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케이스릴러
이두온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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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채널예스』 6월 호에 실린 소설가 이두온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6인'에 든 소감을 말해달라는 답변에 그는 독자의 선택을 받는 건 힘든 일이라 들러리를 서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힌다. 대개 이런 질문에는 기쁘다, 감격했다 같은 보편의 답을 하기 마련인데 그는 굉장히 솔직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1위에 뽑히지 않을 걸 알고 있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 아닌가. 그 부분에서 한 번 반하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로런스 블록. 대박 완전 내 취향이잖아. 리듬감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데 그러기 힘들 때 펼쳐서 읽는 책이 무려 『살인해드립니다』란다. 미쳤다리.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로런스 블록의 킬러 켈러 시리즈와 탐정 매튜 스커더 시리즈를 완독하고 싶어서다. 좋았어. 이두온, 가보자고. 첫 책 『시스터』부터.


그야말로 홀린 듯이 읽었다.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를 이겼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조금만 더 읽어야지 하면서 주말을 보냈다. 소설은 배우 부모를 둔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자기애만 높은 부모는 아이를 낳았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들이 유명해지는 방법이다. 윤선이, 윤장이 자매는 부모의 철저한 방임 아래 놓인다. 한물간 배우 부모는 재기를 노린다. 방송국에 줄을 댄 아버지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한다. 


'밀리언달러 키즈'라는 육아 예능에 언니 선이를 데리고 나가지만 잘해야 된다는 강박에 선이는 경쟁심만을 앞세운다. 아버지는 선이 대신 동생 장이와 프로그램을 다시 찍는다. 장이는 인기와 사랑을 받지만 나이답지 않은 영악한 면을 드러내면서 프로그램에서 하차 당한다. 어머니가 사고로 죽고 선이는 외가로 가고 장이는 아버지와 남겨진다. 


교정직 면접날 선이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을 잃는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 선이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 이른다. 정신을 차린 선이 앞에 김경희 형사가 나타난다. 그는 사라진 장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장이가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 같다고. 선이는 오랜만에 장이의 이름을 들었다. 선이가 외가로 간 이후에 한 번도 장이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시스터』는 시작부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 머뭇거림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헤친다. 선이와 장이는 친밀해질 수 있었지만 부모의 욕심으로 관계를 망쳐 버렸다. 소설은 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간격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사랑을 받기 위한 보이지 않는 다툼. 상대를 향한 적의. 먼저 손을 내밀기엔 멀어져 버린 사이. 자신을 돌보기에 바빠 상대의 슬픔과 가난을 헤아리지 못해 벌어진 사건의 실체는 끔찍했다. 


나 역시 소설 속 사람들처럼 육아 예능을 즐겨 본 적이 있었다.  『시스터』를 읽고 나면 아연해진다. 육아 예능 속 아이들의 모습을 보던 내가 한심해서. 카메라 앞에 노출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아이 같지 않다, 똑똑하다, 귀엽다 같은 멍청한 감상을 했던 것 때문에. 관계의 복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시스터』는 보여준다. 마음이 아파지는 소설이다. 단 한 번도 제대도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다. 언니 구해줘. 나를 구해줘. 비정한 어른에 의해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의 비명이 가득한 이야기.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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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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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피식 대학의 피식 쇼를 즐겨본다. 외국 토크쇼 형식으로 출연자와 사회자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보면서 감탄하고 말았다. 다들 어쩜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외국에서 살다 오거나 사교육의 힘으로 영어를 습득했고 자유자재로 한국어와 섞어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웃었다. 그러다 동기부여를 받게 되었다. 해보자. 영어. 


제로백 1초가 아닌 제로백 10일의 타입이라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할지 생각을 했다. 일단 시작하고 보자가 아닌 어떻게 해볼까, 어떻게 하지, 되게 답답한 스타일이다. 매일 꾸준히 해보면 어떨까 하고 가벼운 학습지를 검색(후회한다. 검색 몇 번 했다고 광고 팝업이 자꾸 뜬다. 가격 견적 내려고 가입했더니 매일 광고 톡이 온다.) 하고 EBS 다시 가입했다. 재능 있는 유튜버 선생님들이 올려주신 영상도 몇 개씩 봤다. 


돌고 돌아 소설책 읽기. 제목도 직관적인 심재천의 『나의 토익만점 수기』를 읽어보자 했다. 엇, 품절. 그럼 중고책으로 가자. 주문하는 김에 유튜버 선생님이 집필한 교재도 주문했다. 1,500원만 주면 분철해 주니까 그것도 신청. 교재는 무조건 스프링 제본이어야 한다. 반으로 접어서 컴팩트한 사이즈로 공부를 해야 집중이 잘 된다. 안 접히는 거 진짜 극혐. 쫙 펼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네, 네 공부 못 한 이유를 이제 알겠죠? 이럴 시간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나의 토익만점 수기』는 토익 점수 만점을 위해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 '나'의 모험담을 그린다. 취업을 위해 토익 시험을 봤지만 590점이 최고점. 이 점수로는 원서도 내지 못하고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 비행기 삯이 제일 싼 호주로 건너왔다. 토익 만점을 받은 친구는 취업에 성공 소나타 신형을 뽑고 주말마다 여자친구와 놀러 다녔다. 제대로 동기부여 받은 셈이다. 한국말은 절대 쓰지 않고 오직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토익 만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로 날아왔다. 


제임스를 만나 남자답게 스릴을 즐기며 영어를 배우라는 가르침에 스티브의 인질이 되기로 했다. 스티브는 바나나 농장을 하는 척하면서 마리화나를 재배한다. 그곳에서 일하며 나는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실전 영어로. 이주일 닮은 재림주를 믿는 아버지에게 영어로 편지를 쓰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심각해질 때 그런 후회를 한 적이 있다. 국어가 아닌 영어를 좋아할걸. 그랬으면.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걸. 박명수 어록 있지 않은가. 늦었을 때가 늦은 거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하라는. 『나의 토익만점 수기』는 토익 만점을 향한 호주와 한국을 넘나드는 액션 어드벤처 픽션으로 토익 만점이 뭐길래 하는 인생무상과 체념과 허무주의까지 챙겨준다. 그래봐야 토익 만점.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된다. 토익 만점이 뭐라고. 도대체 그게 뭐길래 그렇게까지 아이고.


토익 만점을 받고 싶지는 않고 영어로 듣기가 가능하고 나의 생각을 더듬지 않고(근데 한국어로 말해도 더듬는 거 실화임? 오늘도 말 제대로 못하니 대신 말해달라고 미리 납작 엎드려서 일 처리했다. 정말 한심.)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어 회화 책이 지난주 토요일에 왔는데 목차 보면서 계획만 짜고 있는 거 진짜 등짝 한 대 때려야 한다.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이제 진짜 책 펼친다. 그러니까 영어 어순은 주어+동사+목적어라고. 오케이.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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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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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는 유튜브 요약본으로 올라온 《나의 아저씨》를 봤다.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해 주니까 클릭. 요약본이라고 해도 약 여섯 시간짜리였다. 전체를 다시 볼 에너지는 없어서 춘식이 소파에 누워서 압축된 지안과 동훈의 서사를 따라갔다. 집으로 올라오면서 계획했던 일, 씻고 일기와 몇 문단의 글을 쓰는 일, 은 하지 못했다. 


유튜브만 봐도 금요일 밤과 주말은 순간 삭제되어 어느새 월요일. 매일 아침마다 그렇지만 월요일은 일어나기 진짜 힘들다. 인간과 삶에 대한 고찰을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부터 돈이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금요일 밤이 왔으면 좋겠다는 아메바적인 생각으로 귀결되는 고찰을 끝으로 일어난다. 내내 누워서 유튜브,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디즈니 플러스를 봤으면 좋겠다. 한 일 년 정도 그렇게. 안 될까?


안 돼. 


이서수의 첫 소설집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젊은 근희의 행진』을 받아들고 표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표지에는 단발머리를 하고 가방을 멘 여자의 옆모습이 있다. 와 순간 나인 줄. 몇 년 동안 내가 이러고 다닌다. 한결같은 스타일. 단발머리, 책가방. 머리를 길러서 묶어볼까도 했지만 아침에 머리 말리는 시간을 끝내 확보하지 못했다. 보부상 재질이라 핸드백은 꿈도 꾸지 않는다. 갑자기 비가 와서 양말 젖으면 어떡해. 양말, 우산, 비상약, 물티슈, 마스크, 장바구니 등등 넣어야 하니 책가방 못 잃어. 


책 이야기하자 본격적으로. 


『젊은 근희의 행진』, 말해 뭐해. 전 국민 필독서로 지정해서 읽고 독후감 써서 국세청 홈페이지에 신고서 양식으로 제출하는 거 어떨까. 잘 쓴 순으로 세액공제 해주는 거지. 소설집에 실린 열 편의 소설을 아껴서 읽었다. 이미 읽은 소설이 꽤 있었지만 처음 읽는 것처럼. 첫 마음으로. 두 번 읽으면 그렇다. 처음엔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한 부분을 만나서 마음이 찡해진다. 내가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면서 훌쩍인 것처럼. (지안이 할머니에게 "내 할머니가 되어줘서 고마워." 했던 부분. 정말 고마워.)


시를 쓰는 엄마와 사는 일상을 그린 「미조의 시대」부터 등단작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까지. 찡하고 울컥한데 웃긴다. 근로소득으로는 집을 사지 못함을 예감하는 부부의 이야기 「나의 방광 나의 지구」를 읽는 토요일 오전이었다. 집을 찾다가 지친 아내가 남편에게 땅을 사서 거기에 천막을 짓고 살자는 말에 남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토요일 오전이 유머로 가득해졌다. 헛웃음이 났지만 유머가 우리의 슬픔을 구원해주리라 믿음이 생겼다. 


「현서의 그림자」는 또 어떤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믿는 현서, 숙모의 딸이기도 한 현서와 이야기를 하기로 한 이유는 숙모가 '나'에게 가끔 용돈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외계인이라고 믿는 현서의 처지가 '나'보다 더 낫다는걸 깨닫는다. 이서수 소설의 인물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지만 긍정만은 넘친다. 열정, 열정, 열정 대신 긍정, 긍정, 긍정을 수시로 외친다. 소리 내는게 아니라 속으로 속으로. 집을 구하지 못한다 해도 긍정, 압박 면접 끝에 연락이 오지 않아도 긍정, 손님이 없어도 긍정. 


뭐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받아들여라는 무책임한 긍정을 강제로 주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긍정을 손에 쥐여주며 웃는다. 표제작 「젊은 근희의 행진」은 동생 근희가 회사를 그만두고 유튜브 방송을 하는 걸 지켜보는 언니 문희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유명해지는 시대에 나 역시도 유명해지면 안 되겠느냐고 책 유튜버를 하더니 똑똑해진 근희의 주장에 나는 힘을 실어주고 싶다. 유명해져서 종합소득세 내자, 근희야. 동생을 아메바라고 하지만 문희는 근희를 사랑하고 걱정한다. 


미조, 근희, 문희, 가진, 사영, 경희, 언니, 나 그리고 서수,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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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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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보지 않아서.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죽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남은 이들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이렇게 된다, 다들. 혹시 모르겠다. 죽은 이들이 자신의 상태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데도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귀가 가려운 건 그 이유일까. 


계속 살아보고 싶어서.


치과를 예약하고 한 달 예산을 짠다. 처음으로 카드 이용내역을 다운로드해 보았다. 5월 한 달 우아한 형제들에게 갖다 받친 돈이 어찌나 많은지. 한심. 주말에 요리를 해보겠다는 의욕으로 금요일에 식재료를 사지만 힘이 없어 누운 채 배민을 켠다. 이런 나의 게으름을 지워주세요. 


김중혁의 장편 소설 『딜리터』에는 사물, 사람을 이 세계에서 지워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부르는 손만 대면 물건을 고장 내던 기동과 치우는 그것이 딜리터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는다. 눈을 감고 물건을 생각하면 자신이 가질 수 있다. 이건 기동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 눈을 감고 물건과 사람을 만지면 사라진다. 이건 놀라운 치우의 능력. 


사라진 물건과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치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딘가로 이동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할 뿐이다. 조이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수는 다른 세계 즉 레이어를 볼 수 있는 픽토르이다. 치우의 옛 여자친구 하윤은 지금 실종 상태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경찰은 치우를 의심하고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단체 M&F에서도 그를 주목한다. 


요즘 유행하는 세계관 멀티버스 즉 이곳이 아닌 세계에서 나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딜리터』는 레이어 즉 다른 막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딜리터에 의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과거의 기억을 지운 채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이런 상상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각각의 레이어 안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레이어를 볼 수 있는 이수가 그걸 증명해 준다. 


죽는다는 건 다른 세계로 건너가 편히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는 의미라고 『딜리터』는 이야기한다. 그러니 슬프지도 아프지도 말라는 조언을 해주는 셈이다. 하나씩 지우다 보면 결국엔 남지 않겠지만 괜찮다. 지워진 건 레이어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대신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물건을 옮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종은 나 자신. 


게으름 먼저 옮겨주세요. 딜리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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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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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집안에 들여놓은 물건 중에 부피가 가장 큰 건 원형 테이블 세트이다. 가로 지름이 무려 1000mm나 된다. 의자 두 개도 같이 왔다. 생각은 이런 거였다. 아침에 빵이나 소시지, 두유를 서서 먹고 가지 않고 앉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뉴스를 보면서 먹어보자. 교양 있는 아침이 되어보자.  테이블이 오고 조립을 하고 처음 며칠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서서 먹고 갔다. 아침에 그것도 겨우 일어나는 내게 교양을 챙길 시간이 없다는 걸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원형 테이블은 창가 자리로 쫓겨났다. 춘식이 소파에 누워 있기 전에 잠시 앉아 있는 용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 한동안 집에 물건을 들이는 것에 신중했었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데 사고 싶다는 기분에 충실한 나머지 집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걸 보고서 각성했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한 것만 사자. 그러면서 집안을 정리해 나갔다. 책을 팔고 입지 않은 옷을 정리했다. 비싼 신발도 신지 않으면 삭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키야미우의 소설 『시어머니 유품정리』는 며느리 모토코가 죽은 시어머니 집을 정리하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옷만으로 가득 찬 방, 냉장고 두 대에 들어 있던 음식들, 각종 플라스틱 반찬통과 비닐봉지들. 소설에 나오는 대사처럼 차라리 업체를 불러서 정리를 했었어야 했던 시간들. 정말 물건을 함부로 사지 말아야겠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옷을 사 모으지 말아야겠다. 비싼 옷이어도 먼지만 쌓인 옷은 입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깨달음과 반성의 나날들. 


마트에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모토코의 시어머니 집은 물건들의 천국이었다. 혼자 산다고 해서 물건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싱크대에는 그릇, 서랍장에는 옷, 심지어 인형 장식장에도 추억의 물건이 가득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사층의 집. 모토코는 혼자서 물건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주위의 조언대로 업체에 맡길까 했지만 알뜰한 모토코는 자신이 해보겠다고 의지를 다진다. 


정리는 쉽지 않았다. 대형 폐기물 버리는 날은 지정되어 있고 종량제 봉투에 물건을 담고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냉장고에 든 음식은 상하기 시작했고 베란다에는 화분과 커다란 돌도 있었다. 젊지 않은 나이의 모토코. 일을 하고 있어 온전히 정리에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다. 긍정적인 성격의 모토코는 대체 왜 이런 걸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을까 죽은 시어머니에게 푸념을 해가면서 씩씩하게 정리를 한다. 그러다가 시어머니의 진짜 모습도 알게 된다. 


모토코의 친정어머니는 시어머니와는 다르게 깔끔한 성격이었다. 병이 들었다는 걸 알고부터는 남은 이들이 자신의 물건 때문에 힘이 들까 봐 정리를 했다. 자신이 가진 물건 목록을 주면서 필요한 걸 고르라고도 했다. 시어머니를 단순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시에 살면서도 시어머니는 마음을 터놓고 이웃과 왕래를 했다. 모토코의 친정어머니는 남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인간관계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두 어머니들의 상반된 모습을 떠올리면서 모토코는 무얼 남기며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시어머니 유품정리』를 다 읽고 나면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을까 놀랍기만 하다. 왕복 세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어머니 집에 가서 물건을 정리하는 며느리라니.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라는 대사를 날리며 오는 지름신을 무찌를 수 있는 소설이다. 지름신에게 빙의 되어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는 나의 따귀를 철썩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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