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만났었던 것만같은 스님이나 도사들(혹은 산신령까지 포함될지도)의 깊이나 신비함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왔던 거 같다. 그중 주요한 요소는 불교와 도교의 요소일텐데, 단순히 스님이니까 불교에서, 도사니까 도교에서 왔다 라는 식은 아닌 거 같고,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짚어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운 주제다.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 사이의 대립은 불교와 유교 사이의 대립만큼 격렬했던 거 같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한 도교와 유교의 항전은, 중국역사에 조금씩은 소개되어 왔던 내용이다. 그런 대체적인 전개말고 신비롭고 깊이있는 내용은 여간해서 만나기 어려웠다. 단지 불교 초기 수용단계에서 도교의 어휘를 활용한 격의불교 라는 범주는 들어봤지만, 이는 과도기적인 불교 수용이나 번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특히, 도교사상의 깊이를 잘 들여다보고 잘 펼쳐준 책은 보기 어려웠던 거 같다. 

성현영의 <노자의소>라는 책이 이런 측면의 깊이를 흡족하게 소개하고 보여주었다.
















책 앞에 붙은, 번역자인 최진석님의 '중현학'에 관한 소개논문이 격의불교, 위진현학, 노장사상 등 각기 떨어져 있어 보이는 것들을 잘 붙여서 잘 얘기해준다.

그리고 옛날 도사님들을 떠 올리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문학과 회화에 관한 깊이 있는 얘기인거 같다. 불멸을 사는 신과같은 영원함을 추구한 서양전통과는 전혀 다른 토대에서 생성된 문학과 회화얘기들이 결합되어 또다른 신비함을 주었던 거 같다. 그러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회화얘기들을 잘 구분해, 역사적으로 잘 정리해, 잘 설명해주는 책은 흔치 않았는데, 갈로의 <중국회화이론사> 가 시원시원하게 얘기를 잘 해주는 거 같다.
















또다른 요소는, 우리나라 도교에서 온거 같다. 어렸을 때 봤던 전설의 고향에서도 등장한 수많은 도교 술법들도 그렇고, 조선시대 유교 영향이 진해지는 조선 중기 전까지는 나라에서 도교식 제사도 많이 지냈던 거 같고, 우리나라에서 자생했던 도교가 적지않은 부분인거 같다. 도교의 손에 잡히는 디테일을 자세히 알기는 쉽지 않지만, 열정적인 연구로 고려를 중심으로 도교를 포함한 신앙의 흔적을 잘 추적해 정리해 놓은 책도 찾았다. 김철웅의 <한국중세의 길례와 잡사>다. 증거를 잘 정리해 제시하여 꾸준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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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지식인이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상황과 배경하에서 하는 얘길까? 지식자체나 그 본질보다는 지식을 다루는 사람과 상황을 재밌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18세기 지식과 지식인을 궁금해하는 20세기 일본인들과 한국인들도 함께 나온다.

18세기에 통용되는 지식들의 거래와 가치부여, 그리고 후대에 재구성되는 양상, 중국, 조선, 일본에 어떻게 지식들이 생성되고 모이고 흩어지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그리고 이들과 교류를 가진 중국 지식인들 면면이 하바드 엔칭도서관을 중심으로 계속 밝혀진다. 그래서 단면적, 단편적으로 알았던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을 풍부하게 알 수 있다. 국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사 관점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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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전집 6권에서 성격유형을 설명할 때, 같은 분야에서 외향성과 내향성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함께 다루어, 성격유형에서 에너지의 방향이 다를 때, 그 분야의 내용물이 얼마만큼이나 달라지는 지를 감탄스럽게 보여준다. 한 예가 그리스철학에서 이데아를 주장한 플라톤이 내향성의 대표고, 그 이데아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외향성의 대표다. 
















이 성격유형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데, 융과 프로이트의 결별도 그런 측면이 있다. 융은 프로이트가 외향성, 아들러가 내향성이라고 분석해 놓았다. 

카렌 호나이의 글은 일단, 외향성임이 분명한데, <내가 나를 치유한다>에서는 흥미롭게도, 외향인 사람이 내향성 자체를 분석한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분석하니, 반짝반짝 흥미로운 주장들과 새로운 이해들이 적지 않지만, 외향성이 보기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흥미로운 사건들을 모아놓아, 그 선별 자체로 자연스러워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서 신선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술방식이 한번씩 거슬리고 호나이가 짚어준 측면이 호나이가 기술하는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다양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놓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엉성하지는 않은데, 엉성하달까. 책이 공감을 주거나 감동스럽지는 않은데 눈과 손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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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 글쓰기는, 특히 현대이전 시간대에서는, 정말 문헌중심의 글쓰기다. 모든 문헌을 섭렵해 쓰는 글쓰기는 특유의 힘이 있기는 하지만, 또 특유의 답답함이 있다. 유식하지만, 답답하달까. 인류학자의 열려있는 글쓰기 같은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자신들의 선조들의 얘기고, 남겨놓은 문헌들이 많이 있으니까, 웬만큼 알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거 같다. 100년 전만 가도 벌써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라고 보는게 맞는거 같다. 















웨난의 글인데, 처음 들어보는 인상적인 정보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루한 글도 많았다. 그러니까, 왜 손자병법이 그 시기에 통했을까, 오늘날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이런 의문에는 별로 관심을 안 준다. 손자병법 내용 자체는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삼국지처럼, 어떤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권력찬탈의 어떤 측면에 집중한다.

내용을 음미할 때는 줄리앙의 글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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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 흥했던 논증방식에 결의론(casuistry)이 있었다고 한다. 이 논증방식이 흥미로운것이, 초기 기독교나 중세 기독교에서 원칙이나 원리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과 상황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 때 쓰던 방식이라는 점이다.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길을 갔을 때, 흔히 알고 있는 신약성서 속 여러 말씀들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런 것들은 원칙이나 원리에 가깝고, 적용할 원칙들이 두 세개 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성서에 기술되지 않은 상황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든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때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 결의론이었다고 한다.

중세 기독교도 같은데, 우리 상식과 달리, 딱딱하고 굳은 것만 그들의 교리가 아니고, 유연하고 현실반응영역도 상당했다는 점이 놀라왔다. 게다가 꽤 흥했고, 근대과학이 흥했던 시기와 맞물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하는 논증글쓰기와도 좀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논증글쓰기가 과학이나 수학의 기하학적 방식을 많이 닮은 반면에, 결의론은 그렇지 않고, 한 원리를 연역하기 보다는, 여러 대안들을 비교하는 식으로 하는 거 같다.

















그리고 오늘은 장국영의 사망 17주기다. 멋진 중국사람이 주는 울림은, 다른 나라 멋진 사람들과 좀 다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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