 심지어 산 것보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무런 번뇌없이 운명을 탓하지 않고 그저 자연 속에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런 것일까? 솔직히 말해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동물의 사체'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때로 날아드는 나비, 곁에 피어난 꽃들이 슬픔이 아닌 따스함을 더하는 까닭도 이것들이 그저 동물의 사체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곳의 사람들 역시 죽은 가축들과 같은 표정을 지니고 있다. 그저 담담하고 초연한 표정에서는 아무런 탐욕도, 불안도, 그렇다고 깨알같은 기쁨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노인이나 어린이나 매 한가지다. 그러나 유독 날카로운 불안을 보여주는 표정도 있는데, <늑대가 오는 밤>에 그려진 한 노파는 표정이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가에 굳은 결의가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노파와 늑대의 모습을 오버랩한 것 같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이다. 몽골 사람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지난번 읽었던 김홍희의 <몽골방랑>에서 한 컷을 가져다 옆에 대본다. 김호석의 수묵화 속의 소녀와 김홍희의 사진 속의 소녀, 어딘가 참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모습, 그런 표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시차를 둔 두 작가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몽골의 풍경들을 세세히 묘사한 그림은 없다. 그저 독특한 공간감으로 표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광활함이 느껴지고 한없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한국화의 특징이 '여백의 미'라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김호석이 가진 여백의 미는 참 독특하다. 한국화에 대해 잘 모르므로 이것을 여백의 미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가 여백을 가지고 휘두르는 언어는 참 다양한 것같다. 때로는 밀도있고, 때로는 아찔하고, 때로는 광폭한 것이 어떤 감정들을 자극한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이 책을 보기 전에 읽었던 다른 3권을 통해 몽골이 어떤 곳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줄곳 내가 읽어왔던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풍경이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먹이 흰 종이를 적신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먹물이 번져간다. 시간이 흐르고 그림이 다 마르고 나면 번지던 먹물은 그 자리에 멈추고 거기서 자신의 소임을 마감한다. 더이상 번져갈 욕심도, 너무 많이 왔다고 되돌아갈 변명도 없다. 마치 그림 속의 주인공들처럼 담담하게, 물기가 가시면 거기서 멈춘다. 몽골이라는 곳이 수묵화와 잘 어울리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기가 다 할 때까지 번지다가 마르면 거기서부터 그림으로 완성되는 먹물처럼 초원의 생명들도 삶이 다 할때까지 살아가다가 하늘이 부르면 적멸로 완성되어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통로다. 자연에 순응하며 그저 삶으로 열반을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적멸의 고향, 몽골의 초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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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1-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안그래도 여권 만들어야 되는데.
분홍신님 저기요~ (속닥속닥)

탄하 2014-01-04 15:48   좋아요 0 | URL
여권사진 이쁘게 찍으세요.^^

2014-01-03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0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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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열대야를 견뎌보고자 TV를 틀었다가 매우 섬뜩한 장면을 발견했다. 그건 스마트폰 광고였는데, 평온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세상의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들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있었고, 그 매끄러운 사각 프레임 속에는 경이로운 자연으로부터 이국적인 여행지, 생활 속의 크고 작은 기쁨의 순간들까지 행복이란 행복이 야무지게 한 가득 챙겨졌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 만일 이 광고를 10년 전쯤 보았다면 전자기기와 인간적인 삶의 조화를 잘 표현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 전쯤이었다면(비록 스마트폰은 없었겠지만) 침묵 속의 진한 감동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며 극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에 본 이 광고는 말 그대로 '섬뜩'이었다. 거기엔 스마트폰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전자기기에 매몰돼 자아를 상실한 몽유병 환자의 모습만이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한참 동안 동영상을 보다가 내리면서 문득 뒤돌아볼 때 남아있는 사람들의 태반이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 내가 빠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거기서 깨어나 보니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도 저렇게 넋을 놓고 자그마한 사각 프레임에 푹 빠져 있었을까? 광고는 그와 같은 각성효과가 있었다.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느새 일부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일깨워주는 효과. 여기서 스마트폰 운운하며 우리의 매몰된 모습을 언급한 것은 스마트폰 애용가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바우만식으로 표현하면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사각 프레임 앞에 방치된 우리들에게 더 없이 좋은 각성제가 되어줄 거라 덧붙이겠다.

 

스마트폰과 불평등. 언뜻 보기엔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바우만을 통해 이 책의 메시지를 읽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평등 사회에서 피라미드의 상위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궈놓은 것이 소비사회라고 말한다. 소비를 통해 어떤 '사물'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실망을 회피하고 자기 맘대로 처분하고 다룰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 또한 경쟁을 통해 얻지 못한 지위나 부에 대한 좌절을 소비로써 무마시키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경쟁에서 얻는 것에 대한 만족을 대체한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고 경쟁하여 얻을수 없는 것들을 소비로 대리만족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소비사회에서 상당히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사물이므로 이에 몰입된다는 것은 구입이건(사물의 소유) 사용이건(사물과의 관계) 불평등을 감수하는 우리 모습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피라미드의 두터운 하층을 차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집중하는 동안 소비를 부추키고 그를 통해 이윤을 얻는 상층 사람들은 더욱 더 큰 부를 얻는다. 너무도 쉽게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능력있고 수완좋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되면 모든(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에 승복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고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한 개인의 능력과 재능은 그 사람이 노력하여 얻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같은 노력을 해도 훨씬 우월한 결과를 창출하며 때로는 남들이 10배의 노력을 해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선천적인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은 애초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되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피라미드 속의 위치가 있는 듯하다. 마치 아주 오래전 주어진 신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바우만은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이상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작금의 경제적 계급사회의 문제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날이 온다고 믿는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정당하지 않음에 눈뜨는 우리들의 각성과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용기, 그것이다.


오래전 신분사회가 곪아터져 모순과 폐단을 드러냈을 때 피라미드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향해 봉기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징후는 월가 점령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재능을 두루 갖추고 경쟁에서 정당하게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들에 대해 유독, 무척이나 관용적이고 심지어 선망해 마지않는 미국 사람들이 피라미드 꼭대기의 1%를 향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는 것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여기서 경쟁의 정당함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이 책에서 밝히는 상위 1%, 혹은 10%의 가진자들과 하위층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상황을 비교한 수치를 보면 거의 경악을 할 정도이며 그것이 비록 정당한 경로를 통해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무언가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부의 종합은 최하위 5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p.18)

  

미국진보센터에 따르면, 앞서 말한 약 30년 동안 하위 50퍼센트의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은 229퍼센트 증가했다.(p.23)

 

우리 가운데 가장 어리숙한 사람들조차도 영국의 최고경영자들의 평균 보수가 지난 30년 동안 약 4000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이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들'의 수와 능력이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p.94)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대 경제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해 고발하고 그것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위에서 언급한 소비사회의 진실 뿐만아니라 더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한 경제를 옹호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낙수효과')의 헛점, '경제성장'의 배신, 부의 배분방식에 침묵하는 GNP(국민총생산) 통계수치 등 새롭게 눈뜨고 각성해야 할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여년 전, 데이비드 헨리 소로우가 월든의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스스로 경작하며 새로운 경제생활을 도모했을 때 그것은 담대한 도전이었고,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이미 1800년대 당시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깨달았고, 노동의 가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간파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실한 관계가 결여되고 있음을 인지했다. 오늘날 바우만이 바라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소로우처럼 자발적 가난이나 자력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주류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모든 모순적인 체제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인간의 참된 삶에 눈 뜨게 하려는 시도에서는 월든과 유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로우의 오리지널 월든이 있고, 심리학자 스키너의 디스토피아적 월든2가 있으니 바우만이 꿈꾸는 평등과 인간가치 우위의 사회는 '월든3'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바우만이 불평등으로 가득한 현재의 경제상황에 맞서 꿈꾸는 사회는 탐욕이 사라지고 인간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가 회복되는 사회이다. 구체적으로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불평등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박하향처럼 싸한 각성제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말한 곤경은 결국 친절한 협력, 상화환계, 공유, 상호 신뢰, 인정, 존중 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탐욕에 이끌린 소수의 축재가 모두의 행복에 이르는 왕도라는 믿음에서 도출되는 존재양식)으로 대체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p.109)

 

탐욕에는 유익한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탐욕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며, 누구의 탐욕이건 유익하지 않다.(p.109)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 상호존중, 연대, 우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라든가 실질적인 삶의 전략을 잘 살펴보라.(중략) 여러분은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간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p.110)


분명 인간적인 것을 갈망하면서도,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뚜렷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관념과 그로인해 유지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비록 그것을 느낀다 할지라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모른척해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우만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각성해야하고 조금 더 달라져야 한다. 미래의 사회에 대해 너무도 걱정스런 마음으로, 혹여 파국을 맞이해야만 행동을 개시했던 수많은 전례들을 답습할까 두려워 진심에 진심으로 조언하는 노학자의 간절함과 그의 어렴풋한 희망에 작은 싹이나마 틔우려면 후대를 이어갈 우리들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룰 사회를 월든3라 부르던 그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 지금부터 해야할 일은 소비사회에서 한발짝 멀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이 사실을 스마트폰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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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12-2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 책에는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고 있어요.
오랜만입니다. ^^

탄하 2013-12-27 18:10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오랜만이예요. 거의 7~8개월은 된 것 같네요.
저도 바우만은 <액체근대>만 읽으려 했는데,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읽었다가 별 재미 못보고(하지만 후반부는 재밌어요) 있던 차에 이 책은 짧아서 한 번 읽어봤습니다. <고독을..>이 유려한 장문에 비틀어쓰기까지 곁들여져 읽기 어려웠다면 이 책은 더 명료하고 간결해서 수월했네요. 흐..그래도 아직 <액체근대>는 손도 못댄 상태라죠.ㅋㅋ
 

 

 

 

 

 

 

 


#1. 달달한


마쉬멜로우를 먹고있다. 맙소사, 평소 그 흔한 껌도 잘 안 씹는 내가 마쉬멜로우를, 봉지째 먹고 있단 말이다.ㅠ.ㅠ 사실 이건 내가 먹으려고 산 것이 아니다. 지난 달 조카네집에 갈 때, 고녀석에게 폭신폭신하고 하얀 오리지널 마쉬멜로우를 주려 했는데 한 봉지가 거의 포대자루 수준이다보니 분량이 적은 이걸 사게 됐다. 게다가 색소가 들어간 음식은 절.대. 안된다는 동생의 엄포에 때문에 때아닌 공작놀이까지 하면서. 여기서 공작놀이란, 꽈배기처럼 꼬인 마쉬멜로우에서 흰색 부분만 발라내는 섬세한 수작업을 의미하는데, 그냥 칼로 쑹덩 써는 게 아니라 가위(식가위)로 일단 반을 자른 다음 꽈배기 사선을 따라 가위 끝으로 쵹쵹 따내는 성가신 작업이었다(이래야 색깔 부분이 뭍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쥐뜯어먹다 남긴 것 같은 초췌한 모양새...ㅠ.ㅠ 다행히도 조카는 먹거리의 모양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으나 쬐끄만 조각을 깔짝깔짝 먹는 것이 감질났는지(조카는 늘 '크게 먹자'를 주장한다) 반쯤 먹다가 남은 것을 다른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이거 요즘 드문 일인데). 여하간 싹뚝거렸던 7~8개 가량의 마쉬엘로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모의 몫. 덕분에 3월 초반부터 성실히 달달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 끝이 보인다. 조금만 더 힘내자!(라고, 지난 4월 말 여기까지 쓴 후 지금은 다 먹었다. 야호!)

 


#2. 씁쓸한


내가 어릴 적에 케**이라는 파스가 새로 나왔다. 그게 어찌나 인기가 있던지 애들은 입을 모아 '우리 할머니도', '우리 할아버지도', 하며 무척 효과가 좋다고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파스를 가지고 떠들어댔다는 것이 참 우습지만 당시 나는 아이들의 입심에 힘입어 할머니께도 그걸 사드리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할머니는 류머티스 관절염은 커녕 튼튼한 두 다리로 여행만 쌩생이 잘 다니셨고 파스를 선물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때 맺힌 한(?)을 원없이 풀라는 뜻일까? 지금 내 손목에는 그 파스가 붙어있다. 할머니 나이도 아닌, 아직 창창한 내가...할머니께 사드려했던 그 파스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ㅠ.ㅠ 3주전쯤 하루 종일 책꽂이 정리를 했더니 밤중에 갑자기 팔힘이 탁 풀리면서 뼛속부터 쑤시는 통증이 시작됐다. 다음날 아침 통증은 사라졌지만 좀 꺼림칙해 병원에 가봤더니 인대가 늘어난 상태로 손목을 너무 많이 써 그렇단다. 의사는 내가 좋아하는 엑스레이 사진(나는 엑스레이 보는 것을 작품사진 보는 것만큼 좋아한다)을 보여주며 내 손목뼈가 어떻게 글러먹었는지 역학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고, 덧붙이길, 나이가 들면 근육의 탄력이 떨어져서 뼈의 구조가 취약한 경우 금방 무리가 간다며 앞으로 주의하라고 했다. 푸쉬업같은 것도 하지 말라면서. 하여, 의사가 처방해 준 케** 포장을 뜯는데 왜 그리 씁쓸한 것인지...

 


#3. 다시, 달달한

 

 

 책을 읽을 때 나는, 한 권을 다 읽고 그 다음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너무너무 궁금한 책이 생길 경우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다른 책을 잡기도 한다. 근데, 몰래하는 사랑이 더 달콤하다고...흘깃거리는 책도 못지않게 달달했다. 이렇게 해서 읽은 것이 <너 없는 그 자리>와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너 없는 그 자리>는 '이혜경이 6년만에 낸 신작'이라는 문구에 끌려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혜경? 처음 보는 작가다. 하지만 저력이 든든한 작가 같아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6년만'이라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다작하는 작가보다는 더디더라도 많은 시간과 할 말이 모여 책을 낸 작가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작가도 6년동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리라. 그런 결실이니 독자는 반가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에 책을 챙겨뒀지만 좀처럼 읽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재 이웃분의 글에서 이 책을 맛보기로 보고 먼저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당장 그 글에 언급된 <금빛 날개>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빛 날개>를 읽고 내친김에 표제작인 <너 없는 그 자리>를 이어 읽었다. 달랑 단편 두 개만 읽고 이 책은 이렇더라,고 결론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읽은 범위 내에서 인간들은 일그러진 몽상을 쫓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가족을 떠나 부단히 계층사다리를 오르려는 남자(<금빛 날개>)나 짝사랑임을 외면하고 집요하게 상대방의 애인인 척하는 여자(<너 없는 그 자리>)는 아슬아슬한 꿈결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다가 섬찟한 반전, 혹은 사건의 등장. 더불어 이어지는 결말. 그들이 현실로 돌아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은 독자들은 몽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는 유독 이름만 익숙하고 작품은 접해보지 못한 작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황정은을 제외한 이장욱, 김미월, 손보미, 박솔뫼가 그런 작가들이었고, 정용준과 김종옥은 생소했다. 그런데 대상을 수상한 작가가 바로 '생소한' 그룹에 속하는 김종옥이었으므로 역시 궁금함에 못이겨 흘깃 맛보기를 시도했다. 주제는 '왕따'. 솔직히 식상하다. 청소년 이야기, 하면 너나할 것 없이 '왕따', '학교폭력', '결손가정'을 들고 나오는 것에 질렸다. 그런데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는 그 식상한 주제를 정말 대단하게 풀어냈다. 진정 작가가 마술사 같았다. 이 이야기는 왕따의 문제를 너머 한 사람의 존재감이라는 것,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회에서 순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깊이있게 포착하며 여기에 '마술'이 열어놓는 가능성이 얽혀 신비롭게 희망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관심이 가는 작품은 특이한 형식을 가진 손보미의 <과학자의 사랑>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황정은의 <上行>인데, 앞으로 틈틈이, 책읽기의 달달한 외도에 빠지고 싶을 때 들춰봐야겠다.

 

 

 

 

#4. 그리고 또 씁쓸한

 

 

지금까지 세 개의 페이퍼를, 앞머리만 쓰다가 말았다. 그 중 하나를 보면 "3월말까지 27권의 책을 읽었다. 평소 나의 독서량에 비하면 두 배나 많은 결과이다.(...)그리고 내 손에는 28번째 책이 들려있다."라고 적혀 있는데, 문제는 28번째 책 한 권을 읽는데 거의 한달 가량 걸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책은 펼치기만 하면 어찌나 잠이 오던지...범인인 책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저자는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10년간이나 소장직을 맡았던 사람으로, 내용을 어렵거나 재미없게 쓰진 않았는데 자꾸 반신반의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다. 내 경우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먼저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맥락을 놓쳐 읽었던 부분을 또 읽다가 결국엔 잠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그런 악순환 가운데, 그래도 완독해낸 책이다.

 

하지만 시작은 좋았다. 발췌문으로 이뤄진 서문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낭만파의 전통을 회복시키고 싶다는 저자의 결의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유전자와 환경이라는 명제를 이용해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무언가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한다면, 아마 이 무언가는 확실히 자기를 드러내겠지만, 노력만으로는 눈에 보이도록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자나 환경 안에 없는 어떤 힘이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려 할 때마다 물리적 실재를 벗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 로버트 라이트, <도덕적 동물>

 

나는 진화하지 않는다. 그냥 나로 존재한다. - 파블로 피카소

 

 ...이상, 서문에서

 

 

고양된 상상력을 육화한 이 화신은 영혼 속에서 곧장 불타오른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장 잘 알려주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형태는 영웅과 영웅 숭배뿐 아니라 비극적 인물, 희극적 인물, 미녀와 마녀, 잘생긴 지도자 등 다양하다. 비범한 사람들이 보이는 인물의 특성이 연극처럼 과장된 낭만파의 전통은 평등주의로 말미암아 축소되고, 학계의 냉소주의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혹은 정신분석적 진단으로 말미암아 허풍스러운 과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그러자 이후 [낭만주의]문화 속의 빈 공간에 팝스타, 가짜 귀족, 배트맨 등 인조 영웅들이 들어오면서 [낭만파의 함의가 빠져버린 채] 겉만 번지르르한 유명인들이 문화를 구성하는 얄팍한 문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심리학을 200년 전 낭만파의 열정이 이성의 시대를 무너뜨렸던 시절로 되돌려놓고 싶다. 개인적 입장에서 심리학이 그 기반을 통계수치와 진단 처방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두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시적 상상력을 개인사 연구에 적용시켜서 개인사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길 바란다. 즉 개인사[개인병력]를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라 현태적 형태의 소설로 읽어내길 원한다는 뜻이다.(p.65)

 

여기서 '이 화신'이란 바로 도토리. 이 책의 핵심도 '도토리 이론'이다. 도토리는 다이몬, 게니우스라는 명칭으로도 많이 불리며 다른 말로 하면 수호천사, 운명 등등이 될 수 있고,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인도하는 '비-인간적 안내자'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도토리도 좋고, 다이몬도 좋다. '평등주의와 이성에 의해 축소된 낭만파의 전통'에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도토리란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유명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 카뮈, 아인슈타인처럼 대대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은 아닐지라도 바이올린을 보자마자 푹 빠지는 음악신동, 작가, 디자이너의 일대기란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저자는 도토리란 어떤 재능이라기보다는 성격이라고, 몇몇 사람들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의 이야기에 비해 그리 밀도있지 않았다. 비록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평범과 비범의 차이를 '성공' 여부로 가르는 것이 계몽주의의 폐단이라 지적하는 몇 문장이 있다해도, 문학이라면 일종의 반전으로 여길 수 있겠으나 인문학에선 미흡한 근거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운명의 은밀한 윙크를 포착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성찰적인 행동이다. 즉 일종의 사유하는 행위다. 반면 운명론은일종의 감정상태로 깊이 있는 사고, 관련 세부사항, 신중한 추론을 포기하는 태도다. 즉 사물을 꿰뚫어보고 생각하는 대신 운명의 필연성이라는 더 큰 의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p.339)

운명론(fatalism)은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막연히 머나먼 목적을 위해 의도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무언가가 나를 위해 '이미 예정되었다'는 느낌 말이다. (p.342)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작용하는 운명의 힘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운명'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의도대로만 진행되게 할 순 없다. 애초부터 재능, 기질, 환경 등이 주어지는 것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기서부터가 운명의 시작이다. 어떤 이는 교육에서의 환경을 강조하며 빌 게이츠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컴퓨터 회사 영업사원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 했지만 나는 그가 우리나라에 태어났도 여전히 걸출한 인물로 성장했을거라 생각한다. 교육이 모든 걸 좌우한다면 그 옛날 정주영은 어떻게 국졸로 오늘날의 신화를 남길 수 있었을까? 이건, 그의 운명이다. 한편, 운명은 운명론과 구분해야 한다. 예정된 미래에 막연히 의지하는 '운명론'은 도토리의 안내를 받아 자기성찰적인 삶을 사는 태도가 아니다. 이 책은 그 점을 분명히 해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작고도 얇고 빨간 책, <자유의지는 없다>를 두 번이나 읽었다. 저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그가 말하는 '자유의지'의 정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고 하자. 목이 마른 상태와 목이 마르다는 생각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요구로부터 생겨나 내 머릿속에 떠올랐으며 난 물을 마신거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느냐고. 저자의 반론을 듣고 있으면 그럴법도 하다.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내 의식에 그저 떠오른 것이지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마치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춥다', '덥다', '갈증이 난다'와 같은 자각들을 '자유의지가 없음'의 사례로 내세우는 것이 마땅할까? 심지어 저자는 심장이 뛰는 것을 우리 스스로 멈출 수 없다고 하여 자유의지가 없단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좀 더 격앙되어 따지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하자. 저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이며 그렇게 규정한 것에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 먼저 밝혔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빨간색을 앞에 두고 적록색맹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된다. 위에서 '운명'을 언급할 때도 말했지만 인간에게 전적으로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라고 부를만한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내가 반박하고 싶은 내용은 더 있지만, 그것은 리뷰를 통해 말하기로 하고 씁쓸한 이야기는 여기서 맺는다.

 

 

#5. 씁쓸한 뒷맛을 가시게 하는


처음부터 씁쓸한 얘기를 꺼내기 싫어 달달한 얘기부터 썼더니 씁쓸한 얘기로 맺는 꼴이 되어버렸다(그것도 아주 길게). 그래서 이번엔 좀 신나는 이야기를 해보자. 예를 들면 책 사기 같은...^^

 

 

 

 

 

 

 

 

 

 

 

 

 

 

<구관조 씻기기>는 정말, 이런말 하기 쑥스럽지만, 작가의 얼굴을 보고 샀다. 작가가 너무 잘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젊어서, 진짜 젊어서 샀다. 한달 전 쯤이었나?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는데, 거기 실린 시인의 사진이 새파랗다도 부족할 정도로 젊디 젊었다. 도대체 이 고등학생같이 생긴 남자가 어떤 시를 썼을까? <구관조 씻기기>의 첫 시를 읽어본다. '있'과 '다' 사이에서 줄바꿈이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읽을 때 운율을 위한 것이 아닐까, 라는 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나중에 다시 보니 이건 그냥 마진상의 문제로, '다'가 줄바꿈을 할 수 밖에 없는 문장길이였다. 우연히 '다'가 연이어 다음줄로 바뀌었을 뿐...괜히 설레발쳤네. ㅎㅎㅎ)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
다 책상 아래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
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 '건조과' 中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오래 전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를 산 후 로쟈님의 서재에서 이와 최종 경합을 벌였다던 한 시집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하니 제목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 거다. 그렇다고 한 주만 지나도 페이퍼가 수두룩하게 쌓이는 로쟈님의 서재를 막무가내로 탐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포기한 채로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누군가 구원의 페이퍼를 올려주었다. 그 글에서 이 책을 소개해준 것이다. 확인사살을 위해 알라딘 검색창에서 <에듀케이션>을 치고 로쟈님의 페이퍼(사실 리스트였다)가 있는지 찾아봤다. 맞다! 이 책이다..이렇게 기쁠수가!

 

세 권의 시집이 모두 기대받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라면 다음 두 권은 관록있는 노장들의 시집이다.


<래여애반다라>.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래(來), 여(如)까지는 확실한 것 같은데 '애'는 '愛'인지, '哀'인지 애매하기만 하다. 그래서 책 소개를 찾아봤더니,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 삶임을,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누구나 예외 없이 생(生)-사(死)-성(性)-식(食)의 기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하여 우리는 절망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생(詩/言語/文學)의 '불가능성'을 거듭 되씹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노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고 또 허허롭다.

 

마치, 우리의 삶을 위한 염불처럼 들린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는 승효상의 에세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서시(서문대신 쓰인 시)로 실린 박노해 시인의 시를 보고 순식간에 반해 찾게 되었다(원래 이 책에 수록된 시다). 박노해 시인하면 민주화항쟁이 떠오르기에 적어도 90년대에 출간된 시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2010년도 출간. 헉, 12년만에 낸 시집이라고 한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날잡아 책을 사야겠다 벼르던 어느 날, 이 책이 중고샵에 떳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얼른 장바구니에 챙겨넣고 약 30분가량 함께 주문할 책들을 물색. 모든 것을 마치고 장바구니에 가 본 순간, 이게 웬일이냐..그새 누군가가 사가고 없다. 옛 시인이고 구간 도서인데 누가 탐낼까 싶었지만 내 예상은 기대를 비껴갔다.ㅠ.ㅠ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다지 아쉽지 않다. 아직도 이분께서 시를 쓰고 계시다는 것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여전하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흐믓하니까. 책이야 뭐, 제값주고 사면 그만이지..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겨가며/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나가는 사람/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中에서(<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소개하고픈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포기해야겠다.
그래도 자랑하고픈 것 한 가지..^^
작년 언젠가 페이퍼에 <내면기행>이 반값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썼는데, 이게 이 달의 반값도서에 올랐다.
알라딘에는 진정 지니가 살고 있는 것일까? 비록 '즉각'은 아니지만 내 소원이 이뤄졌다. 신기하다.
이 책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읽고 좋아서 이 책과 짝이되는 <내면기행>까지 챙겨읽고 싶어쓴데 정말 잘 됐다.


 

 

 

 

 

 

 

 

 

 

 

 

 

 

 

마지막으로 지금 읽고 있는 책.

<하버드 교양강의>는 단순히 궁금했다. 그 학교 애들은 교양으로 뭘 배우나..하는. 그런데 책의 구성을 보니 자연/과학분야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물론 우수한 강의를 선별해 엮은 것이지만 한 분야로 좀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현재 2번째 강의를 읽는 중이고 지금까지는 무리없이 잘 나가고 있는데, 단 한가지...'사진1'을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는 것. 스티븐 핑커의 강의를 보면 '사진1'을 참조하라고 했는데 '그림1'밖에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1'의 설명이 '그림1'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참 책을 뒤적여가며 책의 앞, 뒤를 꼼꼼히 찾아봤고, 핑커의 강의와 참고문헌 사이를 방황해봐도 절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제본할 때 빼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날잡아 출판사에 문의해볼까 했는데 다다음날 책의 한 가운데에서 '사진1'을 비롯한 모든 사진목록이 발견되었다. 달랑 두 페이지짜리 사진목록을 이렇게 가운데 끼어 넣으면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이 책은 간지가 회색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에휴, 앞에 좀 실어주지..참 독득한 친절을 발휘하는구나..

 

개인적으론 <하버드 교양강의>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한 평생의 지식>이 더 마음에 든다. 이 책은 대학생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물론 단편적인 지식은 아니고, 하버드 강의처럼 강의와 비슷한 짧은 에세이들인데, 살아가는데 밀접하지만 잘 느끼지 못하는 과학, 첨단기술에서부터 늘 접하는 일, 돈, 문학, 죽음 등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하지만 산만하지 않고, 글쓴이들의 정성도 상당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각 분야에 대해 이미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날 지식의 현주소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꽤 쏠쏠한 책이다.


글을 다 쓰고 문득 책이 쌓여있는 벤치로 시선이 간다.
여기서 다 읽은 책은 단 한 권이라지?
저게 언제 다 사라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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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5-0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문학 캠프에 황인찬 작가님이 오셨더랬죠. 저는 직접 가진 않고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젊긴 젊더라구요. 그런데 사실 황인찬 작가보다는 이이체 작가가 더 어릴걸요. 시도 좀 더 깊이가 있고 정통적일 거예요. 잘생기기도 더욱 잘생겼지요. 황인찬 작가가 노는 오빠처럼 생겼다면 이이체 작가는 시 쓰는 오빠처럼 생겼지요. 이혜경의 소설집은 몇 편은 좋았고 몇 편은 별로였어요. 제가 피곤할 때 읽어서인지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달려서인지는 몰라도 후반부가 썩 좋진 않았어요. 검은 강구였나, 그 작품은 읽다 말까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이 작가가 대단하다는 건 앞의 두 작품만 읽어도 알 수 있지요. 특히 표제작은 감동스럽습니다. 저는 진은영 시집과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어야겠어요.

탄하 2013-05-08 09:00   좋아요 0 | URL
오오..진짜 잘 생기셨네요. 근데 저는 왜 프로게이머같다는 느낌이 드는걸까요?
아마 제가 본 사진(네이버 인물소개 사진)의 헤어스타일이 게임 캐릭터처럼 치솟아 있어 그런가봐요.^^
이이체님의 작품은 좀 전에 잠깐, 몇몇 페이퍼로 읽어봤어요. 소이진님 페이퍼도 있더군요.
저도 이 분의 시집을 사봐야겠어요. 맘에 쏙 들었거든요. 좋은 작가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혜경님의 표제작은 정말 평범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섬찟하고 감쪽같이 엮어나갔죠?
다른 작품들하고 완성도에서 격차가 있는 것 같은데, 저도 나중에 유념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정말 문학을 두루두루 많이 읽으시나봐요. 모르는 작가가 없으신 듯...
문학을 공부하시는 학생? 청소년 문학 캠프..라면, 고등학생? (대학생도 갈 수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문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대단하신 듯 해요. 짧은 댓글이지만 그런 게 느껴지네요.

달사르 2013-05-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이건 반칙!
도대체 페이퍼 몇 개짜리를 합쳐놓은 거야요. ㅎㅎ
손목에 파스까지 붙이신 상태로 올리신 페이퍼라 살짝 실눈 감아드림. ㅎㅎㅎ
대신 담에는 하나의 주제로 기~~~이일게!

마쉬멜로우는 보기만 봐도 귀가 쫑긋거려져요. 제가 단 걸 잘 안 먹어서 입안에 단맛이 감도니 귀가 간질간질.
ㅋㅋ 조카사랑은 역쉬 이모지요. 이모라면, 평소에 먹지 않던 음식도 조카를 위해서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지요. 암요 암. ^^

탄하 2013-05-11 00:06   좋아요 0 | URL
으아앙..반칙?

예전에 페이퍼를 세 번이나, 앞대가리만 써 놓고 미뤄뒀거든요..ㅠ.ㅠ
그래서 이거저거 빼고 간추린 게 이거예요. 그나마 파스가 살려주는군요.^^
담에는, 담에는...헉헉....

조카가 12개월 쫌 넘었을땐가?
요 녀석이 고 조막만한 손으로 강남콩을 날름날름 주워먹는 거예요.
맛나게 먹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주 선심을 쓰면서 제가 싫어하는 강남콩을...제 입에 덥썩~!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두 번씩이나 덥썩~!
바로 전에 수박 달라고 할 때는 안 주더니..ㅋㅋㅋ
할 수 없이 아주 맛있는 척!하면서 먹었죠, 뭐...^^

달사르 2013-05-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보미와 황정은은 자꾸 눈이 가는 작가에요.
읽고 나서 돌아서서 또 읽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고픈 그런 느낌까지는 아니고, 가끔씩 여러번 반복하고픈..그러니까 텀을 둬서 읽고픈 그런..

책이 쌓인 벤치. ㅋㅋㅋ. 벤치를 아주 높다랗게 만들 자신은 있는데 벤치를 낯출 자신은 없네요. 하하하.

탄하 2013-05-11 00:11   좋아요 0 | URL
손보미, 황정은 작품까지 다 읽었어요.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역시...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네요.
달사르님도 이미 찜해놓고 좋아하셨구나...^^
저는 손보미는 처음인데,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요.

사실, 저 벤지 반대편에도 저 만큼 쌓여있습니다.
모릅지기 긴 것은 양쪽에서 지긋이 눌러줘야 균형이 맞는지라...
정말 낮출 자신이 없어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