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어보지 않아서.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죽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남은 이들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이렇게 된다, 다들. 혹시 모르겠다. 죽은 이들이 자신의 상태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데도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귀가 가려운 건 그 이유일까. 


계속 살아보고 싶어서.


치과를 예약하고 한 달 예산을 짠다. 처음으로 카드 이용내역을 다운로드해 보았다. 5월 한 달 우아한 형제들에게 갖다 받친 돈이 어찌나 많은지. 한심. 주말에 요리를 해보겠다는 의욕으로 금요일에 식재료를 사지만 힘이 없어 누운 채 배민을 켠다. 이런 나의 게으름을 지워주세요. 


김중혁의 장편 소설 『딜리터』에는 사물, 사람을 이 세계에서 지워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부르는 손만 대면 물건을 고장 내던 기동과 치우는 그것이 딜리터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는다. 눈을 감고 물건을 생각하면 자신이 가질 수 있다. 이건 기동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 눈을 감고 물건과 사람을 만지면 사라진다. 이건 놀라운 치우의 능력. 


사라진 물건과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치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딘가로 이동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할 뿐이다. 조이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수는 다른 세계 즉 레이어를 볼 수 있는 픽토르이다. 치우의 옛 여자친구 하윤은 지금 실종 상태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경찰은 치우를 의심하고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단체 M&F에서도 그를 주목한다. 


요즘 유행하는 세계관 멀티버스 즉 이곳이 아닌 세계에서 나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딜리터』는 레이어 즉 다른 막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딜리터에 의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과거의 기억을 지운 채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이런 상상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각각의 레이어 안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레이어를 볼 수 있는 이수가 그걸 증명해 준다. 


죽는다는 건 다른 세계로 건너가 편히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는 의미라고 『딜리터』는 이야기한다. 그러니 슬프지도 아프지도 말라는 조언을 해주는 셈이다. 하나씩 지우다 보면 결국엔 남지 않겠지만 괜찮다. 지워진 건 레이어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대신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물건을 옮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종은 나 자신. 


게으름 먼저 옮겨주세요. 딜리터 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