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나고, 십대의 불량 청소년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패고, 전철 안에서는 겨우 어린 티를 벗은 술 취한 금융가 회사원들이 여성들을 희롱하는 고담시. 망상에 빠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하는 일은, 작은 이벤트 업체에 소속되어 광대 분장을 하고 온갖 행사에 출연해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었다.

 

이런 하 수상한 시절, 최악의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코미디언이 되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을 웃기는 일에 영 재주가 없어 보이는 플렉의 삶 또한 순탄치 않았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총으로 사고를 쳐버린 플렉. 그런데 사고의 여파가 이상하게 확산되었고, 여기에 어머니의 망상이 가득한 편지로 인한 희망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마침내 위태롭게 유지해 오던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조커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이 살아왔던 주인공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그려낸다. 처음부터 불안 불안해 보이던 그의 삶에서 조금씩 희망이 사라져버리고 막다른 길에 몰려가는 과정이 호아킨 피닉스의 명품 연기로 묵직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닥에 붙어 있는 사람은 떨어질 데가 없는 법이다. 플렉이 조커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은 높은 데로 올라설 (그리고 거기서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영화 속 플렉의 삶은 소위 루저의 전형이다.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 그러면서도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어머니의 편지 속 내용을 보면서 순간적이나마 희망을 품었고, 그 희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전에 있던 자리보다 훨씬 더 아래쪽으로 떨어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긍정의 힘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의 강요가 수반된다. 현실은 어렵지만, 막연히 앞으로는 잘 되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고담시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희망이 더 큰 절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정작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하나씩 치워지는데도, 아니 이제 사다리로 오르기에는 너무 높이 올라가고 있는데도, 20, 30년 전 3층집일 때의 이야기만 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희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어설픈 희망의 강요는 도리어 수많은 조커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만약 그처럼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진료소가 문을 닫는 대신 좀 더 체계적인 지원을 했더라면, 그저 남을 웃기고 싶지만 재능이 조금 부족한 이들에게 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더라면, 챨리 채플린의 영화 속 슬랩스틱을 보고 웃기만 하는 대신 그것이 풍자하고 있는 현실 속 문제들에 대해 좀 더 공감하는 사람들이 극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있었다면, 조커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한 명의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실감나게 그려낸 작품. 작품의 구성과 배우의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 멋있었지만, 내용은 조금 씁쓸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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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10-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커는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더군요.어떤분들은 너무 음울한 분위기의 영화로 본뒤 오히려 약간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하더군요.

노란가방 2019-10-15 23:04   좋아요 0 | URL
연기를 워낙에 잘 해놔서 인물에 너무 깊이 몰입하셨던 분들인가봐요.
저는 좀 거리를 두고 감상했던지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살짝 엿들은 주변 사람들의 평들도 갈리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