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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강 - 2012 볼로냐 라가치 상 수상작 ㅣ Dear 그림책
마저리 키넌 롤링스 지음, 김영욱 옮김, 레오 딜런.다이앤 딜런 그림 / 사계절 / 2013년 2월
평점 :
시골에서 흙 밟고 물 스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무언지 모를 특별함이 있다. 물론 아이들이야 다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겠지만 시골아이들에게는 유독 더 투명한 천진함과 소박함, 자유로움이 한껏 묻어난다. 이것은 분명 산과 들에서 놀고 배우며, 땅을 일구고 거기서 난 것들을 먹고 자라는 생활 덕분일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품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을 닮아 넉넉하고 바라보는 사람마저도 평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비밀의 강>의 당찬 소녀 칼포니아도 예외는 아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외딴 집에서 엄마와 아빠,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강아지 버기 호스와 함께 사는 칼포니아의 하루는 시작부터 활기차고 여유롭다. 이 꼬마 아가씨가 무슨 좋은 일을 예감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정하게 리본을 동여매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른 아침의 평온, 그 자체가 느껴진다.
아침식탁에서 맞은 소식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불경기가 무엇인지,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칼포니아는 잘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엄마, 아빠가 매우 걱정하신다는 것과 생선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설사 불경기와 가난의 뜻을 알려준다 할지라도 소녀의 잔잔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단어들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만족할 줄 알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기특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칼포니아가 불경기와 가난에도 굴하지 않을 소녀라는 것은 그녀의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무너무 좋은 날.(이하략, p.8)
생선이 있다면 참말로 좋겠어.
그럼 어려운 시절도 끝날텐데.
하지만 난 티끌만큼도 걱정은 안 해.
모두와 북적북적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니까.(P.11)
칼포니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좋은 날이라고 했다. 이것은 비록 나쁜 일이라도 좋은 날을 망칠 수 없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대해서도 '티끌만큼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리지만 대단히 낙천적이며 당찬 모습이다. 이렇게 흔들림 없이 밝은 마음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을 감동시키기에도 충분하다. 아니, 자연이 다 뭔가! 우주, 운명, 이런 거대한 힘들마저 감동시킬 만큼 충분하다. 칼포니아는 당차고 시도 잘 지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도 뛰어나다.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지렁이가 유리병에 갇혀있는 것이 싫을 거라고 생각해 다른 미끼를 찾아본다. 물고기는 무엇을 좋아할까? 그녀가 열심히 고민한 끝에 떠 오른 것은 아름다운 장미. 칼포니아는 분홍 종이를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곱고 정성스런 미끼를 만든다. 칼포니아가 '내가 물고기라면'하고 물고기의 마음을 상상하는 장면은 자연을 공감하고 배려하려는 소녀의 선한 마음과 더불어 신비롭고 따스하게 펼쳐진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어른인 나로서는 '풋'하는 웃음과 함께 '과연 물고기가 장미를 좋아할까?'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자연에 대한 배려와 상상이 어우러진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한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비밀의 강>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가 자연과 교감하며 그것을 통해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가는 신비스런 경험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칼포니아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나무들의 변화가 상당히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또한 이야기의 신비스러움을 한껏 더해준다. 칼포니아가 물고기를 잡는 문제로 고민할 때는 나뭇가지와 나뭇잎도 물고기 형상으로 나타난다. 마치 나무도 함께 물고기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삼나무 밑동에 걸터앉으며 '네 무릎에' 앉아도 되겠냐고 하면 나무는 등 뒤에 앉아있는 사람의 자세가 되어 얼굴을 드러낸다. 어두운 밤길에 대한 두려움은 나무에게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나뭇잎마저 무시무시한 누군가의 눈길 같아 더 으스스하다. 소녀의 마음이 표현되는 나무, 그리고 꿀벌, 꽃, 물고기와 겹쳐지는 소녀의 얼굴. 이 모든 것들이 칼포니아가 가진 자연과의 공감력을 아름답게 잘 드러낸다.
칼포니아는 당차고 낙천적인 아이지만 당면한 것은 오직 어린 소녀에겐 버거운 현실뿐이다. 하지만 구하는 자에게 길은 열리는 법. 마을의 지혜로운 아주머니로부터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곳, 바로 비밀의 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포니아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비밀의 강의 '위치'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지만 그 어딘가를 알 수 없는 비밀의 강. 아주머니가 매우 애매한 힌트를 주긴 했지만 혼자서 강을 찾아낸 것은 칼포니아이다. 이리저리 이끌려 부지불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비밀의 강을 생각하면 자연은 그를 찾는 이에겐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너무 많이 갈취하는 것이 문제지, 자연이 우리에게 등돌려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비밀의 강에 도착할 수 있었던 비밀은 어쩌면 칼포니아가 가진 간절한 사랑, 그 하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사랑으로 구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반겨 맞아주니까. 비밀의 강은 칼포니아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물고기를 가득 품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물고기가 크고 많던지 오히려 낚시를 하는 칼포니아의 배가 아주 작게 보인다. 세상에 가득한 자연의 생명력이 물고기의 힘찬 꿈틀거림을 통해 한껏 펼쳐지는 것 같다. 그리고 고맙게도 물고기들은 칼포니아의 종이 장미를 마다하지 않고 덥썩 물어준다. 어린 소녀나 좋아할 분홍 종이장미를 물고기가 덥썩 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만선으로 환호를 지르는 칼포니아. 풍요로움이 넘치고 또 넘친다.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는 비밀의 강으로 향하는 길과 비밀에 강에서 돌아오는 길의 대조이다. 가는 길은 자연이 이끌어주는 듯 어찌보면 너무 쉽고 홀린 듯이 금방 이르렀지만 돌아오는 길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라고 하는 듯 어린 칼포니아 홀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사뭇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칼포니아의 긍정적이고 순수한 마음씨는 무서운 동물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길을 열어간다. 그녀 특유의 최고의 배려가 숲속의 험악한 동물들에게도 통했던 것이다. 기분좋게 일어났던 아침을 위해 가장 좋아하는 리본을 정성스레 매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고기가 제일 좋아할만한 아름다운 것(분홍 종이 장미)을 골랐던 것처럼, 그리고 나무와 배와 물고기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했던 것처럼, 칼포니아는 자신을 겁주는 무서운 동물들에게도 최상의 것을 최고의 정성으로 기꺼이 나눠줬다. 그녀가 무서운 동물들에게 물고기를 나누줄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깨끗한 풀밭'에 내려놓았다는 표현은 꺼려하는 상대라도 마음을 열어 대하고자 하는 작은 소녀의 넉넉한 마음씨가 담겨있다. 소녀가 잡은 수많은 물고기는 먼저 배고픈 숲속의 동물들에게, 그 다음으로는 도움의 손길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그리고 결국엔 아빠의 생선가게로 가서 힘없고 배고파 일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한테로까지 이어진다. 비밀의 강의 풍요가 작은 소녀로부터 마을 전체에 전해진 것이다. 결국 한 소녀의 간절한 사랑이 자연을 감동시키고 어려운 시절까지 이겨내게 해 주었다.
비밀의 강은 지금도 도처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곳을 알고자 하지 않을 뿐이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채운 마음은 비밀의 강을 볼 수 없다. 지혜로운 아주머니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비밀의 강은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디 비밀의 강 뿐일까? 비밀의 산도, 비밀의 선물도, 비밀의 약도 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 이렇게 보이지 않게 감추어진 것, 그래서 비밀이다. 또한 비밀의 강은 순수한 마음이 간절한 필요와 맞닿았을 때 열린다. 어려운 시절을 넘기자 더 이상 비밀의 강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은 대자연과 세상이 우리들에게 작용하는 원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필요할 땐 기적처럼 나타나는 자연과 세상의 이치. 이것 역시 비밀이 가진 또 다른 의미이다. <비밀의 강>은 사랑의 마음이 해낼 수 있는 위대한 일과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요즘처럼 내 손안의 작은 화면에만 몰두하는 아이들이라고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눈을 들어 옆 사람을 바라보고, 저 앞의 나무를 바라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면 비밀의 강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가 뭐라해도 자연에서 태어난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우리가 순수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으로 눈 돌릴 때 자연은 언제든지 두 팔을 벌려 반가이 맞아준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가만히 느껴보자. 칼포니아가 이렇게 응원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네 마음에도 강물이 흐를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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