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대가 되기 위해서 10대를 살았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10대를 20대가 되기 위한 번데기처럼 만들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대부분의 한국인은 대학생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구조에 편입된다.

이런 구조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환갑 잔치를 바라보고 사는 50대가 있을까?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10대에게는

20대 대학생으로 살기 위한 시간을 강요하는가?


- 우석훈,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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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02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극 공감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노랫말(가수 민해경)이 떠오르네요.

노란가방 2023-10-02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요
 
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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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는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서 시작되어 3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된 중국의 마지막 왕조다. 역대 중국 왕조 중 원나라를 포함하는 몽골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넓었고, 현대 중국 영토의 기초가 되기도 했던 나라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두 차례의 호란과 관련해 우리나라와도 연결이 되긴 하지만, 딱히 그 왕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옹정제’가 누구인지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른 중국 황제들과 달리 흔히 부르는 이름이 OO제로 끝나는 세 글자라는 점에서 청나라 황제구나 했을 정도. 이 책은 청나라의 다섯 번째 황제인 옹정제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은 정사 기록에 충실하다. 흥미로운 건 이런 책이라면 왠지 중국의 학자가 썼을 것 같은데, 의외로 일본 학자가 쓴 책이라는 점이다. 사실 일본이 이런 종류의 역사나 인문학 등의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나가고 있는 나라이긴 하니까 뭐 이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어쩌면 공산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중국에서 왕조 시대의 역사에 대한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역사마저 현대 공산당 통치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게 작금의 중국 학계 현실이니까.


학문적인 책이지만 그 내용이 또 아주 딱딱하지는 않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술술 읽혀 나간다. 몇 개의 주제로 장을 구성하고, 곳곳에 저자의 평가와 설명이 더해지는데 이게 그리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행적은 제위 계승 과정이다. 직전 황제인 강희제는 무려 서른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위 계승 과정에서 황태자가 두 번이나 폐위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후계다툼이 벌어졌고, 제위를 이어받은 것이 후궁 출신이었던 옹정제였다.


즉위 후 그는 황권에 경쟁자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형제들과 공신들을 집요하게 핍박해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이 부분만 보면 치졸하기 그지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그가 열성적으로 통치하는 중후반 내용을 보면 또 평가가 급히 달라진다. 옹정제는 말 그대로 워커홀릭의 전형이었고, 소수민족 출신의 황제가 대륙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고민했던 성실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의 치세 동안 부정부패가 줄고, 각종 부당한 일들이 개선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정도로 넓은 땅을 다스리기에는 황제 한 사람의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대에는 몇 개의 성들을 묶어 총독들을 임명했고, 그 아래에는 다양한 관료들이 층층이 존재했다. 결국 통치는 관료조직을 통해 하는 건데, 이 조직은 나름의 방식과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에, 황제 같은 절대군주로서도 이들을 완벽하게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제법 깊은 고찰을 더하는데, 이 부분이 또 읽어볼 만하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나라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면들에 변화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결국 나라 운영은 소위 ‘늘공’이라고 불리는 관료들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독재의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중앙집권에 대한 경계가 강해지면서 이런 권한은 더욱 퍼지게 되는데, 그만큼 개혁도 힘들어 지는 면도 있다. 지방의 경우 토호들의 입김이 훨씬 더 강하게 미치곤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라는 게 어렵다.




분명 옹정제는 대단한 개혁을 이루었지만, 그의 통치는 겨우 10년을 넘겼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과로사 한 게 아닌가 싶지만, 저자는 또 여기에 독특한 해석을 더한다. 개혁이란 기본적으로 이전의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개혁이 좋고 의미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마음 깊숙한 곳부터 개혁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은 기세에 눌려 좀 바꾸는 것처럼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영원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그의 개혁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시간이 10여 년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가 죽은 뒤 나라를 이어받은 건륭제는 아버지의 정책 중 상당부분을 이전의 관행으로 되돌린다. 당시 관료사회가 그런 개혁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개혁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동서양의 유능한 영웅들이 개혁이 아닌 혁명을 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전제군주제에서도 힘든 개혁이 오늘날 권력의 파편화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회의적이다. 이 어려운 일에 단지 개인적 탐욕이 아닌 이유로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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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길을 묻다 -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 그리스도교 낯선 전통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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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한 대다수 개신교인들에게 수도회, 혹은 수도원은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주제다. 사회를 등지고 자기들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무슨 도를 닦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실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전통에서 이런 생각은 당연히 조금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 역사 속 수도회 전통을 통시적으로 훑어보는 이 책에서, 수도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수도회는 세속화의 물결에 넘어가는 “제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이건 최초의 수도사들이 출현한 시점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기 완성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재림의 긴박성을 믿고 이에 따라 살기를 원했던 이들이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세속화의 위협을 예지하고 이를 피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회라고 불릴 만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은둔자들로 대표되던 초기 수도적 삶은 이제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또, 서로를 감시/경계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수도원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베네딕투스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수도규칙. 기도와 노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규칙서는 중세 기간(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의 표준규칙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애초에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시작된 수도회였지만, 그렇게 모인 수도원이 각종 기부 등으로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이니 시토회니 하는 수도회들도 모두 처음에는 청빈과 경건을 강조했으나, 그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결국 애초의 이상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탁발 수도회였다. 말 그대로 구걸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이상을 설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이들은 앞선 수도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측면이 강했던 데 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도회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빈을 위한 구걸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는 평안한 삶으로 변질되었다. 이미 프란체스코 생전부터 청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한 온건파가 승리한다. 다시 한 번 초기의 이상이 희미해진 것.


이런 일은 수도회 역사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그것 봐라’, ‘처음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와 같은 논조로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처음부터 수도회 운동은 제도 교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수도원의 역할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 시대의 교회가 놓친 부분을 일깨웠다면 수도회 운동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당연히 수도원 해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말을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즈음 유럽 각지에서는 수도원 해체가 연달아 발생했다. 물론 당시의 여러 수도원은 지나치게 부유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기득권층과 밀착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수도원 해체로 이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한 수순이었다. 저자도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제도 교회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수도회가 사라지면서, 교회가 국가에 더욱 밀착해버리는 결과가 나왔다. 이제 제도 교회의 문제를 삶으로 반박하고 교정의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자리가 비게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각국의 개신교회는 국교회로 전환되는 일이 많았다. 칼뱅의 스위스 개혁교회도, 루터의 독일 교회도, 잉글랜드의 교회나 북유럽의 여러 교회들이 다 그랬다. 그리고 교회가 국교회화가 유발한 문제는 오늘의 유럽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수도회 운동의 오늘에 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회퍼나 토머스 머튼 같은 인물들에게서 현대의 수도회 운동의 자취를 찾고, 라브리 공동체나 떼제 공동체에서 그 실천을 발견한다. 물론 이런 운동들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과거의 수도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제도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름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면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제도 교회와 수도회 운동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살펴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각 시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이에 대한 수도회 운동의 반응에 주목하며 읽어보는 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밝히 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좀 더 천천히 읽으면서 내용을 함께 나눠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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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은 자신의 혁명 동기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모세의 이야기와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킨 예수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혁명은 불이고, 그리스도교는 기름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혁명만 보고, 나의 신앙을 보지 못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불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 송철규, 민경중, 『대륙의 십자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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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 우리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The 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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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라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직사회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요새 언론들이야 클릭장사가 가장 중요한 사업인지라 선정적인 내용만 각색해 보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신문은 적절한 매체가 아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이 책이다. 사실 근래의 문제는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 괴롭힘이지만,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한국 교사들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외적 요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하지만 문제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곤 한다.




책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교사 교육 과정의 부족함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를 지망하는 특이한 나라다. 하지만 정작 그런 학생들들 좋은 교사로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는 모자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의 수업 구성인데, 중등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학의 경우 실제 교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 구성에 따른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 교과 교사를 키우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과목들, 즉 지리나 역사, 경제, 정치 같은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과 교사이지만 정치를 잘 모르고, 역사를 어려워하는 교사가 탄생한다. 이런 엉뚱한 교육현실의 배경에는 기득권과 밥그릇이 연관되어 있고.


교사의 승진과 관련된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행 제도에서 교사들은 크게 세 가지 진로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교장이 되려고 애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길, 그리고 나머지는 이도 저도 관심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길. 세 부류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높은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행 제도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매우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세 번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된다.


교사들 자신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다른 교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주체들과의 연계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유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사명감으로 무슨 행동을 유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교원 양성 계획의 실패로 인한 임용대기자 문제다. 쉽게 말해 교육은 다 받았는데 정작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있는데,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예비 교사들의 희생만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면 결국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 된다. 어떻게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승진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학부모들에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비극적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을 하나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나을지 모르지만, 교사 개개인의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사의 정체성 부분이다. 우리는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걸까? 최근 우후죽순 출몰하는 갑질 부모들의 경우 내 자식을 떠받들어야 하는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건 애초에 논외로 해도 상관이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면 교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일까? 또는 (십수 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일종의 성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양쪽 다 지나친 면이 있다.


저자는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건 교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만이 아니라 교사들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야 교사 양성 과정에서 내실을 기할 수 있고,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자연스럽게 요구될 것이다. 당연히 다양한 제도들(예컨대 승진 제도)도 여기에 맞춰 재설정되어야 하고.




어느 영역이든 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을 대는 식으로는 오히려 덧나기 쉽다. 워낙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은 모두의 반발을 사곤 하니까. 특히 교육 영역은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교육과정을 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확히 이런 방식의 개혁을 시도해 왔었다.


물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다간 더 큰 카타스트로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개혁을 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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