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행운
유진 피터슨 지음, 권혁일 옮김 / 너머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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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T인 나는, 단언컨대 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한다던 시편이 그렇게 읽기가 힘들었었다. 대신 남들이 그렇게 어렵고 지루하다는 역사 쪽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더불어 다분히 시적이고 상징적인 예언서의 많은 부분은 어려웠고) 학창시절에도 논설문으로는 상을 받기도 했던 것 같은데, 시 대회 쪽에서는 영 입선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있는 게 확실하다. 처음에는 그냥 속에 바라만 가득한 풍선처럼 느껴졌던 (그래서 정이 잘 안 갔던) 시도, 이제는 아 단어들에 압축되어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살짝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서정시 쪽은 쉽지 않지만) 시인이 그 안에 담고자 했던 내용과 의미가 아주 작게 접혀 있던 종이가 풀려나오는 것처럼 펼쳐지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유진 피터슨의 시는 그런 시다.


이 책은 유진 피터슨이 결혼 55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헌정한 시집이다. 아내에게 시집을 선물할 수 있는 남편은 어떤 남자일까. 낭만적이다. 하지만 여기 실린 시 자체가 아내를 향해 쓴 것들만은 아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인 “거룩한 행운”은 무려 7년에 걸쳐 썼다는, 팔복의 한 절 한 절을 바탕으로 쓴 여덟 편의 시들이다. 나머지 시들 역시 일상과 성경을 연결시키는 특별한 통찰이 담긴, 종교시들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하나님의 시다. 오리너구리의 흥미로운 생김새와 식생을 보면 그분의 위트가 느껴지고, 엄청난 폭포에서는 그분의 장엄한 외침이, 날마다 뜨고 지는 해를 보면서는 그분의 성실하심을 볼 수 있다. (이미 시편의 시인들은 이런 면들을 잘 포착해 낸 바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따분하게 만드시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그런 “생기발랄함”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통찰을 하루아침에 갖는 건 무리다. 다만 우리보다 멀리, 더 깊게 보는 시인들의 말에 자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유진 피터슨은 여기에 아주 좋은 시인이기도 하다. 올 겨울 좋은 시집을 한 권 끼고 따뜻한 방 안을 뒹굴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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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감각 - 공부에 엣지를 더하다
허병민 지음 / 마인더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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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원한다면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기를 멈춘다는 건 성장하기를 그만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이들 알고 있듯, 이 공부라는 것을 하는 유일한 방식 같은 건 없다. 각 급 학교에 등록해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하는 방식이 대표적이지만, 공부라는 게 꼭 그런 식의 공식적/제도적 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삶 전체에 걸쳐서 해야 하는 공부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깊은 사고를 하고, 충분한 토론과 의견 교환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앎을 발전시키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거니까.


공부의 유일한 방식은 없어도, 공부를 좀 더 잘 할 수 있는 요령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 책이 파고드는 주제가 바로 이 부분이다. 다양한 분야의 (경영학 관련이 많다) 교수들, 연구자, 기업의 대표 등등 유수의 저자들이 자신만의 공부 비법, 요령을 풀어 놓는다.





가끔은 일을 떠나 쉬는 것이 창의력이 필요한 일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거나, ‘점프 스타트 가설’에 입각해, 당장에 해야 할 일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업무 스위치를 올려줄 수 있는 특정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게으름을 미루고 시작할 수 있다는 내용들은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 요령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미소를 짓게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부법이라든가(책을 읽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좀 더 찾아보면서 주변의 다른 지식들까지 탐구하는 방식) 책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골라내 따로 적어두고 반복해서 재사용한다든지, 해야 할 과업을 잘게 쪼개서 한 단위씩 클리어 해 가는 방식이라든지, 내가 평소에 사용하던 웬만한 방식들은 다 여기에 나와 있다.


평생 공부하고,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유용한 조언들을 잔뜩 만날 수 있을 책이다. 아예 공부와 담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사람은 이런 책을 보지도 않을 것 같고) 어느 정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는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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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처치 - 권력에 저항하고 치유를 촉진하는 선한 문화 만들기
스캇 맥나이트 외 지음, 김광남 옮김 / 야다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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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짧은 전반부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설립자였던 빌 하이벨스의 성범죄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교회가(그리고 아마도 빌 하이벨스가) 시도했던 다양한 공작들을 고발하고 있고, 좀 더 긴 후반부는 좋은(히브리어로 “토브”) 교회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한 때 유명했던,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목회자들이 성범죄로 무너지는 모습은 더 이상 드물지 않게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기도 한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청년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했던 서울의 한 대형교회의 J목사가 많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 드러나 결국 사임을 했던 사건이 있었다.(물론 이런 일은 비단 그곳 한 곳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일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단골로 써먹는 변명이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특정한 일부 교회의 일탈이라고 문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벌어지고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을 보면, 이 문제가 단순히 한 교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J목사는 사임을 하면서 수 억 원의 전별금을 받아 챙겼고, 이후 홍대 쪽에 새 교회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그를 목사 면직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노회의 성범죄 동조자들(이들도 다 늙은 목사다)에 의해 무시되었고, 그 무시의 이유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부흥은 인정해야 한다”는 헛소리였다.


비단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비슷한 문제는 가톨릭에서도, 불교에서도 일어난다. 그럼 종교만의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다. 크고 작은 기업에서도, 정부 부처에서도, 각급 학교에서도, 아니 그냥 가정에서도 늘상 일어난다. 또,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생한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러니 교회만 뭐라 하지 말라는 반응은 최악이다. 그건 교회를 다른 여느 세상의 기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조직으로 축소하고 나아가 왜곡하는 행위다. 교회는 달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 신조들은 다 헛것이 되고 말 테니까. 문제를 개개의 인간에게만 국한 시키려 해서도 안 된다. 이런 일이 이렇게 자주 발생한다는 건, 그게 개인의 문제를 너머(물론 개인의 책임은 무겁게 져야 한다) 교회라는 조직의 문화에 근본적인 비틀림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개인의 생각을 바꾸는 일도 물론 간단하지만은 않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오랜 훈련이 필요한 작업인지에 대해 충분한 기록을 남겨둔 바가 있다. 어쩌면 그건 평생이 필요한 훈련이다. 개인도 그런데 하물며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생각, 즉 문화를 바꾸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들까.


이 책의 저자들은 7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이 원칙을 교회에 이식하기 위해 어떤 작업과 훈련이 필요한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각각의 원칙에는 피해야 할 태도와 길러야 덕목이 쌍으로 제시된다. 개인적으로는 자아도취의 문화와 충성의 문화, 셀럽 문화에 저항해야 한다는 도전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이런 훈련은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함께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당연히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문화를 바꾸는 훈련은 쉽지 않다. 최근 한 유명한 기업의 직장 내 문화를 담당하는 책임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백 명으로 직원이 늘어난 상황에서는 조직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문화는 좀 더 일찍, 소규모일 때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 물론 이 또한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뀔 수 밖에 없다.


저자들이 책에서 제시된 새로운 문화들도 이런 면에서 비춰보면, 초대형 단위의 교회에서 과연 실현이 가능할까 싶은 것들이 몇몇 보인다. 어떤 덕목은 규모로부터도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주님이 열두 명의 제자들과만 함께 다니셨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할지, 아니면 우리의 길을 가기로 할지. 저자들이 너무 이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쪽이라면 우리 주님이 월등히 앞서 나가셨던 분이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분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희망이 없다, 될 리가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 것들을 가르치셨고, 나아가 그렇게 사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쉬운 길일 리가 없다. 그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우리가 너무 편하고 즐겁기만 하다면, (몰론 그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삶 어딘가 타협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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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이단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한 것은

이단이 교회의 권위나 구조에 제기하는 도전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미래에 주는 의미 때문이었다.

정통파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단을 언급할 때

종종 거창하고 과장된 언어를 사용했다.

이런 거슬리는 어조와 공격적인 어휘는

사실 기독교가 그처럼 빈약하고 메마른 유형의 기독교에 의해

오염되거나 훼손당하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염려하는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단은 후기 고전시대의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세계 안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고 무기력하고 진정성이 없는 기독교의 한 부류였다.


앨리스터 맥그래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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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은 100년이 넘게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연설입니다.
■ 이 책은 그 내용을 현대적 관점에서 읽으며 재평가하며 확장적 읽기를 시도하는 책입니다.
■ 칼빈주의 강연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책 역시 마음에 드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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