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전집 6권에서 성격유형을 설명할 때, 같은 분야에서 외향성과 내향성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함께 다루어, 성격유형에서 에너지의 방향이 다를 때, 그 분야의 내용물이 얼마만큼이나 달라지는 지를 감탄스럽게 보여준다. 한 예가 그리스철학에서 이데아를 주장한 플라톤이 내향성의 대표고, 그 이데아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외향성의 대표다. 
















이 성격유형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데, 융과 프로이트의 결별도 그런 측면이 있다. 융은 프로이트가 외향성, 아들러가 내향성이라고 분석해 놓았다. 

카렌 호나이의 글은 일단, 외향성임이 분명한데, <내가 나를 치유한다>에서는 흥미롭게도, 외향인 사람이 내향성 자체를 분석한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분석하니, 반짝반짝 흥미로운 주장들과 새로운 이해들이 적지 않지만, 외향성이 보기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의 흥미로운 사건들을 모아놓아, 그 선별 자체로 자연스러워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서 신선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술방식이 한번씩 거슬리고 호나이가 짚어준 측면이 호나이가 기술하는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다양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놓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엉성하지는 않은데, 엉성하달까. 책이 공감을 주거나 감동스럽지는 않은데 눈과 손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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