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처음 읽어 본 건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4학년 쯤? 당시 출석하던 교회당 한쪽 구석에 있던 책장인가 책상위에서 아주 낡은 문고판 형태의 책자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읽던 시절이라, 식탁 위 치킨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가는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손에 잡고 읽기 시작했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인터넷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에(.. 나이가 드러난다. 그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컴퓨터 수업시간에는 이른바 286 시절인지라 부팅 한 번을 하려면 디스켓을 넣었다 뺐다 해야했다) 어떤 책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존 번연이 누군지도, 이 책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읽기 시작한 책은 너무 뻔하다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의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강한 예상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건 다른 책들에서도 대체로 예측되는 부분이니까. 문제는 인물들의 이름이었다. 이름에 그 사람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리니,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가 예측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정직씨가 정직하지 않으면 또 누가 정직하겠는가

 

     ​물론 지금은 애초에 원작이 단지 아이들을 위해쓰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알레고리라고 여기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여전히 책의 문학성을 더하기 위해서는 이름을 좀 더 평범하게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있다.(그랬다가는 캐릭터에 괴상한 해석이야말로 수준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비평가들에 의해 작품이 망가질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용을 얼마나 잘 표현해 냈을까도 그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보다 큰 우려는 어느 정도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느냐였다. 성경 속 지문을 그대로(문어체로) 대사화 해서 어색하기 그지없던 오래 전 텔레비전용(혹 비디오용) 성경드라마처럼 오글거림을 느끼게 만들지는 않을지, 메시지 전달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정작 영화의 중요한 요소인 영상쪽이 형편없지는 않은지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이런 생각들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독교 창작물의 수준도 (적어도 미국의 경우에는) 꽤나 발전했다는 안도감(?). 최근에 나온 라이온 킹 정도의 실사 애니메이션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3D 방식의 여느 극장 애니메이션에 비해 특별히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기에 대사처리도 몇 군데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진리가 “~라는 것은 다음과 같아요.”라는 부분은 매우 어색), 또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비유적 표현들(‘눈물을 닦지 말고 눈물을 통해서 보라는 말과 율법의 산을 스스로의 힘으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좀 더 명시적으로 주제를 드러내기를 원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문학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그려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듯하다. 새로운 세계를 단순히 알레고리로서가 아니라 풍성한 상징을 담아내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충분한(‘완전한이 아니다) 내적 개연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내용면에서도, 비주얼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제법 괜찮은 작품이다.

 

     ​다만 애초에 원작 자체가 아이들 수준으로 쓰인 것은 아니기에, (당시 청교도들의 글이 대체로 그렇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독교에 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는 건 기억해야 할 점.

 

 

 

 

      천로역정을 번역하면, ‘하늘로 향하는 길을 걷는 여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The Pilgrim's Progress라는 원제를 이렇게 맛깔나게 우리말로 번역할 수도 있는 건지..(사실 당시에는 이렇게 사자성어처럼 번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ex. 이신칭의, 가상칠언 등등) 기독교인들은 지금의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더 큰 세상이 있음을 믿는 이들이다. 물론 그 더 큰 세상이 이 세상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혹은 지금 누릴 수 있는지, 후에나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여행자, 나그네다.

 

     초기 핍박의 시기에는 이런 나그네 의식이 썩 잘 와 닿았다. 그건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사 이래로 매순간 기독교인들은 여정을 포기하고 정착하려는 유혹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한 정착에의 유혹과 요구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정착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큰 성을, 도시를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이들이 쉽게 넘어오지 못하는 높고 튼튼한 벽도 쌓게 된다. 그게 완성되면, 이제 주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나선다. 이게 딱 오늘 주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아닐까. 영화 속 크리스천이 그 도시에 이르기 전 어디에서도 (심지어 매우 우호적인 장소에서도) 머물면 안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정착에의 유혹을 떨쳐내야 할 것이다. 그분을 생각하며 기꺼이 불안정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가장 주요한 모습 중 하나일 테니까.


※ 영화 속 전도자의 목소리를 맡은 배우는 '반지의 제왕'에서 김리 역을 연기했던 그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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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온 킹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 동화책으로 본 기억이 있다. 얼마 전 봤던 알라딘처럼, 실사화로 돌아온 라이온 킹 역시 추억을 자극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사실 처음 애니메이션이 나온 이후에도 CDDVD로도 워낙에 많이 팔리긴 했지만, 계산을 해 보면 첫 애니가 나왔을 때 어린 아이였던 이들이 이제는 최소 30대는 되었을 테니 딱 구매력이 좋을 나이에 맞췄다고도 볼 수 있을 듯. (너무 상업적 계산인가)

 

     ​실사화라고는 하지만 사자 이야기가 주인지라, 정말로 실사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 대신 컴퓨터를 이용한 그래픽 작업이 엄청나게 투입되었다. 많은 부분(특히 색감!)이 보정되기는 했지만, 언뜻 정말로 자연관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으니까. 사자들의 소굴로 정해진 바위굴부터, 거대한 들소무리가 돌진하는 협곡, 심바가 도망쳐간 정글 속 낙원까지 실감나는 배경 묘사도 훌륭했다.

 

 

 

 

     영화 초반을 보면서 같은 사자가 중심인물(‘인물맞나?)로 등장하는 나니아 연대기가 떠올랐다. 특히 심바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언하는 의식에 초원의 여러 동물들이 나와 둘러서서 고개를 숙이거나 환호하는 모습은, 아슬란이 노래로 세상을 창조하자 말하는 동물들이 이를 둘러섰던 마법사의 조카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울러 표범과 가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뻐하는 모습은 성경 속 한 구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 116)

 

      온통 분열되고, 험한 말과 보복, 치졸한 비아냥거림과 혐오만 보이는 뉴스 속 세상과는 사뭇 다른, 원초적인 평화와 조화의 나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소위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종간의 평화는커녕 같은 인간들 가운데서도 성별과 피부색과 국적을 이유로 다투고, 아니 같은 국적 안에서도 지역과 사상에 따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상황이니...

 

 

 

 

     ​영화 속 주제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무파사의 가르침과, 한 번 가면 그만이라는 시몬과 품바의 인생관의 대립이다. 사실 직선적 시간관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특징이지만, 영화 속의 개념은 그보다는 유물론적 관점과 좀 더 유사해 보인다.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영화는 그런 허무주의를 부정하고, 생태주의적 순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이 세계관은 딱히 힘이 없기에 (우리는 거대한 순환의 일부분일 뿐인데, 애써서 무엇을 해야 하나?) 심바를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만드는 추동력은 아버지의 메시지, 또는 자신의 자리를 찾겠다는 욕구 등이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애초에 자연의 순환까지 꺼냈던 말이 약간 무안해진다. 심바의 투쟁은 과연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위한 것이었는가?(애초에 초식동물들을 다 잡아먹거나 쫓아내면, 초원이 황폐화되기는 하는 건가?)

 

 

 

 

 

     ​문득 영화의 주제와 영화 속 유명한 노래들이 서로 잘 어울렸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티몬과 품바가 나와 부르는 신나는 노래는 사실 현실도피를 부추기는 내용이고, 영화 초반 심바의 일탈(?)을 노래한 노래도 마찬가지. 엄청나게 감동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가사들이 약간 깬다는 느낌. 역시 추억은 약간 막연한 낭만으로 남아있었어야 하나...

 

     ​물론 이런 아쉬운 점들은 압도적인 비주얼에 거의 가려있다. 그냥 영상미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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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단순하다. 전편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1편은 봤는데 2편은 보지 못했다) 존 윅이 규칙을 어겼다며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죽이려는 연합회와, 연합회의 지시에 따라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조무래기 킬러들, 그리고 초반엔 조금 맞더라도 결국은 적들을 해치우는 존 윅

 

     ​영화의 부제에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어 뭔가 대단한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싶었지만, 존 윅의 시그니쳐는 혼자서 엄청나게 많은 적을 격투를 섞어가며 해치운다는 건데 부대로 싸우는 건 어울리지가 않는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 뭐 액션영화에서 줄거리가 단순한 거야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1편을 봤을 때는 그냥 키아누 리브스의 노익장이 주로 눈에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영화 속 세계관에 짙게 배어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들이 보인다. 우선 정신없이 전환되는 영화 속 배경은 뉴욕의 뒷골목부터 마피아 소굴, 북아프리카의 저택을 넘어 사막의 유력한 부족장의 집에 이른다. 여기에 그를 쫓는 수많은 킬러들의 국적과 성격들도 주목해 볼만 한데, 존 윅과 그나마 여러 합을 겨루며 제법 싸웠던 이들은 한결같이 아시아인들(동남아시아 콤비와 일본 칼잡이)이다

 

     ​물론 이걸 단지 코스모폴리탄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분해(해체)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재구성을 해낸다. 실제 세계에서는 거의 연결되지 않을 이야기를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지역들은 주변부와 고립된 섬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대도시인 뉴욕에서 총싸움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도 간여하지 않고, 경찰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속 이미지가 들어가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예컨대 존 윅이 콘티네탈호텔의 계단에 손을 올리자마자 그를 죽이려는 일체의 행위는 중단되어야만 한다. 이는 레위기의 도피성제도나 성전의 제단 뿔을 잡은 사람을 처형할 수 없다다는 성경 속 규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그런 상징은 철저하게 원 문맥에서 분리된 채, 트리애 매달린 다양한 장식 중 하나처럼 작용될 뿐이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해체해서 만들어낸 세상은 오직 힘만이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목적에서인지, 어떤 사정 가운데서 벌어진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엄청나게 큰 힘을 가진 기관의 명령에 순종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구성된 사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거대담론이 해체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그저 목소리가 큰 쪽이 우세를 잡을 뿐, 그 이상은 없으니까.

 

     ​당장은 현실을 좀 다른 식으로 재구성 혹은 재규정하는 것이 스스로를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존재처럼 비춰주니 신선한 즐거움을 주겠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다시 만들어진 현실 또한 같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거나 더 악화되기만 한다는 것. 현실을 급격히 파괴하는 다양한 가상의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폭력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나저나.. 솔직히 이제 이런 액션은 좀 무리인 나이가 아니신지... 배우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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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우선 밑밥을 좀 깔아야겠다. 나는 여성우월주의자가 아니다. 물론 남성우월주의자도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잘 하는 건 잘 하는 거고, 잘 못하는 건 잘 못하는 거다. 특정한 남성이, 혹은 특정한 여성이 잘못했다고 해서 같은 성을 가진 나머지 모두가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논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성별과 상관없이 가능하면 능력 있고, 리더십도 가진 사람이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물론 이건 일반론이고, 개별 사안들에서는 좀 더 고려할 것이 많을 수도 있다.)

 

     이렇게 쓸 데 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고 감상평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홍보 코드 중 하나가 새로운 여성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여주인공 자스민은 왕이 되기를 원하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캐릭터로 재해석되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어떤여성이 이런 성격을 갖는 것에 딱히 불만이라든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없다. 사실 그 자체야 얼마든지 제작자와 감독의 해석 영역이니 오케이다. 다만 그렇게 성격의 변화를 더한 캐릭터가 전체 이야기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사실 알라딘 속 주요 대결구도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그저 권력투쟁이었다. 자스민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외치는 장면은 물론 감동적이지만, 서로 칼을 맞대고 겨루는 상황에서 전혀 엉뚱한 곳을 찌르는 느낌을 받는다. 자파는 자스민이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이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면 편안할 거라는 그의 대사는 오늘날에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되던 시대에는 거의 전 지구적으로 통용되는(때문에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중세를 살고 있는데 자스민만 현대적인 느낌이랄까. 문학적 개연성, 구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어색하다.

 

 

 

      다시 영화 자체로 돌아가 보자. 알라딘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조금 아쉽긴 했지만(특히 표정이....) 나오미 스콧과 윌 스미스의 연기력은 훌륭하다. 뮤지컬로 꾸며진 장면들에서는 흥이 나고, 무엇보다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A Whole New World가 나올 때는 살짝 감동까지 받아버렸다. 이 부분은 확실히 어린 시절 향수와 어우러져서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선악의 대결과 로맨스라는 전통적인 코드는 여전히 통하는 듯하지만, 악역을 맡은 자파의 허술한 캐릭터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전개는 아쉬운 부분이다. 요새 영화들에서 악역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이곤 하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잘 구축된 악역이 적절한 포인트를 자극했더라면 나오미 캐릭터도 좀 더 부각될 수 있지 않았을까.

 

 

     향수를 자극하는 주제가(어떻게 이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좋니)와 이국적인 배경들, 그리고 조금은 신기하게 구현된 뮤지컬식 구성 등이 인상적이다. 두 시간 여의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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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머리가 지끈거리게 만드는 캐릭터 설명으로 시작한다. 전직 레스링 선수로, 고졸 특채를 통해 경찰에 들어왔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몸부터 나서다 지금은 민원실에서 일하고 있는 전직 형사 박미영(라미란), 그녀와 한집에 사는 사이(시누이)이면서 거의 비슷한 성격의 열혈 경찰 조지혜(이성경)까지.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전개가 충분히 예상되면서도, 그 과정에 재미를 넣기 위해서였을까, 지나치게 과장되어 보이는 캐릭터들이 좀 시끄럽게 느껴진다. 이런 우려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데...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민원실로 당분간 쫓겨나게 된 지혜는 미영과 티격태격하며 험난한 근신기간을 보내기 시작하던 중, 민원실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몰카 범죄의 피해자의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강력한 각성을 경험한 두 여자가 도움이 안 되는 남자들을 뒤에 두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

 

     근래에 사회적 이슈가 된 있는 몰카 범죄를 중심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 과정을 지나치게 가볍게 소비하지는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선, 사건은 수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식일 뿐이고(악역들이 조금만 머리를 더 썼거나, 3분만 더 의심했어도 두 여자는 진작 제거되었을 듯), 감독은 여기에 거의 강박적으로 개그코드를 넣으려고 애를 쓰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억지스럽다.

 

 

     애초에 작정하고 웃겨보자는 코미디 영화로 만들었다면 또 모르겠다. ‘극한 직업처럼 경찰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가벼운 터치로 그려낼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여성주의’(혹은 여성우월주의?)라는 좀 더 무거운 주제를 넣으려고 작정한 상태였고, 이 주제를 어떻게든 우겨넣으려다보니 개연성이 부족해도 어지간히 부족하다

 

     ​어차피 영화야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적어도 실제를 어느 식으로든 반영해야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오직 여성은 피해자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만나는 모든 인물과 사건에 가져다 대버린다는 게 문제. 영화 속 동료 남성 경찰들은 하나같이 진급과 실적에 눈이 먼 속물들로 묘사되고, 미영의 남편이자 지혜의 오빠인 지철(윤상현)은 그냥 머저리로 출연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인물들을 그려낼 생각이 없었다고 밖에...(애초에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구보고 웃으라는 걸까?)

 

     애초에 이 영화가 여성의 우월함, 혹은 정의롭고 지혜로움을 그리는 영화였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해내기는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충동적이고, 신중치 못하며, 겨우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실수에서 아무런 배움도 얻지 못하는 수준이니... 오히려 여자는 이래서 안 돼같은 식의 디스만 난무하는 듯한데 말이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그렇다고 유쾌하게 보기도 어려운 무리한 설정들의 남발. 이 영화는 뭘 위해 만들어진 걸까? 몰카 범죄에 대한 경각심?(물론 몰카 범죄는 척결되어야 할 문제인데, 이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고 그 부분이 진지하게 와 닿을까?) 아니면 그냥 남성은 열등하다는 식의 편견을 보며 웃고 떠들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만든 영화?

 

     네이버 기준으로 관람객 평점이 무려 9.08이다. 기자, 평론가와 네티즌 평점은 5점 대. 사실상 평점조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대충 의도가 읽히긴 한다. 집단지성이라는 건 과연 허구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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