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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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세대주 오영선』을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의 제목과 작가 이름을 적다가 깨달았다. 주인공 영선의 중간 이름의 모음을 옆으로 돌리면 양선이 된다는 것을. 소설 속 영선과 현실의 양선은 문예 창작을 전공했다. 집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 있었고 어찌어찌 집을 구했지만 그닥 내일이 희망적이지는 않다. 최양선은 오영선을 통해 꼭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자신과 비슷한 이름을 부여하고 세상에 내보냈다. 가라, 영선!


이 미친 부동산 열풍. 자고 나면 수천씩 올라가는 집값. 숨 쉬는 비용 빼고 모은 돈 1억이 우스워지는 세상. 집이 있는데도 집을 얻기 위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얼굴. 술 대신 대출을 권하는 사회. 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썼던 소설가는 집을 구하다 지친 고단한 현실을 사는 어른들을 만난다. 『세대주 오영선』은 오늘을 사는 이라면 꼭 읽어야할 우리 시대의 필독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현실에 뿌리를 둔 소설이다. 내가 난감해 하는 장르가 있다면 SF인데 어쩐지 나는 환상과 우주와 몇 백 년 후의 미래 사회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 지금 힘들어도 버티면 밝은 미래가 있을 거야 어쩌고 하는 개소리로 나를 달래는데 당장 1분 후도 장담하지 못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는 그 입을 한 대 치고 싶다. 우선 지금, 당장, 오늘이다. 『세대주 오영선』은 지금과 당장과 오늘을 그린다.


89년생. 수도권의 사년제 문예 창작학과 졸업. 한 달에 150만 원 받는 사무직 아르바이트생.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여동생 한 명과 전세 1억 2천만 원 집에 거주. 그마저도 곧 있으면 나와야 하는. 오영선의 간단 이력이다. 감히 연민을 느끼지 말라. 금수저들 빼면 우리 사는 모습 이렇지 않을까.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고생 배틀에 참여 할까 말까 할 프로필 정도이다.


그저 열심히 살려고 애쓰면서 꿈을 놓지 않으려는 평범한 내 주변의 친구. 오영선. 엄마가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청약통장 하나로 영선의 심심한 하루가 스펙터클하게 바뀐다. 청약통장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어른이, 있겠지, 있어, 토론에 나와서 무식함을 드러내는, 어른. 영선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은행에 가서야 알게 된다. 엄마가 아빠 빚을 갚으면서도 깨지 않고 남겨둔 청약 통장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다. 『세대주 오영선』은 누구라도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나 지금 독서하고 있다아, 하는. 그니까 건들지 마. 집 위에 동그라미, 그 안에 쓰인 숫자가 우리 삶을 어떻게 쥐고 흔드는지 탄식하면서. 한숨은 기본.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영선이 어떤 선택을 할까.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답게 문장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설을 끌고 나간다. 잠시도 딴생각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제의 피로와 내일의 걱정을 잊게 만든다. 영선, 경민, 휴. 나이대가 다른 세 여성이 집 때문에 겪는 상황이 기막히고 서글프다. 나의 단점 중에 하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남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세대주 오영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저 유명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있지 않느냐고 알려준다. 내가 좀 유명한 사람이면 최양선의 『세대주 오영선』을 읽으라고 하고 그러면 갑자기 판매량이 늘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우리 영선이가 알려지고 따라서 양선도. 한숨.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 죄송. 『세대주 오영선』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에 작가의 다른 책을 사서 읽으며 다음 작품에 힘이 되는 것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옆을 걷고 있는 영선에게 바닐라 라테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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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1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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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소설 보다 : 가을 2021』을 펼쳐 들었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야 하는 생각과 함께. 토요일은 내내 자고 그나마 일요일이 되어야 책을 펼칠 힘이 난다, 요즘에는. 숫자 강박이 있는 나로서는 한 달에 열다섯 권 정도를 읽자는 다짐에 그걸 지키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지금은. 포기했다. 한 달에 다섯 권 읽으면 많이 읽는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다섯 권 밖에 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에 위축이 된다. 그게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아서.


『소설 보다 : 가을 2021』에 실린 세 편의 소설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했다. 순서대로 읽긴 싫었다. 경험상 보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보단 후루룩 넘기다가 어떤 문장이 눈에 들어오면 그 소설부터 읽으면 된다. 그러면 실패가 없다. 내 기분과 내 취향이 맞지 않는 소설이 간혹 있어서 인내하듯 읽었다, 몇 편은. 환한 낮의 독서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위로받기 위한 소설이 필요하다.


우주가 도왔을까,는 아니고. 세 편의 소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너덜거리는 정신을 구해주었다.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손뼉을 치며 말해주는 것 같은 세 편의 소설이었다.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는 소설도 좋았지만 평론가와 작가가 대담을 나누는 부분이 더 좋았다. 권혜영의 말. 본인은 상근직 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글은커녕 책을 읽을 힘도 쓰지 못한다고. 등단기를 읽는 걸 좋아한다.


일하고 퇴근하고 와서 글을 써 등단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대단하고 부럽다. 씁쓸하기도 하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대체 너는 뭘 하고 있냐는 질책을 받는 것 같아서. 이런 감정 느낄 필요도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느끼는 자기혐오의 마음. 권혜영은 그런 마음을 엷게 해 주었다.


나는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은 자야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도는 사람인데. 다섯 시간 자도 괜찮다. 미라클 모닝, 이러니까. 겨우 '워라밸'을 맞춰서 저녁에 여유가 좀 생길라치면 취미를 만들래요.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래요. 아니, 저녁 먹고 늘어지게 있다가 그냥 씻고 자면 안 되나.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데.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의 이런 지점들이 숨 가쁘게 다가오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소설 보다 : 가을 2021』中에서, 권혜영의 말)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 없다」는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나'가 화재 경보 소리를 들으면서 경험하는 대략 난감한 상황을 그린다.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돈을 위해 뼈가 녹도록 일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불이 난 건지 잘못 울린 건지 모를 소리에 계단을 향해 내려가면서도 일층에 도착해 다시 올라가면 몇 시간을 잘 수 있는지 생각한다. 지독한 현실이다.


「시트론 호러」에서 구소현은 귀여운 귀신을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귀신. 도서관과 서점을 부유하면서 책을 읽는 누군가 옆으로 간다. 귀신 공선은 독서 메이트를 찾아 방황하다가 효주를 발견한다. 효주는 한 번 잡은 책은 재미가 있든 없든 끝까지 보는 성격이다. 나 같다. 어느 날부터 효주는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고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공선은 착잡함을 감출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쓰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소설의 원형이다, 「시트론 호러」는.


이주란을 왜 좋아할까를 생각한다. 「위해」를 읽다 보니 알겠더라. 이주란은 어려운 마음을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 가난의 마음과 가난 때문에 힘든 기분. 도움을 받고 싶지만 받으면 안 될 것 같기에 망설이는 하루들. 친구 집에 찾아갔다가 어렵게 길을 찾아서 돌아오는 하루. 옆집에 사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하루. 위로받고 싶어서 타인을 먼저 위로하는 하루. 「위해」에는 그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가을 지나 겨울. 메일로 『소설보다 겨울 : 2021』이 나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번 주는 기쁘고 슬펐다가 다시 기뻤다. 감정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실체도 없는 감정과 기분 때문에 나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책을 많이 읽고 꾸준히 글을 쓰는 일의 생각. 위해의 마음은 그걸로 된다. 맛있는 거 먹고 청소하고 책 잠깐 읽다가 낮잠을 길게 자는 하루. 내가 기대하는 건 그런 하루의 축적이다.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인간이라서 좋은 시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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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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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어난 일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나에게 일을 알려주고 떠난 전임자는 전화에 대고 일단 6개월을 버티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내가 아닌 자신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전임자도 새로운 직장에 가지 얼마 안됐다. 힘들고 어려운 게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는 대신 나에게 해주는 말로 가장해서 스스로에게 위로를 주고 있었다.


왜 6개월일까. 1년도 있고 2년도 있는데. 6개월은 일을 시작하고 본인이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주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맞다. 6개월 차인 나는 문을 닫고 나와 이제 그만할래, 지지를 선언했다, 울면서. 아직도 나는 일이 힘들거나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는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 다행히도 당사자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과 말이 심했다고 알려주었다. 나에게도 인격이라는 게 있노라고.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힘든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솔직히 당신 때문에 힘들었는데 말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 정도의 말을 하는데도 숨이 차고 지쳐버렸다. 한 젊은 공무원이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면 안 되지라는 것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멈춰야 한다. 나를 없애면서까지 나를 혐오하면서까지 할만한 일인가 곱씹게 되었다.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들은 친구는 피해를 당한 건 너인데 왜 네가 그만두어야 하냐고 했다. 용기를 내라고 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나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이 자리가 더러우면 침을 뱉고 나오면서 더 더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나오더라도 다음 사람을 위해 깨끗하게 만들어 놓고 나와야 한다고. 주소록을 열고 버튼을 눌러 그간의 상황과 마음을 전달했다. 내 전화를 받은 이는 자신도 내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당신 자신도 불편한 마음을 느꼈고 그걸 내내 겪었을 내가 마음이 쓰였다고.


김민섭의 『훈의 시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휴가 가거나 퇴근 시 눈치 주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휴가에는 사유가 없다.' 많은 말들이 쓰였는데 유독 휴가에 관한 부분에 마음이 갔다. 한 사람은 연차를 쓰라고 하고 한 사람은 연차를 쓰면 일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애매한 말을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휴가에는 사유가 없다'라는 문장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훈의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훈을 찾아본다.


가르치다의 중심 의미를 가진 훈은 놀랍게도 일상의 가까운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집에서는 가훈으로 학교에서는 급훈과 교훈, 회사에서는 사훈으로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숙제로 가훈을 써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훈의 언어를 인지한 때였다, 그때가.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있었나. 숙제니까. 공부는 못 하지만 말 잘 듣고 인사 잘하고 숙제 잘하는 것으로 나를 꾸미던 시절이니까 가훈을 물었다. 신언서판. 네 글자를 공책에 적어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는 어땠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칠판 위의 액자에 뭐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웃긴 급훈만이 떠오른다. '엄마가 보고 있다.' 같은. 전임자는 말했다. 자신은 직장을 옮기면 먼저 하는 일이 취업 규칙을 읽는 일이라고. 나는. 나는. 취업 규칙을 읽을 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루에 가장 많이 한 말이 죄송해요, 제가 처음이라서요, 온 지 얼마 안돼서요 상대가 들으면 화나는 말이었다.


죄송하고 처음이고 온 지 얼만 안되면 더 잘해야 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바뀐 건 없다. 일을 하다 보면 능숙해지는 게 아니라 몰랐던 게 자꾸 튀어나오고 그걸 물으면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 난다는 식으로 대꾸를 해서 주눅이 들었다. 주눅 든 나 자신을 누군가는 봤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나 역시도 쉽게 바뀔 수 없다. 그럼에도. 타인에게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훈의 시대』는 학교, 직장, 아파트, 개인의 책꽂이에 쓰이는 훈의 언어를 조명한다. 남학교는 없는데 여학교는 있다. 여중과 여고를 다닌 나로서는 이게 차별의 언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순결 캔디를 줘서 먹긴 먹었는데 정확한 의미도 모르고 먹을 걸 주니까 신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따라 부르라니까 교가를 부르고 5인 미만의 사업장이이서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된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아파트 이름에 대해서는 아파트에 산 역사가 짧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심함과 무지함으로 살았다. 단어 하나로써 나약한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겪어보니까 알겠더라는 안일함으로 살아갔다. 『훈의 시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5,000원으로 살 수 있는 훈의 언어의 예시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책꽂이를 유심히 보다 보면 알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추구하는 그가 외치고 싶은 훈의 언어가 무엇인지. 화내지 않고 말할 수 없을까. 무례함에 웃으면서 받아칠 수 있을까. 되지도 않는 말에는 어떤 식으로 응수할까.


요즘의 내 화두다.


몰랐는데 『훈의 시대』를 읽으며 알았다. 배달의민족 사훈을. 웃기면서 서글픈 사훈.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면 뭐 하냐. 눈치 보지 않고 연차를 쓸 수도 없는데. 나는 내가 단단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책을 읽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였다. 나쁘고 이상한 훈을 바꾸려는 노력은 나와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훈의 시대』는 그런 마음이 담긴 책이다.


괴상한 훈을 찾아내어 알려주는 노력. 무사안일하게 살다가 내게 닥치는 불합리함 앞에 도망치기에 바빴던 나는 잘못은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일의 사명을 『훈의 시대』를 통해 깨닫게 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면 누군가는 슬퍼하지 않을까. 고민해야 한다. 『훈의 시대』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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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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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대리 기사를 부르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면허가 없다. 운전을 배우지 않았기에 운전면허가 없고 그리하여 차가 없다는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 차가 없어요 하면 그럴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운전면허가 없어요 하면 놀란다. 심지어 자전거도 못 탄다는 말에는 경악을 한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하는 눈빛.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닌다. 운전을 하고 차를 사면 생활권이 넓어진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시야가 달라질 거야. 달라지겠지.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겠지. 여기보다 거기, 그곳을 알면서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겠지. 거기까지. 내게는 거기와 그곳을 동경할 체력이 없다. 주말이 왜 이틀뿐일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다 못해 우울해지기까지 하다.


김민섭의 『대리사회』는 대학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여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시간 강사를 하던 김민섭은 학교를 그만둔다. 학교에서 근무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4대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의료보험비를 걱정했다. 맥도날드에 근무하면서 가족의 의료보험비를 낼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신분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학교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교와 시간강사로 근무했던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은 김민섭은 대리운전을 시작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깊게 고민하면서 실제 삶의 체험 현장으로 뛰어든다. 카카오 드라이버에 가입해서 대리 기사가 된다. 수수료 20퍼센트를 제하면 다음날 돈이 입금 된다. 원고를 써서 돈을 벌 때와는 다른 감각이 존재한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원고료는 다음 달, 심지어는 두 달이 넘어도 입금이 되지 않기도 했다.


『대리사회』 속 세상은 신랄했다. 상상하고 사색해서 쓴 글이 아니다. 밤부터 새벽까지. 어떨 때는 아내와 함께. 대리운전을 하며 겪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리 기사를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는 김민섭이 살아낸 대리운전기사의 생태계를 운 좋게도 엿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책은 노동이라는 가치를 함부로 여기는 타인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쓰였다. 잘못을 따지거나 꾸짖지 않는다. 심지어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서 바라본 삶의 풍경을 쉽고 정다운 언어로 표현한다. 『대리사회』는 체험이라는 진정성을 획득하여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술을 마셔 직접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호출로 김민섭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대리사회』는 묻고 답한다. 일하는 사람은 나인데 주체가 되지 못하는 노동의 현장에서 나를 어떤 방식으로 지켜 나갈 것인가. 김민섭은 논문을 쓰는 대신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답을 찾아간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보인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호칭에서부터 단어 선택까지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심각할 정도로 조심스러워야 한다. 예전의 나는 책에서 그러한 점을 배웠다면 요즘의 나는 실생활에서 느끼고 깨닫는다. 김민섭이 대학을 나와(책으로 익힌 세상이 아닌) 직접 발로 뛰면서 배운 현실이 더 입체적이었듯이 나 역시 우물 안에서 나온 개구리의 자세로 세계의 다층적인 면을 매일 만나고 있다.


대리운전을 부를 일은 없을지라도 대리운전을 불러서 가는 차에 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기사님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대리사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말 한마디라도 고생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뒤에 따라오는 차(대리 기사님을 픽업해가는 차)가 없다면 어떻게 나가시나요 물어봐 주는 일. 온기를 전하는 일은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이뤄낼 수 있다.


가끔 억울하다. 나는 책을 읽어가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데 일부의 타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오늘도 나는 짜증과 고함이 섞인 말에 대답을 해야 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은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됐을지는 모르겠다. 『대리사회』에는 운전석에서 만난 별의별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김민섭은 내내 운전석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 그것에 비하면 나의 하루는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고통에 나를 대입해 슬픔을 무력화하는 것. 책을 읽어가는 이유가 되겠다, 이기적인 이유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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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소크라테스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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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소설 『거꾸로 소크라테스』를 빨리 읽고 싶었다. 일요일 오전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운 자리에서 세 편을 내리읽었다. 그러다 배고파서 잠깐 책을 덮어 두었다. 마지막 한 편이 남았을 때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아. 안돼. 월요일이라니. 빨리 자야 하는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일 끝나고 와서 읽지 뭐. 했지만 다섯 번째 소설인 「거꾸로 워싱턴」을 일주일 내내 읽었다는 진실. 거짓말, 뻥 아니고. 6시에 문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손목과 등이 아팠다. 길바닥에 눕고 싶을 지경이었다. 누워 있으면 그대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순간 이동 같은 거 그런 걸로는 안 되나. 집에 와서 씻고 뉴스 보고 그러면 밤 아홉시.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을 보다 보면 열시 반.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한 장 읽었을까. 잠이 쏟아진다. 잠깐 눈을 감고 있을까 했지만 스탠드를 끄고 등과 바닥이 혼연일체가 되어 잠이 든다. 금요일이 되어서야 『거꾸로 소크라테스』를 전부 읽을 수 있었다. 금요일이니까 가능했다. 모든 요일이 금요일이 되기를, 미래의 어느 날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혹은 견디는 듯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고 경이롭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챙겨 먹고 일하러 가는 일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는걸. 남과 다투지 않고 아프게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걸. 몰랐고 이제는 알게 되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인상 깊은 기억 외에는 그 시절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둘씩 그때의 그 기억이 떠오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랬었나 하는 일이 그랬었지 하는 식으로. 답답한 시절을 살았는데 잘도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표제작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선입견으로 가득 찬 담임선생님의 사고를 전환 시켜주는 이야기이다. 생각이 깊은 전학생 안자이 덕분이다.


교사의 말 몇 마디는 아이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가져온다. 무심코 뱉은 말에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혹은 그 말에 압도되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안자이가 본 구루메 선생님은 구사카베를 함부로 대한다.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폄하한다. 안자이는 친구들과 작전을 펼친다. 구루메 선생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모두에게 보이려 한다.


이사카 고타로니까 가능한 소설이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것에. 힘이 있음에 도취되어 남에게 뻔뻔하게 상처를 주는 것에. 솔직하게 굴면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것에.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너희들 그러면 절대 못 쓴다는 교훈을 경쾌하게 이야기한다. 기발한 술수를 쓰지 않는다. 아이들이 짜내는 묘책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시험을 잘 보게 만든다든지. 능력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낸다든지. 오해가 생긴 상황에서 진실을 알려준다든지. 『거꾸로 소크라테스』에는 평범에 평범을 더한 빛나는 순간이 존재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악의에는 선의로 맞설 수 있다고도.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살아가고 싶다. 역사와 인류의 미래를 바꿀만한 능력 같은 건 내게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다만 그저 나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오늘을 보내고 싶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해 준다. 힘들면 그만해도 되고 하지 못한 일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계속 말해준다.


소설 속 말처럼 약속을 잘 지키고 믿을만하고 착실한 나로 살아간다. 놀라운 이야기는 평범함 속에서 나온다. 이사카 고타로의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그의 다른 어떤 소설 보다 놀랍고 아름답다. 특별할 것 없는 나라는 사람이 실은 괜찮고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사는 거. 어려울 거 없어. 네가 하던 대로 하면 돼. 인사 잘하고 친절한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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