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운동권에서 학벌 안 따지고, 나이 안 따지는 사람은
노회찬과 그의 동료들밖에 못 봤다.
그 사람들과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평생을 그렇게 친구로 살았다.
노회찬이 경기고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다.
뭔 진보라는 사람들이 대학교를 그렇게 따지는지,
정말 확 질려버렸다.
- 우석훈, 『슬기로운 좌파생활』 중에서
대한민국은 유래 없는 압축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 우리가 소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출생률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0.7명의 아이를 낳는 상황은 당연히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여기에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대두로 무역수지 흑자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고, 에너지 전환 이슈 역시 우리 경제에 무리를 준다. 내부적으로는 부동산 거품과 가계 부채, 그리고 내수 경기도 좀처럼 크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사적인 저출생과 더불어 기록적인 자살률은 우리 시대가 얼마나 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빠른 산업화를 위해 분배나 복지는 뒤로 미뤄졌고, IMF 사태 이후로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하게 드라이브 걸면서 각자도생이, 정확히는 개인적인 무제한적 탐욕의 경쟁이 열렸다.
저자가 내놓는 해결책의 시작은 정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할 때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창일 때를 배경으로 쓰인 이 책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대해 그리 희망을 걸지 않는다. 여야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이른바 진보정당의 정통계보를 잇던 진보당은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책이 쓰일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결국 친위 쿠데타로 자멸한 윤석열 정권은 말 그대로 최악의 이익 집단이었다. 아는 것이 없이 대통령까지 된 그가 할 수 있는 건, 수족인 검사들을 온 정부 기관에 보내서 감시하고 배후조종하는 방식뿐이었다. 앞서 말한 국가적 위기 상황 앞에서, 제대로 된 대책을 내 놓은 것은 없었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었다.(그 와중에 알뜰살뜰 뇌물을 받아 챙기는 영부인까지..)
저자는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책이 쓰인 지 몇 년이 지난 오늘, 과연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정치가 복원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대통령이 하는 일을 막고 발목 잡는 게 지상목표인 야당(혐오가 높아질수록 지지자들도 결집한다는 학습효과가 강하게 있다)은 이제 대놓고 음모론과 선동으로 정국을 대하고 있다. 박수는 양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아마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상대가 몰락한다면 기꺼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은 썩은 정치인들이 여기에 참여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럼 결국 우리 앞에 남은 길은 소멸일까? 적어도 정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럴 것 같다. 이제 우리 사회는 혐오와 저주의 문화가 초등학생 레벨에까지 깊이 퍼져가고 있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수준을 넘어, 온갖 포털(예컨대 네이버 댓글창은 이미 일베에 거의 점령된 상태다.) 사이트에서도, 심지어 고등학교 야구 경기 중 일베 구호를 외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물론 언제나 시끄러운 쪽이 좀 더 크게 대표되는 면이 있긴 하다. 이 점에서 소망을 찾아야 할까.
압축 성장에 뒤따르는 압축 소멸 문제를 다룬 사회학 서적인 듯했으나, 책 중반 이후 주로 정치 상황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이 다뤄진다. 다만 이런 종류의 책들이 언제나 당위는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래서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을 지에 관한 방법론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역시 현실이라는 무거운 족쇄 때문이긴 하겠지만.
저자는 현대 교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난 세기 그리스도인의 표준적인(?) 모습은 서양 백인 남성이었지만, 이제 그 비율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의 수(물론 이 가운데는 다양한 유색인종들도 포함되지만)를 합쳐도, 나머지 대륙의 그리스도인들의 수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20세기 말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그리고 책에는 빠졌지만 아시아의) 여성이다.
이런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의 구성원 비율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그 내용의 변화도 수반하게 된다. 기독교적 개념이 새로운 문화 속으로 번역되어 들어갈 때,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생활은 북미나 유럽의 그들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저자는 이른바 복음주의 유형의 기독교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이유를, “지금 여기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지도자를 따르겠다는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책의 중반부는 세계 기독교에 미국교회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다룬다. 이 역시 익숙한 설명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교회의 모델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리더십을 장악하고, 일종의 영적 제국주의를 형성했다는 비판적 견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조금은 다른 그림을 그려준다.
물론 미국의 영향력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가 되어가면서 수많은 적응과 해당 지역의 자치적 리더십들, 새로운 신학적 강조점들이 나타났다. 서구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이런 인식은 큰 그림을 볼 때에 비로소 갖춰지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지역적으로는 여전히 조금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온다. 몸의 어느 지체가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미국 교회들 역시 나머지 지체들을 의존하지 않고서도 혼자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적은 미국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도, 나아가 그 지역 내의 공동체들 안에서도 귀담아 들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마크 놀의 글은 언제나 새로운 통찰이 있다. 여전히 미국 중심의 사고, 서구의 신학 중심의 신앙생활만을 유일한 길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신앙의 전통들(이른바 ‘신학들’)에 공헌과 유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신학은 (그것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학은 계속 발전해야 하는 무엇이고, 단순히 예전 것을 붙잡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보수적 신앙 공동체에서는 이런 생각 자체를 불온하게 여기는 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금과옥조로 붙잡고 있는 신학적 명제들과 예배의 방식들도 역사적 기독교라는 좀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라는 게 난센스다. 결국 우리의 눈이 좀 더 큰 맥락을 보지 못하면 계속해서 그냥 익숙한 것을 최고의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또 다른 책 제목처럼, 우리는 “세계기독교인”으로 살아야 한다. 겸손함으로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우리가 서 있는 곳에 맞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손질을 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성경에 대한 정직한 묵상과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