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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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일어난 일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나에게 일을 알려주고 떠난 전임자는 전화에 대고 일단 6개월을 버티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내가 아닌 자신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전임자도 새로운 직장에 가지 얼마 안됐다. 힘들고 어려운 게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는 대신 나에게 해주는 말로 가장해서 스스로에게 위로를 주고 있었다.


왜 6개월일까. 1년도 있고 2년도 있는데. 6개월은 일을 시작하고 본인이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주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맞다. 6개월 차인 나는 문을 닫고 나와 이제 그만할래, 지지를 선언했다, 울면서. 아직도 나는 일이 힘들거나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는 버릇을 못 고치고 있다. 다행히도 당사자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과 말이 심했다고 알려주었다. 나에게도 인격이라는 게 있노라고.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힘든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솔직히 당신 때문에 힘들었는데 말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 정도의 말을 하는데도 숨이 차고 지쳐버렸다. 한 젊은 공무원이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면 안 되지라는 것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멈춰야 한다. 나를 없애면서까지 나를 혐오하면서까지 할만한 일인가 곱씹게 되었다.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들은 친구는 피해를 당한 건 너인데 왜 네가 그만두어야 하냐고 했다. 용기를 내라고 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나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이 자리가 더러우면 침을 뱉고 나오면서 더 더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나오더라도 다음 사람을 위해 깨끗하게 만들어 놓고 나와야 한다고. 주소록을 열고 버튼을 눌러 그간의 상황과 마음을 전달했다. 내 전화를 받은 이는 자신도 내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당신 자신도 불편한 마음을 느꼈고 그걸 내내 겪었을 내가 마음이 쓰였다고.


김민섭의 『훈의 시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휴가 가거나 퇴근 시 눈치 주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휴가에는 사유가 없다.' 많은 말들이 쓰였는데 유독 휴가에 관한 부분에 마음이 갔다. 한 사람은 연차를 쓰라고 하고 한 사람은 연차를 쓰면 일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애매한 말을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휴가에는 사유가 없다'라는 문장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훈의 시대』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훈을 찾아본다.


가르치다의 중심 의미를 가진 훈은 놀랍게도 일상의 가까운 곳에서 쓰이고 있었다. 집에서는 가훈으로 학교에서는 급훈과 교훈, 회사에서는 사훈으로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숙제로 가훈을 써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훈의 언어를 인지한 때였다, 그때가. 우리 집에도 그런 게 있었나. 숙제니까. 공부는 못 하지만 말 잘 듣고 인사 잘하고 숙제 잘하는 것으로 나를 꾸미던 시절이니까 가훈을 물었다. 신언서판. 네 글자를 공책에 적어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는 어땠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칠판 위의 액자에 뭐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웃긴 급훈만이 떠오른다. '엄마가 보고 있다.' 같은. 전임자는 말했다. 자신은 직장을 옮기면 먼저 하는 일이 취업 규칙을 읽는 일이라고. 나는. 나는. 취업 규칙을 읽을 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하루에 가장 많이 한 말이 죄송해요, 제가 처음이라서요, 온 지 얼마 안돼서요 상대가 들으면 화나는 말이었다.


죄송하고 처음이고 온 지 얼만 안되면 더 잘해야 하지 않나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바뀐 건 없다. 일을 하다 보면 능숙해지는 게 아니라 몰랐던 게 자꾸 튀어나오고 그걸 물으면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 난다는 식으로 대꾸를 해서 주눅이 들었다. 주눅 든 나 자신을 누군가는 봤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나 역시도 쉽게 바뀔 수 없다. 그럼에도. 타인에게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훈의 시대』는 학교, 직장, 아파트, 개인의 책꽂이에 쓰이는 훈의 언어를 조명한다. 남학교는 없는데 여학교는 있다. 여중과 여고를 다닌 나로서는 이게 차별의 언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순결 캔디를 줘서 먹긴 먹었는데 정확한 의미도 모르고 먹을 걸 주니까 신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따라 부르라니까 교가를 부르고 5인 미만의 사업장이이서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된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아파트 이름에 대해서는 아파트에 산 역사가 짧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심함과 무지함으로 살았다. 단어 하나로써 나약한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겪어보니까 알겠더라는 안일함으로 살아갔다. 『훈의 시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5,000원으로 살 수 있는 훈의 언어의 예시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책꽂이를 유심히 보다 보면 알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추구하는 그가 외치고 싶은 훈의 언어가 무엇인지. 화내지 않고 말할 수 없을까. 무례함에 웃으면서 받아칠 수 있을까. 되지도 않는 말에는 어떤 식으로 응수할까.


요즘의 내 화두다.


몰랐는데 『훈의 시대』를 읽으며 알았다. 배달의민족 사훈을. 웃기면서 서글픈 사훈.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면 뭐 하냐. 눈치 보지 않고 연차를 쓸 수도 없는데. 나는 내가 단단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책을 읽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였다. 나쁘고 이상한 훈을 바꾸려는 노력은 나와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훈의 시대』는 그런 마음이 담긴 책이다.


괴상한 훈을 찾아내어 알려주는 노력. 무사안일하게 살다가 내게 닥치는 불합리함 앞에 도망치기에 바빴던 나는 잘못은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일의 사명을 『훈의 시대』를 통해 깨닫게 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면 누군가는 슬퍼하지 않을까. 고민해야 한다. 『훈의 시대』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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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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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대리 기사를 부르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면허가 없다. 운전을 배우지 않았기에 운전면허가 없고 그리하여 차가 없다는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 차가 없어요 하면 그럴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운전면허가 없어요 하면 놀란다. 심지어 자전거도 못 탄다는 말에는 경악을 한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하는 눈빛.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닌다. 운전을 하고 차를 사면 생활권이 넓어진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시야가 달라질 거야. 달라지겠지.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겠지. 여기보다 거기, 그곳을 알면서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겠지. 거기까지. 내게는 거기와 그곳을 동경할 체력이 없다. 주말이 왜 이틀뿐일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다 못해 우울해지기까지 하다.


김민섭의 『대리사회』는 대학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여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시간 강사를 하던 김민섭은 학교를 그만둔다. 학교에서 근무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4대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의료보험비를 걱정했다. 맥도날드에 근무하면서 가족의 의료보험비를 낼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신분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학교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교와 시간강사로 근무했던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은 김민섭은 대리운전을 시작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깊게 고민하면서 실제 삶의 체험 현장으로 뛰어든다. 카카오 드라이버에 가입해서 대리 기사가 된다. 수수료 20퍼센트를 제하면 다음날 돈이 입금 된다. 원고를 써서 돈을 벌 때와는 다른 감각이 존재한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원고료는 다음 달, 심지어는 두 달이 넘어도 입금이 되지 않기도 했다.


『대리사회』 속 세상은 신랄했다. 상상하고 사색해서 쓴 글이 아니다. 밤부터 새벽까지. 어떨 때는 아내와 함께. 대리운전을 하며 겪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리 기사를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는 김민섭이 살아낸 대리운전기사의 생태계를 운 좋게도 엿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책은 노동이라는 가치를 함부로 여기는 타인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쓰였다. 잘못을 따지거나 꾸짖지 않는다. 심지어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서 바라본 삶의 풍경을 쉽고 정다운 언어로 표현한다. 『대리사회』는 체험이라는 진정성을 획득하여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술을 마셔 직접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호출로 김민섭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대리사회』는 묻고 답한다. 일하는 사람은 나인데 주체가 되지 못하는 노동의 현장에서 나를 어떤 방식으로 지켜 나갈 것인가. 김민섭은 논문을 쓰는 대신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답을 찾아간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보인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호칭에서부터 단어 선택까지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심각할 정도로 조심스러워야 한다. 예전의 나는 책에서 그러한 점을 배웠다면 요즘의 나는 실생활에서 느끼고 깨닫는다. 김민섭이 대학을 나와(책으로 익힌 세상이 아닌) 직접 발로 뛰면서 배운 현실이 더 입체적이었듯이 나 역시 우물 안에서 나온 개구리의 자세로 세계의 다층적인 면을 매일 만나고 있다.


대리운전을 부를 일은 없을지라도 대리운전을 불러서 가는 차에 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기사님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대리사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말 한마디라도 고생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뒤에 따라오는 차(대리 기사님을 픽업해가는 차)가 없다면 어떻게 나가시나요 물어봐 주는 일. 온기를 전하는 일은 사소한 말과 행동으로 이뤄낼 수 있다.


가끔 억울하다. 나는 책을 읽어가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데 일부의 타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오늘도 나는 짜증과 고함이 섞인 말에 대답을 해야 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은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됐을지는 모르겠다. 『대리사회』에는 운전석에서 만난 별의별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김민섭은 내내 운전석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 그것에 비하면 나의 하루는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고통에 나를 대입해 슬픔을 무력화하는 것. 책을 읽어가는 이유가 되겠다, 이기적인 이유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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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소크라테스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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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소설 『거꾸로 소크라테스』를 빨리 읽고 싶었다. 일요일 오전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운 자리에서 세 편을 내리읽었다. 그러다 배고파서 잠깐 책을 덮어 두었다. 마지막 한 편이 남았을 때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아. 안돼. 월요일이라니. 빨리 자야 하는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일 끝나고 와서 읽지 뭐. 했지만 다섯 번째 소설인 「거꾸로 워싱턴」을 일주일 내내 읽었다는 진실. 거짓말, 뻥 아니고. 6시에 문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손목과 등이 아팠다. 길바닥에 눕고 싶을 지경이었다. 누워 있으면 그대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순간 이동 같은 거 그런 걸로는 안 되나. 집에 와서 씻고 뉴스 보고 그러면 밤 아홉시.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을 보다 보면 열시 반.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한 장 읽었을까. 잠이 쏟아진다. 잠깐 눈을 감고 있을까 했지만 스탠드를 끄고 등과 바닥이 혼연일체가 되어 잠이 든다. 금요일이 되어서야 『거꾸로 소크라테스』를 전부 읽을 수 있었다. 금요일이니까 가능했다. 모든 요일이 금요일이 되기를, 미래의 어느 날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혹은 견디는 듯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고 경이롭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챙겨 먹고 일하러 가는 일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는걸. 남과 다투지 않고 아프게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걸. 몰랐고 이제는 알게 되면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인상 깊은 기억 외에는 그 시절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둘씩 그때의 그 기억이 떠오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랬었나 하는 일이 그랬었지 하는 식으로. 답답한 시절을 살았는데 잘도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표제작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선입견으로 가득 찬 담임선생님의 사고를 전환 시켜주는 이야기이다. 생각이 깊은 전학생 안자이 덕분이다.


교사의 말 몇 마디는 아이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효과를 가져온다. 무심코 뱉은 말에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혹은 그 말에 압도되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안자이가 본 구루메 선생님은 구사카베를 함부로 대한다.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폄하한다. 안자이는 친구들과 작전을 펼친다. 구루메 선생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모두에게 보이려 한다.


이사카 고타로니까 가능한 소설이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것에. 힘이 있음에 도취되어 남에게 뻔뻔하게 상처를 주는 것에. 솔직하게 굴면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것에.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너희들 그러면 절대 못 쓴다는 교훈을 경쾌하게 이야기한다. 기발한 술수를 쓰지 않는다. 아이들이 짜내는 묘책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시험을 잘 보게 만든다든지. 능력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낸다든지. 오해가 생긴 상황에서 진실을 알려준다든지. 『거꾸로 소크라테스』에는 평범에 평범을 더한 빛나는 순간이 존재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악의에는 선의로 맞설 수 있다고도.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살아가고 싶다. 역사와 인류의 미래를 바꿀만한 능력 같은 건 내게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다만 그저 나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오늘을 보내고 싶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해 준다. 힘들면 그만해도 되고 하지 못한 일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고, 계속 말해준다.


소설 속 말처럼 약속을 잘 지키고 믿을만하고 착실한 나로 살아간다. 놀라운 이야기는 평범함 속에서 나온다. 이사카 고타로의 『거꾸로 소크라테스』는 그의 다른 어떤 소설 보다 놀랍고 아름답다. 특별할 것 없는 나라는 사람이 실은 괜찮고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사는 거. 어려울 거 없어. 네가 하던 대로 하면 돼. 인사 잘하고 친절한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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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김민섭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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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마음과 몸의 상태가. 정상이고 괜찮은 척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어색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불을 붙이기 전의 시한폭탄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 불만 붙여 봐라. 그러면 화끈한 맛을 보여줄 테다. 팡팡하고 터지며 난리와 지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여줄 테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랬더니. 뭔가 눈치를 챈 걸까.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느껴졌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약간의 조심성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매사에 웃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굴었더니. 얘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여긴 것일까. 하대는 물론 비아냥에 약간의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참았다. 일단은. 지금까지 나는 그런 상황을 참아야 하는 건 줄 알았고 참았다. 그러다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별안간 불이 꺼졌다.


그런 게 얼굴에 다 드러났을까. 이후에는 개소리도 하지 않고 말도 예전만큼이나 걸지 않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9시부터 6시까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싶다. 가능하다면 나 혼자 일하고 싶다.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이제는 힘들다. 반말과 무시와 조롱을 참기가 어렵다. 그렇고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집에 돌아와 책을 읽으며 어두워진 마음에 불을 켜려고 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김민섭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연약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제목을 보고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턱대고 해주는 위로의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간의 나의 억울함과 분노를 이야기할 때 앞뒤 따지지 않고 상대가 해줬으면 하는 말이었다. 그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과 행동이었고 너는 옳았다는 식의 말. 답정너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다. 너는 잘했다. 너는 괜찮고 네가 잘 되면 좋겠다. 예의가 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부를 못 하지만 인사성이 바르다는 문장이 쓰인 생활통지표를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먼저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종결 어미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말했다. 명령의 의도가 담겨 있기는 하지만 의문문으로 말해 상대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여지를 줬다. 그랬는데. 그렇게 했는데. 저 사람은 쉽네라는 인상으로 남았다. 내가 이런 태도와 말을 해도 저 사람은 웃으며 넘기고 날카로운 말 한마디 못하네라는 인상으로 말이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예의 바르게 굴면 상대도 똑같이 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모욕. '깔보고 욕되게 함'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은 정의한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의 김민섭 작가는 자신이 받은 모욕의 대가를 '고소'라는 방법으로 돌려준다. 책은 나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이야기한다. 연약한 자신으로 살아가기에 한국 사회는 만만치 않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는 연약한 나와 당신들을 위로한다. 당신이 가진 연약함은 결코 모욕과 수모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연약한 우리를 함부로 대하면 세상은 나날이 나빠질 수 있다고도.


헌혈을 하고 취소 수수료가 아까워 항공권을 양도한다. 일의 시작은 단순했다. 후쿠오카행 여행을 가려고 했지만 김민섭은 아이의 수술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항공권을 취소해야 했다. 취소 대신 양도는 어떨까. 그때부터 일은 시작된다. 대한민국 남성. 이름이 김민섭일 것. 영문 이니셜이 같을 것.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김민섭은 김민섭을 찾아 나선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여행을 갈만한 생활을 가진 대한민국 남성의 김민섭이 있을까.


있었다. 나타났다. 93년생 김민섭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 고등학교 교사는 김민섭 씨의 숙박비를 후원해 주겠다고 나서고 대기업은 졸업 전시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저 취소 수수료가 아까워서 벌인 일은 후의와 호의가 모여 미담의 사례로까지 번진다. 왜 나를 그렇게 도와주는지 모르겠다는 93년생 김민섭 씨의 질문에 83년생 김민섭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다고.


대학에 있을 때 대학에서 나올 때 받았던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며 들려준 말을 다시 해준 것이다. 당신이 잘 되는 일은 내가 잘 되는 일이었다. 당신과 내가 잘되면 세상 모두가 잘되지 않겠느냐는 행복한 결말을 가진 동화 같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지나고 있는 연약의 시기를 나 역시 겪었노라고. 우리 모두 연약한 시절이 있었고 그걸 잊지 않으면 된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스크를 벗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수 있는 날이 올까. 의문이 든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는 이런 세상이어도 기묘하게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상황이 문제라고 소란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방식으로(각자 달리고 남에게 욕을 하지 않고 헌혈을 하는) 연약의 시절을 겪는 우리를 보듬어 가기를 바란다. 상대가 가진 연약함을 약점으로 보지 않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살아간다면 팬데믹의 세상이라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연약하다. 내내 연약하게 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로 나를 모욕하게 놔두면 안 된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연약한 상대들을 알아봐 주고 무지개떡을 나눠 먹는 일. 축하의 자리에 기꺼이 응답해 주는 일.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하루로 두려움을 없애는 일. 내가 나를 부정하는 일로 힘들어하지 않기를 이 책은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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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농담
이슬아 지음 / 헤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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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었는데 남이 쓴 글만 읽고 있는 삶. 괜찮은 건가를 묻는 건 괜찮지 않다는 뜻이겠지. 에너지와 활기와 생기 없음으로 지내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숨만 겨우 쉬고 있다. 어떨 때는 비염이 도져서 숨조차 쉬는 게 힘들다. 운동 같은 건 취미가 없고 사람 많은 데는 안 가는 게 아니고 못 가고. 주말 내내 걱정하다가(하필이면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깨서 실수 한 걸 찾아냈다. 무슨 일이래. 잠이 확 깨고 나 정말 미쳤구나. 중요한 걸 놓쳤구나 해서 식겁. 아침이 밝자마자 실수했다는 걸 밝히는 카톡을 보내고. 그것 또한 실례인데. 월요일에 한 번 더 도장을 찍어 주러 오십사 간곡하게 부탁했다.) 청소하다가 낮잠 자다가. 주말 인데.


으쌰 으쌰 해서 48시간을 알차게 써보자 매번 다짐하지만 피곤하고 피곤하다. 밥을 먹으면 등이 아파지고 잠깐 기대 있어야지 하다가 눕고 잠이 들고 오후도 아니고 저녁만 남은 일요일을 갖게 된다. 박막례 할머니 왈. 실패는 했다는 것의 증거.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에게 건네는 다정한 조언을 반복해서 듣는다. 요즘엔 유튜브가 마음 치료사다. 정확히 내 마음의 상태를 알고 영상을 추천해 준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옆으로 누워 그걸 보느라 또 시간이 날아간다.


이슬아의 창작 동료 인터뷰집 『창작과 농담』을 들춰보다가 단박에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배우 강말금과 감독 김초희를 인터뷰한 부분에서였다. 이슬아는 두 사람에게 질문한다. 두 분이 생각하는 부귀영화란 무엇인지. 강말금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한테 부귀영화는 일단 출퇴근하지 않는 것.' 이어서 김초희도 '맞아. 나도. 그거 안 하고 싶어서 이 직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라고 주고받는다.


가수, 작가, 감독, 배우를 인터뷰한 『창작과 농담』은 그들이 창작을 하기까지의 역사와 마음을 다룬다. 어떻게 창작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나 아니 어쩌다 창작하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나를 질문한다. 어떻게 와 어쩌다 사이를 이슬아는 능숙하게 넘나든다. 창작의 비기 같은 건 없고 그냥 그 사람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대화한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몰랐을 사람이 있고 책을 읽기 전부터 알던 사람이 있다. 차이점은 없다. 모르던 사람에게서는 좀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알던 사람에게서는 색다른 부분이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말로만 문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예전에는. 이제는 그런 말조차 안 한다. 부끄럽고 한심해서. 내가 쓰지 않아도 남들이 부지런히 그것도 기깔나게 쓰고 있잖아, 정신 승리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독서가 최고라고 하는데. 책을 읽다 보면 깨달음이 온다. 나는 이렇게 잘 쓸 자신이 없다. 하루하루를 지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에 대해 잘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 놓은 걸 보고는 감탄한다. 그 정도면 된다는 자기 위안.


화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참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왔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직장 다니면서 새벽까지 글을 써서 등단했다는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혼란에 빠진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아무래도 나는 틀렸어. 먼저 가. 이러고 있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닌데 괜히 자학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돌아와 책을 산다. 그 일로 퉁 친다.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창작과 농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이런 식이다.


그들은 인내한다. 창작하기 전까지의 고통스러움과 결과물을 완성하고 나서의 부끄러움을. 대중의 찬사와 혹평을 들으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창작이 있기 전에 삶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삶을 살아낸다. 가장 중요한 건 삶과 농담이라고 말한다. 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농담이 꼭 있어야 된다는 걸 아는 이들이 창작을 한다. 싸우고 절망하고 슬퍼지는 건 우리의 시간에 농담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과 말 사이에 조미료처럼 작용하는 농담을 적절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살아가는 것에 잠식 당하지 않고 다만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미워하는 마음은 왜 생길까. 실망은 왜 찾아올까. 아무리 책을 읽어도 현명해지지 않는다. 『창작과 농담』의 표지는 이슬아와 오혁이 실뜨기를 하는 두 손을 찍은 사진이다. 실뜨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놀이이다. 두 사람이 필요하다. 네 개의 손이 모여야 실을 펼치고 모을 수 있다. 겨우 손가락 몇 개를 움직였을 뿐인데 실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찬란하다.


표지 사진은 창작은 혼자였다가 둘이 되어야만 완성되는 일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일단 혼자 만든다. 혼자의 시간이 끝나면 다른 이가 필요하다. 당신의 고독과 슬픔과 비애를 알아봐 주는 이가 당신을 찾아와야 비로소 완성되는 창작.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펼쳐지는 실뜨기처럼 당신이 만들어낸 세계는 어떻게 변이 될지 알 수 없다. 실이 꼬이면 꼬이는 대로. 성공한 이의 후일담이 아닌 보통의 존재들이 피곤해하면서도 무언갈 만들어가는 모습을 『창작과 농담』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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