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본격적으로 불교들어오기 전인 선진시대에 관한 책과, 인도 초기 불교에 대한 책을 보니까, 중국불교에 담긴 중국 지역성이 보이고, 다시 중국불교의 시작으로서 인도 지역성도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다. 


<대승불교> 같은 개론서를 통해 개략을 파악하고, 조금씩 모아둔 불교연구서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연구나 논문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보니까, 그때그때 흥미와 사정상 책들이 인도 중국 불교사 중 랜덤하게 모였다. 개론서에서 강조하고 소개하는 책들 중에 고른 것도 있고 해서 지금 보면 왜 샀는지 생각도 안나는 책도 좀 있다.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로 확장 분화하는 과정도 널리 알려진 진보적인 대중부, 보수적인 상좌부 분화처럼 비교적 그 이유가 명확한 경우도 있지만, 남은 자료가 많지 않고 그 계승이 불명료한 경우는 이름만 남고 세부내용은 모르는 경우도 꽤 있는거 같다. 그 중 하나인 '경량부'에 관한 책이 서재에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경량부 연구>다. '구사론'에 관한 얘기가 정말 자세하고 흥미롭게 잘 정리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상식이 뭉터기 이미지에서 조금씩 분별이 되기 시작하니까,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서 흥하고 흘러흘러 전도되기 시작한 각 불교의 조각들이 다르게 보이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대승 불교 흐름에서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불교의 중심철학>, <유식철학>, <불교논리학1> 도 쉽게 접했던 큰 그림 속 다양한 논의와 얘기들이 반갑고 즐겁다. 하지만, 이들 책도 쓰여진지 벌써 수십년 전이고, 저자들이 원하는 취지와 시대배경은 제각각이다. 과장하면, 중국불교에서 번역승들이 선택해 번역한 경전처럼, 이들도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맞게 번역하고 해석한 것이다. 


무르띠의 <불교의 중심철학>은 중관사상에 관한 것이다.
















체르바스키의 <불교논리학1>은, 막 제대로 된 불교를 서구세계에 알리려는 이의 고군분투를 잘 보여준다. 역자의 어휘선택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독교 배경지식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어휘들이, 과장하면 중국 번역승들의 격의불교 느낌이 조금 들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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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정신을 되찾자 2022-03-1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식사상과 공사상~˝유식˝과 ˝공˝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유식은 중생심(유위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고, ˝공˝사상은 여래심(무위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유위법과 무위법에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삼라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식˝이 있다 또는 ˝식˝이 없다라는 양극단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식˝은 ˝있는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이며, 비상,비비상이라는 뜻의 ˝식˝의 성질은 ˝공˝이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개념의 색즉시공(물질세계인 이승과 영의 세계인 저승)~이승은 물질의 세계이고, 저승은 영의 세계입니다.영의 세계인 저승에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왔다는 겁니다. 자신의 물질적 세계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적인 마음만 남게 됩니다. 영적인 저승세계에 있는 모든것, 즉 지옥이나 극락은 자신의 마음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오게 되면, 물질인 육신을 통하여 그 물질을 만지고 촉감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저승세계의 모든것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 존재하므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살이 아무리 설법을 하고 노력을 해도, 스스로 업의 본질을 깨닫고(견성) 변하지 않으면,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 세계에 길들여진 영혼이, 저승에 가더라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식이 항상 그렇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필름으로 비유하자면, 번뇌가 없는 여래심은 깨끗한 원본 필름인데, 중생심은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필름이므로, 자신의 눈에 항상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모습의 저승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즉, 저승이든, 이승이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그것이 자신의 업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의해 좌우되어, 그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지옥이나, 극락은 오직 마음의 업식에 따라 그 존재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마음의 업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가 바로, 성불이요, 우주의 본심이요, 우주의 법진리인 ˝비로자나˝라는 것입니다. → 사찰의 ˝대적광전(비로전)˝ 참조

즉, 중생심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만(유위법), 부처님의 마음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무위법). 그러므로 진리를 다른곳에서 찾지 말고(원리전도몽상), 허상이든, 실상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인연연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가 바로, (자신의 ˝업˝으로 보이는)참진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생심(유위법)에는 극락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래심(무위법)에는 극락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핵심입니다.

*물리적 개념의 색즉시공~물질적인 측면에서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현대물리학의 거장인 하이델베르그에 의하면, 물질이라 함은 질량과 그 질량이 존재하는 위치가 특정되야 물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원자상태 이하로 쪼개어 분석한다면, 질량이 측정되면 위치를 측정할수 없고, 위치를 측정하면 질량을 측정할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물질의 ˝불확정성의 원리˝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물질도, 사실은 물질도 아니요, 공도 아님을 말합니다. 즉, 물질도 그 본질적인 면에서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영혼은 물질인가? 아닌가? 물질도 아닌것이 존재하므로, 공도 아니다.. 석가의 업과 번뇌를 가지는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석가말씀)

물질=질량+위치= 측정가능.
물질의 원자이하는= 질량+위치모름, 또는 위치+질량모름,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이텔베르크말씀)
석가와 하이텔베르크의 말씀이 동일함. 이것으로 노벨물리학상~]

*미시적 우주론~물질은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 중간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새로운 입자를 쿼크라 불렀는데,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론상 존재하지만 측정하기 어려워 top쿼크는 1995년도에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는 6가지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및중성자를 전자와 연결하는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되고, 전자는 6가지의 렙톤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반야신경원문 뜻해석” 블로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