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다양한 강론들을 한 데 모아놓은 본문이 있다.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이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여기 나온 교훈들을 다른 장소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모습들도 나오는지라, 일부에서는 여기 나온 교훈들이 그 순서가 편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예수님이 한 가지 교훈은 오직 한 번만 가르치셨다고 볼 때야 문제가 되는 거고, 비슷한 교훈을 여러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하셨을 가능성도 적지 않은 만큼 절대적인 견해는 아니다.
굳이 이런 논의들까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산상수훈이 밀도가 높은 본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팔복으로 시작되어서 ‘열매로 알리라’로 끝나는 이 본문은 복음서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그 산상수훈의 본문에서 열세 개의 키워드를 뽑아 본문 설명과 적용으로 풀어낸다.
오래 전 신대원에 다니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신약학 교수님에게 배웠던 내용들이 새삼 떠오르는 부분들이 보인다. 팔복에서 복을 받을 사람들로 언급되는 이들은, 그것을 듣고 읽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라든지, 빛과 소금 역시 그들이 되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 자체가 이미 빛과 소금이라는 것이라는 설명 등이 그것.
전반적으로 견실한 설명과 적용이 담겨 있다. 딱 교회에서 가르치기 좋게 쓰였달까. 안전한 내용들을 안전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오랜 시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 저자라는 게 느껴지는 부분.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 그렇게 말랑말랑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살짝 들긴 하지만, 책이라는 게 집필 목적과 예상 독자에 따라 내용이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니까.
원서의 제목이 “The God-Shaped Heart”다. 하나님이 만드신 마음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 같은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우리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이상적인 상태에 관한 내용일 것이라는 짐작이 되게 만드는 제목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정작 마음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기독교는, 기독교인은 이래야 한다는 내용이 더 많이 보인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 기독교인임에도 다양한 범죄와 문제 행동에 있어서 비기독교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도덕적 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는 것.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가 하나 있다.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방식을 7단계로 나눈 것인데, 상벌에 따라 행동하는 1단계, 주고받음에 기초한 2단계,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는 3단계, 법에 따라 행동하는 4단계까지는 ‘저차원적인 방식’으로 분류된다. 5단계는 사랑에 기초한 결정이고, 6단계는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 그리고 7단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쪽이 좀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가 저차원적 방식으로만 판단하는 것 같다고 강하게 의심을 하고 있다. 사랑보다는 규칙을,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더 본다는 것. 그런데 저자가 여기에서 초반에 가지고 나오는 주제는 ‘대속’이다. 저자는 이 신학적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을 상당히 불편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무시무시한 응징자, 난폭한 폭군으로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저자가 대신 가지고 나오는 건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성경의 율법을 비롯한 다양한 명령들에도 해석의 기준으로 사용된다. 문제는 그냥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성경의 ‘강한 메시지들’이다. 그리고 속죄에서 징계의 개념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과격한’ 방식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름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고 있지 않기도 하고.
또,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저차원적 기준을 가진 이들과 고차원적 기준을 가진 이들로 지나치게 선명하게 나누는 모습은, 자칫 영적 엘리트주의로 빠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바꾸려는 느낌도 받는다.
저자는 극구 “죄”라는 문제를 “질병”이나 “장애” 정도로 치환하려고 하는 듯하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그런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죄를 그렇게 보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이해일까? 저자가 애써 인용하지 않고 무시하는 상당한 분량에서 죄는 죽음, 사망, 심지어 사형선고와도 연결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대체로 저차원적 기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건 좋은 응답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는지. 이른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왜 그렇게 사람이 바뀌지 않는지 말이다. 다만 그 답이, 너희는 저차원적 이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에서 끝난다면, 뭔가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기엔 조금 아쉽다.
이런 조금은 강한 어조를 배제하고 본다면, 책은 오늘날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실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7단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계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꽤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한국의 운동권에서 학벌 안 따지고, 나이 안 따지는 사람은
노회찬과 그의 동료들밖에 못 봤다.
그 사람들과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평생을 그렇게 친구로 살았다.
노회찬이 경기고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다.
뭔 진보라는 사람들이 대학교를 그렇게 따지는지,
정말 확 질려버렸다.
- 우석훈, 『슬기로운 좌파생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