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인 책.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설교집이 아닐까 했는데, 웬걸 정통 신학 책이다. 책의 핵심은 유일신 사상에 충실했던 유대인들 가운데(첫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다) 어떻게 예수를 신적 지위로 받아들이고 예배하는 일이 발생했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꽤나 중요하면서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은 유명하다. 물론 시대에 따라 현실이나 주변 문화와의 타협을 끊임없이 추진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주류는 아니었다. 예컨대 셀레우코스 왕조의 그리스식 종교 쳬계 강요에 반대해서 일어난 반란(마카비 전쟁)은 결국 하스모니아스 왕조를 수립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 유대인들(첫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오랫동안 나이브한 세속적 관점이 유행했었다. 이런 관행은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없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교회가 세력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처음엔 그저 예수님을 좋은 종교 지도자 정도로 여겼지만, 점차 그분을 신성을 지닌 존재로 미화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는 유대교 전통보다는 이교적 전통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상상도 더해진다(유일신 사상의 약화, 왜곡).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적 속성을 지닌 인간들이 자주 보이고,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주장이다. 한눈에 봐도, 합리성을 중요시한 자유주의적 전제에,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제한적 해석의 결과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이전의 주장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반박한다. 먼저 구약과 유대 문헌에 다양한 종류의, 특별한 경배와 높임을 받는 인물들(족장들)과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 많았음을 제시하면서 이른바 ‘고기독론’(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설명)의 근원을 이교전통이 아닌 유대교 전통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차이점도 있는데 유대교 전통에서는 어떤 인물도(심지어 천사도) 하나님의 위엄과 지위와 능력을 대리하는 존재로 여겨질지언정, 하나님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유대 전통에서 높여졌던 여러 인물들과 달리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존재였다. 어떤 전통에도 그런 “패배자”를 높인 적은 없었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승임’(책에서 그리스도를 신적 존재로 높이는 것을 이르는 말)은 기독교인들의 급진적인 주장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고기독론이 후기에나 나왔을 것이라는 안이한 견해 역시 저자는 반박한다. 이미 신약성경으로 불리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실려 있고, 이른 시기의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와 기도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오히려 예수를 훌륭한 윤리 교사 정도로 여기려는 태도는 18세기 이후에나 나타난 새로운 변종일 뿐이다.
주제가 분명하고, 성경 외 다양한 문헌들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읽을 만한 정보들이 많다. 책의 신학적 해석과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 타당성만큼은 충분히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비전공자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역사나 문헌 쪽에 관심이 있다면 손에 들어 볼 만하다.
아쉬운 점은 번역 부분인데, 영어 문장의 직역체 번역이(그래서 우리말이 아닌 것 같은) 꽤 자주 보여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몇 번을 살펴야 했던 적이 많다. 외국에서 나온 책을 읽을 때는 이 번역 문제가 요새 꽤 눈에 들어온다. 기술도 발전하는 데 이 부분도 빠르게 나아질 수 있으려나.
건축사로 일해 온 저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곳이 좀 더 친절한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쓴 책이다. 단지 법적인 기준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얕은 문턱 하나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는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고, 법적 기준을 맞춘 반지하방에서 사람들은 곰팡이와 싸우며 건강을 희생해야 한다.
얼마 전 한 유명한 장애인 유튜버가 KTX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이를 도와주던 공익근무요원과 부딪힌 후, 이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가 역풍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해당 사건에서 그 유튜버는 자신의 분을 못 이겨 과한 대응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 그러니까 아주 작은 턱(심지어 그냥 사람의 발이라도)도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조차 “그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고통이라는 건 나누어지지 않는다. 심정적인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히 우리의 것으로 경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에 앞서서 우리의 고통을 정확하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 뭘 잘못 먹고 식도 쪽에 통증이 생겨서 약국에 간 경험이 있는데, 내가 느끼고 있는 그 통증을 설명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쓰라림도 아니고, 찌르는 것도 아니고, 쎄한 느낌이라는 설명은, 내가 들어도 두루뭉술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이라는 게 그런 식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나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될 수 없다.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멀어진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좁은 고시원에 몸을 구겨 넣고 살 수밖에 없는 청년들, 반지하의 열악한 상황을 견디는 이들, “시설” 속 장애인들, 힘든 노동 사이의 짧은 휴식을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야 하는 청소 노동자들,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등등. 누군가 애써 알려주지 않으면 일상 가운데서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책에 담긴 글들은 모두 어떤 공간과 건축물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자신이 하는 일을 (단지 밥벌이로만이 아니라) 좀 더 진지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바로 그 공간과 건축물, 좀 더 쉬운 말로 부동산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해결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씁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전 국민이 부동산 투기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에서, 과연 효율을 포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2025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가구의 자산의 3/4가 부동산에 묶여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전 국민적 공포일 것이다. 어떻게든 거품을 일으켜서 자산을 증식하려고 눈이 벌게져 있는 사람들에게, 장애인 그룹홈이 (대출을 잔뜩 받아 산) 자기 집 근처에 들어오는 일 조차 피켓을 들고 반대하러 나서기에 충분한 일이다.
사실 가장 약한 사람이 살기에 편한 곳은, 모든 사람에게 편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추가적인 비용이 들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겪는 불편함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에서 사는 것만큼 안심되는 일이 또 있을까. 각자도생만큼 비효율적인 삶의 방식도 없다. 우리는 당장 손에 쥔 것을 놓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까요? 신학 공부의 즐거움과 사역의 성취가 곧 영적인 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루이스 한 문장’에서는 쉘던 베너컨의 『잔인한 자비』에 실린 C. S. 루이스의 편지를 읽습니다. 신학과 목회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루이스가 건넨 조언을 통해, 직업적 야망과 신앙의 성장을 혼동할 위험, 거룩한 일에 익숙해지는 함정, 일상과 목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소명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