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SF.... 그리고 신파?


SF란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줄임말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하되 그 안에 구현된 현실이 어느 정도 과학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이 때 과학적 뒷받침이라는 게 꼭 현실적이어야 하는 건 아닌데, 대표적인 예가 증기기관의 발전이 극대화된 현실을 그리는 스팀펑크류이다.


영화는 미래 재앙으로 지구를 떠나 지구와 달 사이에 식민지를 건설한 인류가 서로 내전을 벌이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은 용병대장의 뇌를 복제해 더 우수한 전투형 AI를 만들려고 하는 연구소가 영화의 주 무대. 뇌 복제와 안드로이드라는 첨단 기술이 주요 소재이고, 덕분에 온통 금속으로 만들어진 공간과 뭔가 첨단인 듯한 슈트 등 볼꺼리가 등장한다.


그렇게 최첨단의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화는 오래된 공식을 반복하는 듯하다. 강수연이 맡은 “정이”의 복제 뇌 데이터를 사용해 새로운 AI를 만드는 연구소의 실질적인 책임자(부소장)인 서현이 실은 정이의 딸이었다는 설정과,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끝없는 전투에 나가야 했다는 정이의 개인사가 어우러지면서,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한다.


자신을 위해 전투에 나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제는 엄마보다 나이가 든) 딸과 언제까지나 죽을 당시의 그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정이(의 복제품)의 모습을 함께 잡으면서 감독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쓴다. 서현은 엄마의 뇌 데이터가 들어간 안드로이드를 연구소에서 ‘탈출’ 시키기로 하고, 이 과정에서 방해가 있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오래 전 엄마와 나누던 볼 부비기까지... 전형적인 신파적 코드들이 잔뜩 삽입되어 약간 헛웃음까지 나오는...





자아와 뇌 복제와 인공지능.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영화 속에는 생각해 볼만한 철학적 주제들이 여럿 등장한다. 인간의 자아란 무엇인지, 우리를 특정한 인간으로 특정 짓는 그 요소는 무엇인지, 뇌를 정확하게 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복제한 뇌를 가진 존재는 원래의 존재와 같은 존재인지,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전하면 그것과 인간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 하는 것들.


물론 이런 주제들을 다루는 책이나 영화들도 많지만,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주제였기에, 이 문제를 제대로 다뤘다면 꽤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감독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신, 먼저 답을 내리고 그 답으로 시청자들을 끌고 간다. 뇌 데이터가 자아이며, 만약 원본 데이터가 삭제되었다면 복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그 존재가 바로 ‘그’라는 것.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고 나면 영화에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어져 버린다. 이제 서현은 정이를 엄마를 대하듯 애착을 갖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뭔가 규칙을 깨뜨릴 것이고, 나중에는 둘이 부둥켜 앉을 것이라는 게 거의 보이니까. 물론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에 문제에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게 연출력이 아니겠는가.





인공지능과 자본주의.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포인트는 회상 장면에 나온다. 정이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자, 그녀의 뇌를 복제 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부분이다. 영화 속에는 A, B, C 타입이 나오는데, A는 새로운 육체에서 자유롭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 B는 결혼, 출산, 이동 같은 영역에서 제한이 있고, 뇌 데이터를 정부가 가져가고, C는 민간기업에서 데이터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


당연히 A는 가장 비용이 들고, C는 기업에 뇌 데이터를 파는 것이니 무료다. 대신 현실에서는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육신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기업에서 대준다. 딸의 병원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정이의 가족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개인적으론 뇌사를 선택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도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역시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안으로써 뇌 데이터 이식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건 오래됐고, 수명을 늘려가는 일이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이미 부자일수록 건강관리와 유지에 더 많은 돈을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의 경제력이 전반적으로 성장하다보면 언젠가 낙수효과로 이런 것들이 저소득층에까지 혜택을 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전망은 좀처럼 현실이 될 것 같지 않다.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모든 나라는 내부든 외부든 식민지 정책을 펴왔고, 따라서 부는 결코 평등하게 나눠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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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27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수연의 마지막 유작이 정이였군요.
한동안 스크린에 안 보여서 뭐하나 궁금했는데
유작이라니 아쉽네요. ㅠ

노란가방 2023-01-27 22:39   좋아요 1 | URL
네 이 영화 촬영 마치고 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영화 내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좀 더 편안한 영화였더라도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